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추석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릴 적 살았던 아파트에 들렀다. 국민학교 입학할 즈음부터 살아서 6학년 2학기가 되기 전에 떠났으니까, 5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4층짜리 건물이 세 개 동 있는 작은 단지였다. 외삼촌 명의로 된 집에 우리 가족이 월세를 내며 살던 곳,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너희집은 스무 평도 안 되냐’라고 말해서 상처받았던 열일곱 평의 집, 다들 좌변기를 들일 때 아직은 화변식 변기라 오래 똥을 누고 있으면 다리가 저려 일어서기가 힘들었던, 한동안은 우리 네식구에 막내 이모까지 같이 살았던 그런 집이었다.
아직은 볕이 뜨거운 낮이었다. 그날 나는 캠코더를 들고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을 찍었다. 놀이터에 쭈그리고 앉아 숨죽여 고양이를 찍고 있는 나를 두고 엄마와 남동생은 ‘쟤는 왜 저렇게 쓸데없는 고생을 하나’라고 한마디씩 했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자꾸 탄식이 나서 어느 곳이든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엄마가 소리칠 때까지 뛰놀았던 놀이터는 반으로 나뉘어 한쪽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나머지 반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쓰지 않았을지 모를 시소에는 버린 의자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네의 줄들은 모두 끊어졌다. 이것들 사이를 고양이들만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는 재개발추진사무소가 있었고 그래서 이곳 자체의 발전은 더이상 도모하지 않는 듯했다. 내가 살 적에 부모님이 종이 한 장을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이곳이 재개발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이십 년이 더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다. 이제 이곳에는 주민들이 모일 만한 곳이 없다. 하물며 쉬고 떠들만한 벤치가 없다. 건물은 참 많이도 낡았다. 외벽의 낡은 아파트 이름에 새칠을 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듯이 페인트칠은 조금씩 낡아가려고 애쓰는 듯했다. 아파트 이름이 얄궂게 보였다. 불현듯 찾아와 이렇게 낡고 황량해진 모습을 보니 당연한 건데도 탄식이 자꾸 났다. 당연한 건가. 하나의 공동체이기도 했던 아파트 단지들도 언젠가는 사라지는 걸까. 콘크리트의 수명이 다하면 사라지고 마는 걸까. 그럼 여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가을이면 무성하게 대추를 맺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가 아직 있었다. 어릴 적엔 참 크게 느껴지던 그 나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내가 자랐기 때문이겠지. 책으로만 보던 이런 뻔한 이야기를 직접 겪으니 생명과 시간에 대한 경이는 두 배가 되는 기분. 대추나무에 대추는 여전히 많이 열리고 있었다. 아파트 계단에 놓여 있던 작고 깨끗한 자전거와 더불어 가장 생기를 느낀 장면이었다. 

내 또래 중에는 작은 아파트 단지가 마음의 고향인 사람이 많지 않을까. 아버지가 어릴 적에 집 앞 실개천에서 친구들과 수영을 했다던 이야를 해주었듯이, 나는 2층 창문에서 아파트 단지가 울리게 나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모래 날리는 놀이터에서 공을 차던 나와 친구들 모습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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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입자인데다 건설업에 종사하던 아버지가 돈을 꽤 벌어 도시의 끝 외곽에 집을 샀고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났다. 집을 사겠다는 부모의 악착같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집을 소유하던 사람들은 딱히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었을 것 같다.
재개발이 된다고도 했기에 그 기대도 컸을 것이다. 내가 알던 주민들이 아직 많이 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정릉의 낡은 아파트를 방문했다. 무너지기 직전의 이 아파트에 아직 사는 사람들은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한때 재개발에 대한 기대로 버티다가 이제는 그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고 지금의 집값으로는 다른 곳으로 이사갈 수가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 내가 살던 아파트의 사정과 많이 닮아있었다. 아파트의 수명과 수명을 다해가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한때의 욕망과 지금의 사정들에 대한 관심이 머리 한쪽을 채우고 있는 요즘.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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