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일상 2016. 6. 1. 00:07


그냥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갈 참이었다. 촬영을 해야겠다는 작정을 하지 않고 온 터라 마음이 편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208호 할머니댁에도 들려볼까 싶었지만 이건 근처에 가서 충동적으로 결정해야지 싶었다. 사실 조금 귀찮기도 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를 돌고 있는데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 동 앞에서 할머니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를 밀며 올라오시는 중이었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랐고 할머니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나인 것을 알아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신기하고 막상 뵈니 참으로 반가워서 나도 웃었다. 그러잖아도 마침 어제 이 아가씨 언제 오는가 싶었단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할머니를 뒤따랐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요구르트를 내오셨다. 지난 번에는 나 혼자만 마셨는데 이번에는 같이 마셨다. 대문을 열어두니 시원한 바람이 잘 들어왔다. 좀 더 건강해지신 것 같다고 하니 딸네서 주는 것 잘 먹고 병원을 다녀 그런가보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이라 산책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더니 빨리 집에 오고 싶었단다. 그래도 무리하지 마시라고 하니, 나 같은 늙은이야 가까운 곳만 살살 다니지만 자네같이 젊은 사람들은 천지 겁없이 다니다가 사고가 훨씬 많이 난다고 조심하라 하셨다. 그러더니 할머니는 갑자기 박수를 한번 딱 치면서 그러잖아도 어제 꿈에 내가 나왔다고 했다. 바쁠 텐데 어떻게 여길 왔느냐고 말을 건넸는데 그 말이 입밖으로 정말 튀어나와서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서 깨셨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5월에 다시 오겠다고 한 게 생각이 나셨단다. 나는 얼마 전 묵주를 선물받았는데 오는 길에 보이는 성당에 들러 축성을 받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거기 사람들을 잘 아니까 도와주었을텐데 하고 아쉬워 하셨다. 성당엘 다니는 할머니는 일요일 대부분의 시간은 그곳에서 보낸다. 교회도 가고 절에도 다녀봤지만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성당이 좋다고 했다. 저도 성당의 그런 점이 좋다고 하니까 기도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나는 예, 예, 예 답했다. 매번 해주시는 이야기들, 국가와 국회의원에 대한 비판과 성당과 교육과 결혼에 대해 말하셨고, 이야기가 길어지면 나는 눈이 자꾸 감기고 겨우 하품을 숨기고 저린 발을 꼼지락 거렸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좋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야기도 열심히 들어볼라치면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인사를 드리며 8월에 또 놀러오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끌며 주방으로 가더니 유기농 차와 말린 귤 껍질을 꺼내오셨다. 선물을 담아 크게 부푼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었다. 그때 아파트 마당에서 다른 집 할머니가 놀자고 부르셨다. 누가 부른다고 말씀드리니 이제 기도시간이 되어서 나는 안 놀겠다고 하셨다. 그럼 그동안 건강하시라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방 안에 있던 꽃나무들은 현관 앞에서 싱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할머니께 질문을 드리면서 대화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 중에 작은 선물이라도 사와야겠다. 이렇게 할머니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할머니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뭉클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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