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1 제작 일지

작업 2024. 1. 16. 13:24

*이 글은 『2017 독립영화 쇼케이스』에 수록된 글입니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Mom goes into her room>
[제작 일정]
촬영: 2014년 1월 30일 ~ 2월 2일(1회 차, 설) / 2014년 9월 7일 ~ 9일(2회 차, 추석)
편집: 2014년 10월 ~ 12월

[제작 노트]
-검정고시 공부를 하겠다는 엄마의 말에 가장 반기며 응원했던 나였지만 매일 전화로 궁금한 것들을 묻는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기가 쉽지 않았다. 매번 후회와 다짐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한 사람을 자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었다. 안방에서 등을 보이고 모로 누워 있던 모습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야간학교에 가는 모습. 어릴 적엔 그 등을 바라보고 따라 누워 있다 잠에 들곤 했다. 예순을 앞둔 엄마가 검정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하고부터는 교과서가 든 뚱뚱한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내 부모님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내 엄마도 학업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고 당연한 듯 아내, 엄마, 주부로 살았다. 엄마의 삶을 나로서는 쉽게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오래 같이 생활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의 몸과 마음이 힘들 때가 많았다는 걸 안다. 그런 엄마에게 ‘방’은 비로소 평온하게 쉬거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고, ‘가방’, 즉 공부는 그를 좀 더 자유로운 곳으로 가게 해주는 매개로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신다, 도 되고 어머니 가방에 들어가신다, 도 되는 지금의 제목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하지만 자아실현(?)하는 엄마를 담으려던 애초의 구상은 촬영에 들어가자 조금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 촬영대상을 바라본다면, 촬영대상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마찬가지로 바라본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는, 촬영대상인 엄마에게 철없는 딸이었다.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감은 금방 무너졌고,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인물만큼 모녀라는 관계가 중요해졌다. 촬영본을 보며 엄마의 공부와 나의 영화 만들기, 내가 엄마에게 교과서 공부를 돕는 일과 엄마가 내게 꽃의 이름과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행위들이 겹치고 이어졌다. 그 카메라 어떻게 작동하는 거냐고 넌지시 물어오는 엄마의 말과 방에서 공부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역시 우리 모녀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하고 편집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엄마의 캐릭터다. 배우고 싶어 하는 호기심, 이 사람이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는 당당한 자세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개인적으로도 많이 배웠다. ‘공부’라고 했을 때 그 공부는 단순히 제도권 안에서 배우는 공부만은 아니다. 꼭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알려줄 게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 내 오만함을 반성했다. 

-집에서 독립한 지 십 년이 지났다. 당시 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고향에 가는 건 일 년에 두 차례 명절이 전부였다. 촬영을 충분히 할 수가 없었지만 오히려 이런 조건을 구성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반복 안에서 계절과 명절에 따른 차이를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큰 차이는 의도하지 않은 데서 생겼다. 바로 카메라. 촬영 1회 차인 설에는 지인의 DSLR을 빌려서 촬영했는데, 2회 차 추석 때는 사정이 생겨 소형 캠코더를 가져갔다. 화질의 차이보다 중요한 건 기동성이었다. 만약 캠코더가 아니었다면, DSLR에 능숙하지 않은 내가 야외에서 자유롭게 촬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에게 쉽게 카메라를 넘기는 것도 촬영법을 잘 알려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이 변한 조건 안에서 의외의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편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현장의 사운드다. 촬영된 화면이 불안정하더라도 놓칠 수 없는 엄마의 말이나 대화가 담겼으면 그대로 살렸다. 안정된 화면에 사운드를 입히는 식으로 정교하게 다듬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카메라가 앵글을 잡는 순간이나 흔들리는 장면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그게 전반적인 정서를 형성하는 데 더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늙은 연꽃 The old lotus>
[제작 일정]
촬영: 2015년 10월 31일 ~ 11월 1일(1회 차, 1박 2일)
편집: 2015년 11월 ~ 12월
장소: 경북 예천군 동송리

[제작 노트]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를 편집하며 마지막까지 고민한 장면이 있다. 친할머니와 마주하는 장면이다. 긴장하지 않고 시작한(나쁘게도!) 가족을 담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고 혼자 식탁에 앉아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마침 거실로 나온 할머니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나는 홀린 듯 카메라 녹화 버튼을 눌렀다. 할머니에게 카메라는 낯선 물건이었다. “이게 뭐냐?”, “너 이걸로 무얼 하느냐?”고 물으시며 자신이 나오는 걸 보고 신기해하셨다. 카메라를 매개로 짧고 깊게 소통하는 느낌이었다. 평소 살갑게 지내던 관계는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뭉클했던 것 같다.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지만 정작 영화와의 관계는 느슨해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불현듯 솟아오른 이 장면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고, 덕분에 <늙은 연꽃>을 만들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를 보았는데 할머니 장면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니, ‘할머니가 나오는 장면’이라기보다 ‘할머니라는 사람’이. 언제부턴가 할머니와 할머니를 둘러싼 문제에 계속 신경 쓰여 했던 나 자신을 마주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할머니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욕망, 욕심에. 늦기 전에 할머니가 자신의 집에 사시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었다. 행여나 언제 요양원에 가시게 될지 몰랐다. 내 할머니는 흔히 치매라고 알려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되면서 남들보다 빠르게 기억을 잃고 계셨다. 어릴 적부터 보고 들은 내 할머니는 평생 고된 노동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린 사람, 좋은 걸 취할 줄 모르는 사람, 자신을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억척스럽게 산 그녀를 주변 사람들은 대단하게 생각했지만, 너무 자신을 위할 줄 모른다며 어리석다고도 했다. 할머니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특히 가방에 짐을 너무 많이 넣어 다니거나 구석에서 불편하게 자고 있을 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걸 알았다. 어린 마음에도 왠지 그런 시선이 싫었다.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사람에 대해 평가 내리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건 태초에 존재했거나 아무것에도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영역의 것이 아닌, 삶이 쌓이며 만들어낸 지금 현재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일을 하는 동작과 잠을 자는 특징, 걷는 모양과 목소리, 또 주름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등을 통해서 말이다. 작업을 하는 내내 마음 한편에는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치매, 라고 했을 때 풍기는 부정적인 분위기, 그 말이 너무 강해서 정작 ‘사람’ 자체는 사라지기 쉬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싶다.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치매 증상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기에 할머니가 사시는 경북 예천까지 자주 찾아갈 수 없었다. 이번에도 제약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보자고 생각했다. 주말 이틀간, 네 번의 끼니를 할머니와 함께 챙겨 먹으며 틈틈이 촬영했다. 여러 번 촬영을 하는 게 오히려 할머니께 폐를 끼치게 될까 봐 1회 차가 마지막 촬영이라고 생각하며 진행했다. 촬영에 있어서 원칙 하나는 세웠다. 지난 작업과 달리 카메라 뒤의 내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 인물만을 골똘히 들여다보자.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 원칙은 조금 무너진다. 당시 장만한 HD캠코더에 서라운딩(surrounding) 사운드라는 독특한 기능이 있었다. 할머니를 둘러싼 주변의 분위기를 잘 포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 기능을 사용했다. 카메라 뒤에서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까지 들어간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한 채. 하지만 촬영본을 보는데 의외로 이 느낌이 좋았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일하며 내는 소리와 내가 주방에서 내는 소리의 리듬이 묘하게 조화로웠다. 관객들이 당장은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를 알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화면 속 노인이 있는 공간에 다른 존재도 있다는 걸 은은하게 드러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하는 일을 도와드리며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되도록 꼭 쓸 것을 염두에 두고 찍었다. 유모차를 끌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좇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조금씩 휘어지며 위태롭게 나아가던 때,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짝 돌아보던 순간, 턱을 만나 덜컹거리고 여러 번 다시 밀어 턱을 넘던 작은 사건 등. 고집스럽더라도 내가 현장에서 느끼고 있는 이 호흡을 편집에서 꼭 살리자고 생각하며 찍었다. 편집은 손으로 잡초를 뜯는 모습을 가장 중요하게 두고 시간 순으로 나열했다. 인서트 컷이라도 촬영한 순서대로만 이어 붙이자는 최소 원칙을 갖고 작업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전체 톤과 이질적인 것을 알면서도 넣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자꾸 마음이 기울었다. 여전히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영화 안에서 어떻게든 우리의 관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치사해진다고 생각했다. 

-인물을 재현하는 문제로 유독 고민이 많았다. 나는 비록 그녀의 생활을 통해 존엄을 보여주고 싶었다지만 모습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누추해 보일 수 있겠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시골의 낡은 집에 살며, 좋은 것들은 자꾸 물리고 가진 대로 지내는 것이 편한 노인의 모습은 사실 남루해 보일지 모른다. 과연 내가 인물을 존중하고 있는가. 기본으로 돌아가서, 내가 그녀를 제대로 재현하고 있는가. 편집하는 와중에 확신 없는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어차피 남루하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쌓아 온 삶의 한 단면이며, 내가 이런 모습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득력을 높여 나갈지가 이 작업이 내게 남긴 질문이다. 이 작업을 하던 당시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작업들을 많이 찾아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절실히 공감한 말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실의 전부인 사람들을 사진으로 어떻게 풀어낼지 정말 막막하지요. 험한 산을 들었다 놨던 기운을 보여 주고 싶은데, 얼굴이 드러나면 남루하거나 너무 목가적으로 비춰질까 봐 그건 싫고 뭘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한금선, 『우리가 사랑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다만 나는 사진이 아닌 영상으로 인물을 표현하기로 결정했고, 최대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호흡을 찾고자 했다. 잘된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완성된 걸 본 할머니는 한마디만 하셨다. “귀신같다.” 이 말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할머니의 성함이 ‘박노연’이다. 노나라 ‘노’에 연꽃 ‘연’ 자를 써서 ‘노연’(魯蓮). 아주 오랫동안 불릴 일이 없었을 그 이름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제목으로 옮겼다. 늙은 연꽃(老蓮). 할머니를 찍으면서 흔히 부정적으로 쓰이곤 하는 ‘늙었다’는 말이 굉장한 정직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박노연. 낮고 긴 걸음 뒤에 연꽃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기억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콘크리트의 불안 Anxiety of Concrete>
[제작 일정]
촬영: 2016년 1월 ~ 2017년 1월
편집: 2016년 9월 ~ 2017년 1월
장소: 서울 성북구 정릉동

[제작 노트]
-스카이아파트는 1969년에 지어진, 아파트 단지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건 십 년 전 한 인권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하면서였다. 그 당시에도 건물 상태가 나빠서 주민들이 걷다가 콘크리트 조각을 맞곤 했다. 재난위험등급시설 중에서 가장 높은 E등급을 받은 건물이다. 십년 만에 우연히 스카이아파트 기사를 접했다. 사진 속 모양으로 단번에 그 아파트라는 걸 알아보았다. 이 위험한 건물이 아직 헐리지 않은 것에 순간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이상하게 콘크리트의 물질성에 자꾸 마음이 갔다.

-그즈음 유년시절에 살던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스카이아파트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의 아파트였다. 지금처럼 고층 아파트는 없던, 소규모 단지의 아파트들만 곳곳에 건설되던 시기였다. 재개발된다는 소식만 무성하다가 이십 년 넘게 방치된 채로 낡아만 가는 중이었다. 놀이터는 풀로 뒤덮여 놀 수가 없게 되었고, 주민들이 앉아 놀던 벤치도 뜯겨 나갔다. 어릴 때 자주 보던 대추나무만은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만큼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 존재로. 이 작은 아파트에서 온 힘을 내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자꾸 아른거렸다. 

-촬영 초기에는 지금은 희귀한 형태가 된 스카이아파트의 모양과 집안의 구조 등을 주로 찍었다. 동의를 구해 한 주민분의 집 내부와 생활하는 모습을 찍기도 했다. 공간 자체에 집중해서 촬영하긴 했지만 내내 ‘나는 이 공간에서 무엇을 보고 있나.’를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있었다. 유년시절 이와 비슷한 공간에서 뛰어놀던 내 모습이었다. 오래전에 쓴 글이 하나 있었다. 불현듯 어릴 적 젖니가 흔들릴 때의 감각이 떠올라 써내려간 문학적 형식의 글이었다. 콘크리트라고 했을 때 느껴지는 그 딴딴함. 그 딴딴한 물질이 느낄지도 모를 불안함과 유년시절에 내적, 외적으로 느낀 불안함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를 매개로 이 공간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면들을 모두 아우르고 싶었다. 

-많은 기억을 품은 한 아파트가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위험한 건물은 허물어져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젖니가 빠져야 더 튼튼한 이가 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스카이아파트라는 건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보기에는 흉물스러운 건물이지만 낡은 물질성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카이아파트를 마주하고 건물 뒤로 늘어진 북한산 능선을 한눈에 보고 있으면서 나는 지금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업 초반에 아파트 현관에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좌측에서 우측까지 고개를 둘려 주변을 바라보던 순간이 있었다. 이 시선, 이 시선을 카메라에 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건물 그 자체를 많이 보여주되 아파트를 둘러싼 주변 풍경 역시 잘 담고 싶었다. 거의 360도에 육박하는 카메라 패닝에 능숙하지 않았다. 혼자 끙끙대며 숱한 실패를 거듭하며 촬영했고 결과물 역시 미숙한 부분이 많다. 건물 내부를 찍으면서 주목한 건 콘크리트에 새겨진 아이들의 낙서다. 곳곳에 남은 아이들의 낙서에서 슬픔과 기쁨, 화남과 서글픔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내레이션과의 느슨한 연관성을 이어주고자 했다. 요즘의 고층 아파트 단지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풍경이라 더 귀하게 다가왔다. 오프닝 장면은 촬영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릉동 곳곳이 재개발되면서 고층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 풍경들의 변두리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스카이아파트를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내려가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부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국민대학교의 14층짜리인 북악관 옥상에서 촬영했다. 마지막 장면 역시 젖니가 빠지는 내레이션과 이어지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철거가 언제 진행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장면을 촬영한 후 완성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촬영의 중후반부에 스카이아파트를 헐고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기분이었다. 서울시와 주민들 간에 협의가 성사되어 주민들이 이주한 후 철거 공사에 들어갔다. 북한산 자락이 보이는 건물의 마지막 시간을 보고 싶어 촬영의 막바지엔 거의 매일 공사장을 찾았다.  

-한편으로 스카이아파트에 대한 조사를 꾸준히 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아파트의 기원과 변모 과정 등에 관해 기록해둔 자료들이 건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스카이아파트와 주민들의 모습을 기록한 ‘굿바이 스카이아파트’ 전시도 마찬가지다. 기록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스카이아파트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 당시 건설개발 붐이 일던 때에 급히 지어져 부실공사 의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스카이아파트뿐만 아니라 당시 지어진 건물들의 수명이 짧은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아파트 관련 책을 많이 찾아본 것이 직업을 지속하는 힘이 됐다. 특히 아파트 키드에 관한 이야기인 『확률가족』과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을 재밌게 읽었다.  

-이 작업은 특히 촬영 윤리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스카이아파트는 낡은 모습 때문에 영화나 사진의 소재로 많이 쓰였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주민분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카메라의 존재 자체를 싫어했다. 낡은 공간이 쉽게 가난의 풍경으로 이어지거나, 구경거리로 여겨지는 것에 불쾌해했다. 당연했다.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할 때도 있었지만 사실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재를 그저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 이 공간에 이렇게 끌린다면 표현의 소재로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은가. <늙은 연꽃>을 만들 때는 인물 그 자체를 좀 더 정확하게 재현해보려고 했다면, 이 작업에서는 다른 두 소재를 어떻게 잘 연결시킬 수 있을지가 중요했다. 다만 하나가 어느 하나에 이용되는 느낌만은 피하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감을 갖고 작업할 수 있도록 나만의 윤리가 필요함을 크게 느낀 작업이었다. 앞으로도 신중하고 집요하게 계속 가져갈 고민이다. 

▶<콘크리트의 불안> 관람 링크  OKULO: <콘크리트의 불안>(장윤미, 2017)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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