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9.19 정오의 반지하
  2. 2017.09.19 불안의 기운

  모래사장에 누워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 볕에 내 몸에 붙은 모래들이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더운 바람이 굴러와 한 줌의 모래를 귀 안에 뿌렸다. 귀 안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얼굴로 퍼지며 눈과 코를 간질였다. 문득 잠에서 깼다. 서서히 내 의식이 열리는 동안 그 소리는 멀어졌다. 새벽 늦게까지 내리던 비는 이제 완전히 그친 것 같다. 정오의 강한 볕이 내 얼굴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정오에만 잠깐 허락되고 마는 볕이다. 고개를 돌리자 창틀을 오가는 쥐가 보인다.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 걸까. 이곳에 이사 온 후 가끔 꿈에서 들리던 버석거리던 소리는 너였을까. 쥐는 창틀에 낀 물에 젖은 꽁초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생명체의 모습은 귀엽다. 솟은 등뼈의 모양을 머릿속으로 한 번 따라 그려본다. 햇빛 속에서 등 위에 돋은 털들이 잘 보인다. 건강해 보이는 저 털이 금방이라도 여름의 나무처럼 높고 무성하게 자랄 것만 같다. 시선을 느꼈는지 쥐가 나를 돌아본다. 작고 새카만 눈. 눈 안이 환하다. 저 눈에 보이는 모습은 내 지각으로 보이는 풍경과 많이 다르겠지. 저 작은 머리통에도 내 머릿속에 든 것과 같은 모양의 뇌가 있다. 그 작은 뇌에 뻗은 수많은 핏줄들을 상상하니 귓속이 간지럽다. 무엇을 보았는지 모를 쥐는 다시 고개를 돌려 꽁초에 얼굴을 파묻는다. 몸에 해로운 건 먹지 마. 좋은 건 못 먹더라도. 나는 중얼거리며 꽁초를 치우려고 몸을 일으킨다. 그때 쥐의 머리통만 한 시시오의 발바닥이 나보다 앞질러 쥐를 친다. 고양이는 고양이구나. 시시오는 쥐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발톱을 세우지 않은 발로 쥐를 툭 치더니 그저 이리저리 뒤집으며 괴롭힌다. 쥐는 소리도 없이 죽은 듯 가만히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스팔트 바닥은 빠르게 마르고 있었다. 산책 중인 직장인들의 다리가 보인다. 거의 매일 이 다리들을 본다. 대부분 낯익고 간간이 낯선 이 다리들을. 사람들이 얇은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물이 튀면서 반짝거린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빛이다. 좁은 골목을 지나려는 차에서 비켜서느라 똑같은 치마와 구두들의 무리가 내가 있는 창에 가까이 붙는다. 근처에서 보았던 치과의 직원들인 것 같다. 누군가 음료를 다 마신 플라스틱 통을 흔드는지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는 방충망을 열고 시시오의 뒤통수를 쓸기 시작한다. 그 뒤통수보다 큰 내 손길에 시시오의 눈이 감겼다 떴다 한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 시시오의 발을 툭 때린다. 그 틈을 타 쥐가 창밖으로 달아났다. 다시 방충망을 닫고 시시오의 뒷덜미를 들어 품안에 데려와 꼭 안았다. 짧고 낮은 고양이의 신음. 이내 밖에서 무언가가 푹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팽팽한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차가 친 거겠지. 그리 생각해보아도 순간 온 몸에 모래알처럼 돋는 소름을 견딜 수가 없어 빠르게 커튼으로 빛을 가려버린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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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기운

여행 2017. 9. 19. 11:21

베란다 문을 열면 남해가 펼쳐졌다. 바다는 어제 늦은 오후 숙소에 도착해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해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친구가 카메라를 집어 들더니 산책을 가자고 했다. 나는 어제 저녁으로 먹은 순두부찌개가 담긴 냄비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순두부, 애호박, 팽이버섯과 제조된 양념으로만 만들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밥을 감탄하며 먹은 건 오랜만이었다. 두 사람의 한 끼 분량이 꼭 남아있었다. 그럼 아침식사를 하고 나설까, 하고 친구에게 물었다가 좀 더 배가 고프기를 기다리자고 내가 먼저 답했다. 알람 없이 일어나 바다를 보았고, 이제 산책을 한 후 아침식사까지 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런 게 여행이지. 우린 모자를 단단히 쓰고 숙소를 나섰다. 펜션 주인네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청소를 하고 있었다. 깔끔한 펜션이었다. 편백나무로 깔았다는 바닥 덕분에 상쾌한 향이 나는 것하며 식탁, 침대, 진열장 같은 가구도 신경 써서 갖춘 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집보다 좋은 숙소에서 단 며칠이라도 묵는 게 아니겠는가. 내일도 기대되는 기분 좋은 상태로 땡볕 아래를 걸었다. 바다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었다. 좁은 흙길을 따라 내려가니 바위들이 보였다. 바위까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먼 곳에 작고 새카만 섬이 보였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섬이라고 친구가 일러줬다. 신발을 벗고 마른 발로 바위 위를 걸어 바다로 들어갔다. 파도가 높이 칠 때마다 허벅지까지 말아 올린 바지가 젖었다. 우리는 까불며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젖은 발로 바위를 걸으니 표면에 쫀득하게 붙는 발바닥의 느낌이 좋았다. 뜨거운 볕에 발은 금방 말랐다. 한껏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이던 바다의 표면도 그새 강한 볕에 조금 누그러진 듯 보였다. 모래밭이었다면 바다를 끼고 근처의 유명 해수욕장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시야에 보이는 저 너머까지 바위 길로만 돼 있어서 우리는 이내 포기하기로 했다. 그만 돌아가자고 했더니 친구는 베란다에서 본 큰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가자고 했다. 크고 푸르렀으며 누가 관리를 하는지 아주 단정한 나무였다.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던 나무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달력 사진처럼 완벽했다. 우리는 멋진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며 기대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나였는지 친구였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이제 배가 고프네.”라는 말이 나왔다. 다시 둘 중 누군가가 “나무랑 사진만 찍고 어서 순두부찌개 먹으러 가자.” 라고 했다. 그 순간 내 발이 멈췄다. 순간 머릿속에서 화악하고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질렀다. “가스렌지 불 켜놨어!” “언제! 난 못 봤는데.” 친구가 말했고, “아닌가? 아니 켰는데 껐을지도 몰라. 아니야. 켜둔 것 같애.” 말은 오락가락했지만 사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찌개를 데우려고 가스 불을 켰다가 끄지 않았다는 걸. 일단 펜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라 금방 지쳤다. 친구가 빠르게 앞서 달려갔다. 더 빨리 힘을 내서 달려야 하는데, 나는 두려운 마음에 도착을 피하고만 싶었다. 펜션에 연기가 나고 있으면 어떡하지. 혹시 불이라도 붙었으면 어떡하나. 감당할 수 있을까. 사고라는 건 이렇게 순식간에 벌어진다는 걸 실감했다. 몇 분을 달려 펜션 앞에 도착했다.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화난 얼굴의 펜션 관계자들도 없었다. 뛰어오느라 헐떡거리는 숨과 겁이 나 벌렁거리는 심장소리가 온 몸을 두드렸다. 빠르게 숙소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집 안은 희끗한 연기와 매캐한 냄새로 차 있었다. “불 켜 있었어?” 친구는 묵묵히 냄비 바닥을 닦고 있었다. “응.” 난 쭈뼛거림과 신속함이 뒤섞인 걸음으로 다가가 싱크대를 내려다 봤다. 국은 완전히 졸아 냄비바닥에 시커멓게 덩어리져 있었다. 그때 주인이 문을 세게 두드렸다. “음식 태웠죠?” 죄송하다고, 음식이 좀 탔다고 했다. 주인은 손으로 코앞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거 다 편백나무라 냄새 배이면 안 된다구요!” 얼굴을 찡그렸지만 길게 말하지는 않고 떠났다. 혹시 주인이 문을 두드렸을 때 우리가 집에 없었다면, 아찔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어떻게 불을 켜둔 걸 까맣게 잊을 수 있는지, 그런데 또 어떻게 순식간에 그 사실이 빠르게 환기가 됐는지. 난 또 이런 사실들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친구는 괜찮다며, 다행이라며 냄비 바닥이나 열심히 닦자고 했다. 국을 데울 때 물 한 컵만 넣었다면 이렇게까지 많이 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머릿속에서 가스렌지에 불이 붙을 때 나는 화악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햇반을 데워 참치 한 캔과 밥을 먹었다. 목이 말라 자꾸 물을 마셨다. 결국 밥에 물을 부어 말아 먹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안심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느낀 평온함은 싹 사라졌지만, 그 평온함보다 이 안심하는 감정이 더 달콤해서 냄비 닦는 일은 제쳐두고 침대에 누워 그만 낮잠에 들었다. 꿈에 결국 가보지 못 한 아름다운 나무가 보였다.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내 쪽으로 커다란 파도가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온 몸이 물에 젖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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