-어린 시절에는 만성절과 만령절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깊은 날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았다. 특히 매년 먹었던 만성절 과자가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마이어베크는 일 년에 단 한 차례, 이날에만 그 과자를 구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에게 딱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다. 흰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과자는 사람이 손아귀에 숨겨버릴 수 있을 만큼 작았고, 한 번에 네 조각짜리 한 줄을 구워냈다. 과자에는 밀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언젠가 나는 과자를 다 먹고 나서 손가락에 남은 밀가루 흔적을 보면서 일종의 계시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그날 저녁 내내 나무 숟가락으로 조부모님 침실에 있던 밀가루통을 휘저었던 기억이 있다. 그 안에 숨겨진 어떤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p65

-다음 기차를 타고 베로나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칠 년 전 급작스럽게 중단해버린 베로나 체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고, 카프카 박사가 1913년 9월 베네치아에서 베로나의 가르다 호수로 향하던 길, 그가 직접 묘사해놓은 바에 따르면 무한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는 어느 날 오후의 여정도 따라가보고 싶었다. 열린 차창으로 바람과 함께 찬란한 빛 속에 고인 풍경이 그대로 밀려들어왔고, 그렇게 한 시간을 채 달리지 않았을 때 시야에 포르타 누오바가 들어왔다. 둥그스름한 산 앞에 자리잡은 도시 베로나를 마주한 나는 기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몸을 움지일 수조차 없었으므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스스로도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의아함에 사로잡힌 상태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차가 다시 베로나를 출발하자 통로를 지나는 차장에게 부탁해 데센차노로 가는 표를 추가로 끊었다. 1913년 9월 21일 일요일 평소 한없이 깊은 우울함에 빠져 있던 카프카 박사가 언젠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을 유일한 행복으로 느끼며 홀로 누워서 갈대 사이로 일렁이는 물결을 응시하던 장소가 데센차노였다. p84-85

-회한이라고는 전혀 스며 있지 않는, 담담한 투로 뱉은 그 문장을 끝으로 암브로제 가족사를 종결지은 루카스는, 나에게 무슨 이유로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도 하필이면 11월에 다시 W를 찾을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매우 장황하면서도 군데군데 모순이 섞인 대답을 했는데,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것을 금방 이해했다.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과거에서 끌어올린 그림들을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것들이 과연 내가 기억한 대로 흘러갔던 것인지가 더욱 모호해질 뿐이라고, 왜냐하면 과거에 속한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한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 경악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p199

『현기증. 감정들』, W.G. 제발트,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