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상 2015. 6. 10. 00:14



1.
지난 한 해의 경험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성추행사건 해결을 위한 대책위에 참여한 것이다. 고민했던 것을 남기고 솔직한 심정을 글로 정리해보고도 싶다. 되지 않는다. 시도조차, 시도하고자 하는 마음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다시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경험의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채로 성폭력 문제들과 다시 대면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걱정 때문이다. 나는 내 변화가 새로운 각성과 다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느꼈던 무수한 회의와 혼란까지 포함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정리가 되지 않는 것 같다.


2. 
책의 어느 구절을 읽다가 엄마의 일기장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서울에 지내는 동안 쓴 일기들이다. 그걸 두고 간 것도 잊어버리고 신경쓰지 않는 게 내 엄마. 일기는 온통 화, 우울,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다시 꺼내 읽지 않았다. 다시 읽으며 새삼 마음이 먹먹해지는데 많지 않은 일기들에서 “윤미 좋아하는 과일, 고구마를 사러 시장에 가야겠다.”가 두 번이나 나와 혼자 웃었다. 나는 과일이 정말 좋다. 할머니가 되었을 때 과일 장사를 하고 있으면 좋겠다. 그럴 형편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엄마는 늘 과일을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어릴 적엔 대문밖엘 나서기 직전까지 입에 과일을 물고 있었다. 내가 엄마에 관한 다큐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건 참 뻔한 말이지만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언제나 늘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들다 보니 내 욕심까지 투명하게 드러나 버려서 좀 쑥스러웠다. 나와 엄마 사이의 지나치게 가깝지 않은 거리가 우리의 연대를 더 강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3.
아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최근 들어 그렇게 되었다. 이유 없는 증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자 언제고 이 화를 꼭 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4.
어제 수박을 많이 먹고 자서 새벽에 두어 번 깼다. 가장 마지막에 깬 것은 새벽 다섯 시경이었는데 다시 이불 위에 누우니 창문 너머로 하늘이 파랗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반수면 상태로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불어온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살짝 더 깨어난 정신으로 새소리를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이런 종류의 기쁨은 여행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부쩍 자주한다. 더 오래오래 떠나 있고 싶다. 거기에 머무르고 싶다.  


5.
롤랑 바르트 수업에서 선생님이 “생은 아이들 같은 것, 화초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자주 살피고 꾸준히 물을 공급하는 것. 아직은 아이들과 화초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싶다.


6.
욕망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것만으로도 구질구질해서 그동안 들여다 보기도 싫었던 내 욕망들을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게 되는 걸까. 생각 이상으로 이 수업이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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