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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1.13 사이에서
  3. 2019.01.03 엘리자, 나의 엘리자/ 임경섭
  4. 2019.01.03 라이프치히 동물원/ 임경섭

빙글빙글

여행 2019. 1. 15. 12:50

 


2016년의 배낭여행에서 찍은 영상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회전하는 노동을 반복했을지 모를 저 인형에는 빛과 그림자를 반씩 섞어만든 어떤 영혼이 깃들었을 것 같다. 시안에서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보고 나오는 길에 찍었다.

나오는 길에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한숨이 나올 만큼 더웠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창구의 줄이 무척 길었고, 아이도 어른도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서는 뜨거운 볕을 피해 맥도날드 건물 아래에 앉았다. 시원하고 달콤한 것이 몸 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고 나와 같이 그러고 앉은 사람들이 열댓 명은 되는 우리 앞으로, 누군가 빠르고 요란하게 지나갔다. 전력질주해서 누군가에게 당도한 맥도날드 직원은 손님에게 잔돈을 잘못 챙겨준 모양이었다. 적은 액수인데다 바빠서 모른 척할 법도 한데 입구도 좁은 창구에서 굳이 나와 이 더운 거리 위를 달린 거다. 그는 손에 쥔 동전을 상대에게 건네주고는 손님의 표정도 보지 않고 다시 매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급해서 빨리는 가야겠는데 지친 다리가 상체를 따라가지 못해 곧 바닥에 엎드릴 듯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내 앞을 지나 좁은 창구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얼굴은 땀으로 반질거렸다. 스무 살은 됐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여자였다. 그는 숨을 짧게 내쉬더니 다시 능숙하게 아이스크림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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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일상 2019. 1. 13. 13:16


<노동여지도>를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다. 송민영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책을 더 읽는 건 그만두었다. 생각이 나 그의 추모게시판에 들어갔다.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와 인연이 없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회진보연대의 활동가였다는 것밖에. 그것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 아니 그의 존재에 대해, 그러니까 그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한동안 그의 흔적을 찾았다. 아마 또래라서, 여성이라서, 또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이라서 유독 끌렸을까.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고, 또 친해지고 싶었다. 부질 없는 생각이었고, 그냥 마음 놓고 했다. 추모와 애도 사이에 있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정도는 넘었는데 그렇다고 지인은 아니라서 끝내 더 나아가지는 못하는 상태. 그에 대한 기억을 내 안에서 퍼올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몇 달은 잠에 들기 전마다 추모게시판을 들여다봤다. 2016년이었고 여름이 시작되면 나는 긴 배낭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하고 낯선 땅에서 거의 한 달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지냈다. 홀로 움직였던 그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없는 자들과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와 인연은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송민영 님이었다. 살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여행을 갈구했는데 다만 삶이 얼마나 죽음과 가까운지 알겠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런 기분은 다시, 정말 존재했음 그리고 어떤 삶이 있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기도 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 깨달음은 사라지지는 않고 마음 어딘가에 쌓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몇 년 전부터 저런 생각에 휩싸여 지낸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 알고 싶어도 더 알 수 없는 사람들로 인해.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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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 나의 엘리자


임경섭



엘리자와 그녀의 어린 아들을

헤일리는 마지막까지 뒤쫓고 있었다

여물이 잔뜩 묻은 광포로 아들을 둘러멘 엘리자는

얼음이 풀려 물이 붇기 시작한

오하이오강에 다다르고 말았다

수면 위로는 겨울을 견뎌낸 

거대한 얼음덩이들이 유속만큼 빠르게

달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엘리자는 지쳐 울지도 않는 아들을 앞섶으로 끌어안은 채

마른 물억새밭 사이 기슭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마님,

오 나의 스토 마님!

우리를 어찌하시려고 이곳까지 끌고 오셨나요

별빛도 반사하지 않는 저 차가운 강물 속에

우리 모자를 빠뜨려 죽이시려고 여태껏

그리 먼 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오게 하셨나요?

오 스토 마님,

이제까지 우리 모자를 살려두신 거라면

그 이유라도 알 수 있게

제발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혹 이곳에 죽음이 필요하다면 저만 죽여주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 어린 아들은 제발

오 제발 살려주세요 마님도 아시죠?

제 아들이 저 악독한 백인 헤일리의 손에 들어간다는 건

죽음보다 더 황폐한 일이라는 것을 말예요

오 마님!

제 아들만은 이 어두운 강을 건너가게 해주세요


#2

엘리자, 나의 엘리자,

내가 어찌 참혹한 죽음의 강으로 너를 내몰겠느냐

나에겐 너희를 죽일 힘도, 너희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할 힘도 없단다 내가 적은 단어들과

내가 만든 문장들이 고삐가 되어

너희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란다

사랑스러운 나의 엘리자, 생각해보아라

내가 너희를 지금 저 깊은 겨울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고 해보자

내가 너희를 수십번 죽인다고 해도

내 글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너희는 죽은 게 아니지 않느냐

또한 내가 너희를 영원히 살려둔다 한들

아무도 내 책을 펼치지 않는다면

너희는 영원히 태어나지도 못할 것 아니냐

엘리자, 너무 서글퍼하지 말아라

너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그런 행복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를 끌어안고 있는 배경들이

배경들을 조합하고 있는 기호들이

너희 모자의 삶을 결정할 것이란다 다만

너희는 반복되는 굴레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테니

내가 이번만은 기적같이 너희 모자가

저 광막한 겨울 강을 건널 수 있게끔 힘써보마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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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동물원

슈레버 일기


임경섭



세살 된 아이를 데리고

내가 찾아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가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제 내린 비로

하늘빛이 무척 푸른날이었지만

군데군데 얕은 물웅덩이들이 놓여 있어

나는 말간 하늘보다는

앞서 내달리는 아이를 주로 쳐다보며

숲처럼 우거진 포장길을 걸어야 했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내 아이는

처음 보는 동물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들을 갖고 싶다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그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나는 아이에게 동물원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알기로 동물원은 움직이는 사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물원 안에선 그 어떤 사물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도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적 없었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놓은 주체가 빠졌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었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둔 테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으니

나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살 된 아이가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데려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경계와 경계들이 놓여 있는

경계의 안쪽이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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