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 속에서 현기증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버스에 올라 땀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 몸을 섞으며 안정된 위치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 문득 시선을 돌린 곳에 보이는 글귀가 내 머리를 더욱 지끈거리게 했다.

'고된 입시,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버스에 부착된 입시학원의 광고 문구였다.
모든 수험생들을 철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광고 속의 한 입시학원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불편했다. 광고에 고무되기는커녕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대체 왜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하는 걸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데 왜 우리는 더욱 지독하고 치열해져가는 입시에 자신을 맞추려 하며 행복은 커녕 자꾸만 불행해져 가는 걸까.

더욱 지독해지는 경쟁사회.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는 서바이벌 사회.

입시를 넘어 대학사회로 들어왔지만 더 이상 대학은 자유와 사색의 장이 아니다. 대학 졸업장은 취업을 위한 자격증에 불과한 시대가 되어 버렸고, 취업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은 고등학교보다 더 심해졌다.

경쟁사회로 변해버린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대학생들이 꿈꿀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력서를 빛나게 할 높은 학점과 평균 이상의 영어점수 그리고 해외연수, 인턴생활과 같은 규정된 경험들 뿐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고된 입시 공부를 하고 고된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한다. 현재의 불행을 삼키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대체 왜 우리는 그 ‘행복’의 구성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만 할까?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개의 꿈이 있기 마련인데, 경쟁을 부추기기만 하는 사회속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사회가 정해준 행복을 얻기 위해 획일적으로 경쟁에 몰입하는 것 뿐이다. 오로지 명문대를 향해, 좋은 회사에 내 자리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서 100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밀어내고만 있다.

하지만 경쟁속에서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 승리자가 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밀어내야한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될 뿐이다. 그리고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경쟁은 사람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든다.

최근 대학가에 불고 있는 공무원 열풍을 보면 이러한 모습들이 분명해진다. 공무원으로 채용되는 인원은 정해져 있는데 전국의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이 고시에 목을 매고 있다.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하나로 말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진정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그저 안정된 삶에 대한 희망하나로, 남을 밀어내야만 하는 소모적이고 팍팍한 경쟁사회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과연 이 치열한 경쟁 전차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자꾸만 높아가는 경쟁이 대체 우리에게 무얼 안겨주는 건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희망을 부추기는가. 더 강해질 수도 있다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부추기는가. 왜 다양한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가. 아니, 왜 우리는 다양한 꿈을 꾸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 몸에 붙은 불안의 이물질을 떼어내고 내 시선의 프레임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없다. 우리는 그저 이것이 삶이라고 자위하면서 생활의 의욕만을 펌프질하는 사회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다시 사유해보자.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자꾸만 불행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관망해보자.경쟁에서 승리하는 1명이 되는 것보다, 99명의 패배자들이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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