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티트 포트에 갔다가 알리라는 가이드를 만났다. 그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카페트가 깔린 방에 앉아 짜이를 두 잔 마시고 막 따온 체리도 잔뜩 먹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었다. 학교에서 여동생이 돌아왔다. 요람에서 잠자던 아기가 그녀의 딸이었다. 남편은 돈을 벌러 외국으로 갔다고 했다. 아기는 삼촌인 알리가 아빠인 줄 안단다. 집에서 나와 수로길을 걸었다. 훈자의 수로는 유명하다. 빙하에서 녹은 물을 마을까지 끌어다 쓰는 거다. 미네랄이 많아 회색빛이다. 그가 동네 아이에게 컵을 얻어 수로에서 물을 떠서는 내게 권했다. 시원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알리는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모르겠다고, 그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다른 나라에서 일하기 위해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해외에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 일을 하러 간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다. 도와줄 수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런 건 잘 모른다고, 나는 답했다. 꼭 오고 싶던 아름다운 훈자, 설산과 포플라 나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주는 곳, 그리고 이곳에 사는 한 청년은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는 먼훗날 자신의 집을 지을 터를 보여주었다. 사과와 체리나무가 많은 땅이었다. 물이 흐르는 아랫마을과 설산이 잘 보였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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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를 계속 읽는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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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정신없이 책에 몰입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의 느낌이 좋다.

-뭘 잘못 먹었는지 체했다. 위액이 나올 때까지 토하고는 다음 날에도 내내 잤다. 꿈에서 엄마와 이글네스트에 다녀왔다. 꿈에서 자꾸 목이 말랐다.

-S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에 전혀 지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새로운 여행자와 나란히 혹은 마주 앉아 몇 시간씩 대화를, 그것도 즐겁게, 목소리에 힘이 빠지지도 않고 한다. 놀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잘 노는 사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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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건강하게만 살고 싶은데 슬프고 고통스럽기도 할 거라는 걸 감안하며 살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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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으면 하늘이 무너질듯 슬플 것 같다. “어머니가 죽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했던 정릉동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눈화장을 하고 반바지를 입은 파키스탄 청년을 만났다.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물론 많지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남에게 뭐라하지 않으니 당신도 나에게 뭐라하지 말라.”고 한단다. 그는 이 나라의 옛 것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자유가 좋다고 했다. 중국어, 페르시안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페르시안어는 유투브를 보고 배웠단다.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곧 중국으로 가서 공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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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부터 자전거로 여행 중인 또래의 홍콩 청년을 만났다.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가 내리는 아침에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 영어가 유창해서 이 사람과 더 깊이 대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떠났다. 저녁 여덟 시가 되기 전에는 길기트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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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훈자왕이 사는 궁전엘 갔다. 궁전이라고 부르지만 대저택에 가까웠다. 이곳 정원의 체리맛은 여지껏 먹어본 것들 중 최고였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경호원이 나서서 체리를 따주었다. 그리고 파라솔 아래에서 같이 수다를 떨었다. 우린 왕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왕이 자신의 창 너머로 놀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깔깔거렸다.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느슨함이 좋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일하다가 올해 훈자로 배치된 이 경호원은 “이곳에서는 사람을 감옥에 보낼 일이 없다”고 했다. 평화롭다 못해 심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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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 체리나무를 갖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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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카포시 베이스 캠프 트래킹을 하는 날. 새벽 네 시에 출발해야 하는데 네 시 오분에 동행이 방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쿠리와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쿠리는 스위스 사람이다. 셋이서 같이 쓰는 방에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며 짐들을 늘어 놓았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지 않는다. 입던 바지, 그 앞에 신던 양말, 그 옆에 티셔츠, 그 앞에 먹던 빵과 잼. 하루하루 차곡차곡 짐들이 진열되고 쌓여갔다. 미소를 지은 채 자곤 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라고 했다. 스위스의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는데 물어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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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카포시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 남자 동행들의 걸음에 뒤처지지 않아야 했다. 숨이 심장까지 전달되도록 숨을 끝까지 들이쉬고 길게 내뱉기를 반복했다.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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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는 길에 한 사람씩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만났다. 난간이 없고 오른편엔 낭떠러지였다. 이 길의 건너편에서 소 세마리가 줄지어 걸어오기 시작했다. 서로 못 지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가이드는 주저하지 않고 길로 진입했다. 사람이 보이자 소들은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방향을 틀어 도망치다가 좁은 길에 두 마리가 지나가려고 우왕좌왕 하더니 한 마리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소들이 놀라서 움찔하던 순간, 근육질의 몸이 펄떡거리며 방향을 트는 모습, 한 마리가 또 한 마리를 추월해서 달리려다가 좁은 길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던 순간, 짧은 순간 그걸 보아야했던 나는 비명을 질렀고 순간 눈앞이 하얘져서 차마 아래를 보지 못했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우리는 소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런데 굴러 떨어져서 아마도 저 먼 아래에 죽은 채로 있을 줄 알았던 소는, 그 소는, 몇 미터 아래의 절벽에 붙은 바위 위에서 우리를 향해 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 걸음만 걸어나가면 바로 추락할, 딱 소 한 마리가 서 있을 만한 크기의 바위 위에서 말이다. “유아 럭키!”라며 가이드가 얄밉게 소리쳤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했다. 소는 정말 운이 좋았지만 거기서 소가 올라올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냐며, 구해줄 수 없느냐고 우린 걱정했고, 가이드는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이라고 하며 주인이 와서 구해줄 거라고 태연히 말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두 마리의 소가 우리 주위를 서성였다. 아아, 나는 괴로웠다. 사람이라고 저 무거운 소를 들어올릴 수 있을까? 밧줄로? 소가 제 몸에 밧줄을 묶을 수 있을까, 그냥 두면 결국 굶어죽는 거 아닌가? 가이드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못해 우리도 발길을 돌려 따라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움머어~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세 마리의 소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당황해하는 우리를 보고 가이드는 “히 이즈 스트롱, 히 이즈 로컬 카우” 하며 웃었다. 네 발로 기어오른 것이다. 아아 네 발의 힘, 네 발의 힘, 저 근육질 몸의 힘. 너무너무 놀라웠다. 기어오르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게 몹시 아쉬웠다. 아아, 로컬의 힘이란... 그리고 소들이 겁이 많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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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람 하이웨이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끝난다. 이제 훈자를 떠나 이슬라마바드로 간다. 이른 새벽인데 쿠리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동행할 친구가 손을 흔드는 쿠리의 사진을 찍었는데 푸른빛의 공기와 푸른 옷과 모자를 쓴 쿠리의 모습이 참 좋았다. 친구는 “언니 나 내년에 여기 꼭 다시 올 거예요.”라고 했다. 아침 일곱 시에 출발한 버스는 다음날 새벽 네 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낮에는 나도 친구도 땀을 뻘뻘 흘리며 잤다. 이슬라마바드도 라호르도 숨막히게 더울 거라고 다들 겁을 주었다. 기사 한 명이 스무 시간 내내 운전을 했다. 처음에는 노동권이 안 지켜지네 어쩌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저 그가 지치지 않기만을 응원했다. 무사히 도착하게 해달라고.. 그의 뒷모습에서 후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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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마바드로 가는 동안 대여섯 번의 검문을 받았다. 어느 검문소에서는 기사가 총을 받아왔다. 장총을 운전석 옆에 툭 하고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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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리는 길에 세계 최고봉의 설산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설산이 너무 좋다.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릴 때는 버스가 넘어질 듯이 흔들거리고 그 버스보다 내 몸이 더 흔들린다. 흔들리는 대로 몸을 편하게 둔다. 비가 내리면서 더위가 좀 가셨다. 해 질 녘 버스는 강을 오른쪽에 끼고 절벽 위를 달린다. 갑자기 선명해지던 비 냄새, 비에 젖은 흙 냄새, 기름 냄새, 사람들의 땀 냄새, 절벽 아래의 강물 냄새.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익숙하고도 낯선 이 냄새를 오래 기억하자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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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마바드에서는 지인의 집에 묵었다. 외곽에 위치한 베리아 타운이라는 곳이다. 여기는 테러의 위협이 없다고 했다. 전기가 끊기는 일도 없단다. 이 타운에 들어갈 때는 신분 확인을 받았다. 이 부유한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담이 느껴졌다. 밖은 거의 50도에 육박하는 더위로 끓는데 지인 덕분에 우리는 시원하게 이틀 밤을 잤다. 뜨거운 물로 사워도 했다. 지인은 삼계탕을 해주겠다고 했다. 차를 타고 베리아 타운을 구경했다. 타운 안에는 주거지 건물들뿐 아니라 학교, 영화관, 쇼핑 센터, 카페 등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마련돼 있다. 거주민들 대부분이 타운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과 거리는 깨끗하고 세련됐다. 아이스크림 집에서 만난 아이들은 외국인인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왕이면 막 잡은 닭을 사자고 해서 타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늦은 새벽에 도착해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풍경, 타운의 입구를 지나자 어지러운 전깃줄과 낡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포장 안 된 거리는 더운 모래가 날렸다. 그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구걸을 하는 아이들이 차를 향해 다가왔다. 아이들은 차를 쫓아 달려왔고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닭집 주인은 빗자루로 아이들을 쫓았다. 사실 낯설지 않은 풍경인데도, 이상하게 두려웠다. 이렇게 선명한 부와 가난의 대비는 낯설다.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오는 이 풍경은 거짓말 같다. 그래도 머리로는 알고 있는 거잖아. 놀라는 내가 당황스럽다. 생닭을 잡는 것을 보았다. 닭장 안의 닭들은 자신들 앞에서 하나의 닭의 목이 비틀리고 털이 뽑히고 토막이 나는 것을 쳐다보았다. 죽어가는 닭을 볼 수 없어서 그걸 보고 있는 닭장의 닭들만 바라보았다. 닭값을 계산하는데 직원이 피 묻은 손으로 거스름돈을 건넸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지인이 대신 받았다. 건네받은 봉지가 묵직했다. 마늘을 아낌없이 넣어 만든 삼계탕은 맛있었다. 사실, 너무너무 맛있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씻고 따뜻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었다. 근처에 큰 마트가 있다고 해서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갔다. 이렇게 크고 밝고 물건들과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 이상하게 점점 기운이 빠졌다.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을 것 같은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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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에 물렸다. 훈자에서 물린 것 같다. 빈대가 배를 좋아한다더니 정말 뱃살 위를 잔뜩 물었네. 진짜 너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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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로 간다.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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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는 이슬라마바드보다 더 덥다. 새벽 내내 잠의 근처를 서성이면서 이마에서 굵은 땀이 귀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내 감각이 흐르는 땀들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땀의 궤적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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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길을 걷다가 렌즈가 빠지는 꿈을 꾼다.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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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박물관을 다녀왔다 폭탄 테러와 명예 살인으로‘만’ 알려진 파키스탄.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예술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철학자도 예술가도 죄다 서양이 익숙하다. 문득 나와 같은 여행자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를 더 알고 싶으니까. 이해하고 싶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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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의 힘을 믿고, 그 힘으로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국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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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적이 있었고 어느 시절이 지나고부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내 마음은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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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다는 챠만 아이스크림 집에서 아이스크림 두 컵을 내리 퍼먹었다.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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