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24.01.17 2023년 2월~4월 인도에서
  2. 2020.08.29 퉁런
  3. 2019.09.11 꿀루계곡
  4. 2019.01.15 빙글빙글
  5. 2018.07.10 오기, 오만,
  6. 2017.12.25 교차로에서
  7. 2017.09.19 불안의 기운
  8. 2017.01.23 휴대폰의 메모들
  9. 2016.12.12 파키스탄에서의 짧은 일기들-2
  10. 2016.08.24 파키스탄에서의 짧은 일기들-1


*노트에 자필로 쓴 여행 메모. 

-2월15일 밤11시 15분에 인천공항에서 이륙했다. 지금은 16일 자정이 조금 넘었다. 이번 여행은 전혀 예열하지 못하고 그저 약속 지키듯 떠난다. 소중한 존재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간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심적으로 차분해지기. 미술관과 박물관 많이 가기. 함피, 시킴, 케다르나스에 가기. 그리고 다시 맥간에 머물기. 사실 너무너무 가고 싶던 곳들이잖아. 

-새벽 5시경 싱가폴 공항에 도착했다. 허리가 아파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직까지도 떠나왔다는 실감이 안 나고 덤덤하다. 설렘이 없는 여행의 장점은? 

-어제 인천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바로 보이던 항공사에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 무슨 항공인가 보았더니 Turkish. 터키 항공. 긴 대기줄 옆에서는 사람들이 옷과 각종 물품을 박스에 싸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큰 지진이 난 터키에 더 이상 피해가 없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 것에 마음 한편 위로가 된다. 

-읽는다. 
“볼라뇨의 용기는 작가가 자기도 모르는 곳에 고개를 들이밀 줄 아는 것, 뒤샹의 무관심은 기성 미술계가 뭐라 하든 관심 없다, 나는 그냥 내가 하는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지돈)

-지금은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지난 16년도의 여행 이후 크게 달라진 건 내가 고양이와 산다는 것, 그리고 캣맘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매일매일 돌봄을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떨치고 여행을 왔다(물론 Y가 해주기에 가능하다).

-이번 여행은 일상처럼 이어진다. 떠나기 직전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아 여행 준비를 충분히 못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기대된다. 이번 여행에서는 구글지도의 덕을 많이 볼 것 같다. 모든 배낭여행자들이 사용한다는 그 흔한 구글지도도 안 보고 돌아다녔다. 그래서 손발이 고생했지.  

- 비행기는 땅에 닿지 않고 이동하는 운송수단이잖아. 하지만 불안정한 대기 때문에 덜컹거릴 때만은 중력 같은 걸 느껴. 이 생각을 하다가 잊고 있던 곤붕이가 생각났다. 한때 내가 속해 있던 공동체의 로고였던 곤붕이. 물살이이기도 하고, 새이기도 한 곤붕이.   

전설적인 큰 물고기인 鯤(곤)과 큰 새인 鵬(붕). 북극 바다에 사는 곤이 새로 변하여 붕이 되는데, 그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고 태풍이 불면 하늘 9만 리를 날아 올라 6개월만에 남극 바다로 간다 함.<장자莊子 내편 소요유內篇逍遙遊>
[네이버 지식백과] 곤붕 [鯤鵬]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승객 모두 착륙 준비를 마친 뒤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이제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면서도 끝없이 지연되는 시간이다. 가장 졸릴 때. 

-2/16~17. 뭄바이. 
어제는 17,000보, 오늘은 20,000보 넘게 걸었다. 구글지도를 사용할 수 있어서 끝내 목적지를 찾기는 한다만 찾는 과정에서 헤매는 건 여전하다. 7년 전 중국 여행에서 정말 많이 헤맸다. 그곳은 더 더웠고, 결국 목적지를 찾지 못 한 적이 많았다.

-도시 뭄바이에서는 낮동안 소들이 길가에 묶여 있다가 저녁이 되면 그 자리에 사라지고 없다. 어디로? 거기서도 묶어두나?

-사람이 대접 받는 만큼 동물도 그래야 한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걸 동물도 누려야 한다. 이게 동물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본 바람일 것이다. 

-천차만별인 인간들의 인식을 평균적으로나마 강제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게 법과 제도일 텐데, 세상 어느 국가 중에 '무엇에 대한 인식이 가장 높은 사람의 기준'에 맞춰 법을 만드는 곳이 있을까? 아니, 이건 파시즘의 문제와는 다르다고. 

-다라비 투어를 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빈민가 중 하나이고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 웬만해서는 이런 투어 잘 하지 않는데 거주민들이 만든 NGO라고 해서 도움이 될까 하여 신청해 보았다. 다라비에는 수많은 가계 기업이 있고, 거주자를 고용하는 비공식 경제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해도 일해도 가난한 곳. 

-동물들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고양이도.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이건 정말 큰 차이 같다. 

-이틀째 인도의 거리 음식만 먹었는데 속이 멀쩡하다. 더위에 하도 걸었더니 손이 좀 부었네. Y가 길냥이 급식소를 처음 챙기는 날인데 잘 완료하면 근심 하나 덜겠다. 

-뭄바이에는 나무가 많고 무척 높다. 이곳은 점점 더 더워지겠지. 길에 사는 동물들도 얼마나 더울까? 소는 왜 묶어 두는 걸까?

-엄청난 차, 매연, 소음. 숨 막힐 것 같아도 도시 사이사이에 녹지가 많다. 

- 아마도 퇴근 시간. 대도시의 거리에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다. 횡단보도도 없는, 8차선은 되는 넓은 도로 가운데에 분수대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곳이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다. 분수대의 동상 위에 한 남자가 물을 뿌리며 청소를 하고 있고 온 사방에 물빛이 퍼진다.   
 
-분수대 앞 난간에 노인이 걸터 앉아 있다. 개가 다가온다. 노인은 종이에 싼 무언가를 건네고 개는 그걸 받아 먹는다. 묵묵이 진득하게 먹는다. 크고 희고 검은 무늬를 가진 개. 밥이 사라지자 무게 잃은 종이가 날아가려는 찰나 노인이 그걸 붙잡아 가방에 넣는다. 개는 자기 앞에 놓인 우유까지 다 마시고는 뒤돌아 벤치 너머의 작은 풀밭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누워 있는 한 남자의 옆에 자리를 잡는다. 눈을 감은 남자는 손만 뻗어 개를 쓰다 듬는다. 둘은 바짝 붙어 있다. 이제 한 여자가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여자는 옆가방에서 작은 통을 꺼내 손바닥에 사료를 부어 노인에게 건넨다. 노인이 그걸 받아 바닥에 두자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먹기 시작한다. 아마 매일 반복됐을 듯한 익숙한 행동, 오래된 관계. 크고 희고 검은 무늬의 개가 있던 자리에 이번엔 갈색 개가 다가온다. 노인은 두 번째 종이 뭉치를 꺼낸다. 개가 밥을 먹는다. 이때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지나간다. 밥을 먹는 갈색 개를 발견하고 예쁘다고 환호한다. 이들 바로 뒤로 두 인도 아이들이 뒤따르며 말한다. “기브 미 머니~”, “기브 미 머니~” 약간의 정적 후 그들 뒤에 대고 노인이 소리친다. “돈 기브 머니!”.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감는다. 일순간 빛나던 회색빛 눈동자. 노인은 혼탁한 눈을 다시 감았다 천천히 뜨며 갈색 개 앞에 우유 그릇을 건넨다. 

-2/19 일. 뭄바이에서 함피로 왔다. 버스로 17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함피 TRISHUL 레스토랑에서 바나나 포리지를 먹고 있다. 방금 짜이도 시켰다. 『달걀과 닭』을 마저 읽으며 이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좀 더 보내려 한다. 그리고 숙소로 가 낮잠을 자고 볕이 좀 순해지면 바위산을 보러가야지. 여행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 

-여행지에서도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편히 머물 수 있는 숙소, 식당, 카페가 있어야 한다. 마음 둘 데 없이 부유한 상태에서는 오히려 무엇도 즐기기 어렵다.  

-동물운동을 하는 지인이 피고로 기소된 동물보호법 관련 재판 결과를 읽다가 “수단은 목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익숙한 문장에 멈춘다. 수단은 목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라... 법의 심판을 받더라도 운동에 있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그 목적에 대해 치열하게 점검하고 성찰해야 할 테고. 어쨌거나 법의 처벌을 감수하고도 운동하는 게 활동가들이고, 난 여전히 거기에 끌린다.  

-정해진 날짜에 생리를 한다. 첫 배낭여행 때는 첫달에 생리를 안했었다. 7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왔는데도 몸이 인도를 익숙하게 느끼나 봐. 

-어제 사원 안을 걷다가 오래 전 여행에서 썼던 문장이 생각났다. "하루하루 행복하고 싶어서". 

-2/21 화. 함피에서 비탈라 사원으로 가는 길이 너무 좋다. 한적해. 눈앞의 보이는 뷰의 구도가 완벽해. 보이는 곳 어디에 프레임을 만들어도 훌륭해. 그렇게 보고 싶던 큰 돌들 맘껏 본다. 아, 유구하다. 장구하다. 

-벤야민의 글을 읽다가 ‘동물원’ 얘기가 많이 나와서 기본소득당의 어스링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기억이 났다. 동물권 활동으로 동물원에 갔는데 마음 한켠은 놀러가는 것마냥 살짝 설레서 부끄러웠다. 같이 걸었던 사람들이 동물들의 처지에 대해 한탄, 한숨, 경악 등을 멈추지 않아서 ‘난 저 정도는 아닌데...’ 생각했지. 그들의 반응이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서 주변 보기에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내가 너무 바꼈네?!.

-어제 비루팍사원에서 인간들의 머리에 코를 갖다대며 은총을 내리는 ‘제스처’를 하던 코끼리를 보며 이건 일종의 학대가 아닌가 싶었고 난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이런 내가 불편하겠지. 어제 알게 된 인도인 제리에게 elephant is hard, maybe.라고 말했더니 그는 “음... 그럴 수도 있지만 그의 눈은 행복해보였다”고 말하더라. 아무래도 그런 답은 좀 이상하지만. 

-2/23 목. 함피에서 마지막 날. 
비탈라 사원으로 가는 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 새소리, 새소리, 새소리... 아무도 없다. 인간은 없다. 등 뒤로 먼 사원에서 경전을 외는 소리만이 들린다. 다양한 새소리. 살아 있는 나무, 흙, 돌, 바람, 공기. 이 장소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듣기보다 서둘러 사진과 영상만 남기려 하게 되네. 떠나려니 아쉬운 곳. 함피.

-2/26 일. 힘들게 콜카타행 기차표를 구해 가는 중이다. 30시간 넘게 걸릴 것이다. 내 자리에 두 노인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나는 몸이 구겨진 채 가고 있다. 굳이 비켜달라 하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내앞에서 인도인들끼리 말싸움을 한다. 한 인도 남자가 나를 위하려는지 노인들에게 화를 냈다. 돈 주고 자리를 산 외국인을 존중해야 한다?  뭐 그런 것 같다. 노인에게 화를 내는 남자에게 또 다른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뭐라 했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그런 걸까. 남자 노인은 화를 내고 여자 노인은 모른 척 한다.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 논쟁하는 것 같다. 아니, 싸우나? 힌디어라 못 알아듣지만 지금 어떤 분위기인지 알겠고, 말의 뉘앙스만으로도 내용마저 대충 알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난 멀뚱히 그들을 쳐다보다 문득 동물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개, 고양이처럼 인간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는 동물들의 입장 말이다. 그들이 인간 사이에 있으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정도는 파악하겠구나 싶다. 그렇다면 가축이라 불리는 동물은? 인간 사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감의 기회는 차단된 채 그냥 당하기만 하는 동물들 말이다. 서로의 감정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돼지, 닭, 소, 염소 등과 같은 가축은 인간과의 관계맺음 자체가 없잖아. 이들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뭘까? 밥 주는 사람, 죽이는 사람, 이렇게만 존재할 텐데.

-그러니까 콜카타행 기차를 타기 전 세쿤데라바드에서의 일이다. YMCA 숙소에 이틀을 묵었는데, 첫 날 새벽에 잠을 자다가 복도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와 개들이 짖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반쯤 잠든 상태로 그 소리에 집중하던 나는 ‘이제 도와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말소리가 들리겠지’ 하고 기다렸다.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하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무의식의 상태로 소리에 집중했던 여파가 잠에서 깬 아침까지 계속됐고, 아마도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환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이틀째 콜카타로 가는 기차표 구하려고 reservation complex이라는 곳에 왔다. 외국인 전용 창구는 없다고 한다. 한참 줄을 섰다 매표원을 만나면 대답은 노 티켓, 노 티켓, 노 티켓.... 분명 이런 방식이 아니라 덜 고생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도, 나는 노력해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미련함. 이 미련함을 의식하고도 내버려두는 내 게으름. 혹은 짓궂음.

-열어두기. 나를 더욱 더. 

-2/28 화. 세쿤데라바드에서 콜카타로 넘어오지 못할 줄 알았다. 어찌저찌 표를 구했고(어떻게든 해낸다!) 지금은 콜카타다. 도시만 오면 많이 걷는다. 2주째 정말 많이 걷고 있다. 하루 2만보 정도. 

-책 읽고 글을 쓰게 1주 이상 안착할 곳이 생겨야 할텐데. 그러고 보니 콜카타에는 모기가 없네. 내일은 시킴으로 떠난다. 

-거쳐온 도시에 대한 감상을 잊기 전에 메모. 
뭄바이: 시끄럽고 더럽긴 해도 품격 있다/ 함피: 절대 개발될 일 없을 것 같아/ 호스펫: 굉장히 번화한/ 하이데라바드: 강하게 각인되는 느낌은 없다/ 세쿤데라바드: 이슬람 도시라 특유의 느낌이 있을 줄 알았는데 경기도의 발전해가는 도시 같았다. 도시 뒷골목의 노는 젊은이들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네. 시끄러운 와중에 조용한 곳들이 좋았다. 교회나 골목들/ 콜카타: 많은 게 뒤섞여 있는데 뒤죽박죽은 아니고 질서가 있다.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데 공중의 그 모습이 부각되기보다 땅 위의 혼란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소리’에 집중. 이곳의 냄새는 이미 익숙하다. 

-“유년시절에 대한 글을 마치면서 벤야민은 이제 꼽추 난쟁이는 그의 일을 끝마쳤다고 적는다. 왜 벤야민은 자신의 유년시절 기록의 주체를 꼽추 난쟁이라는 상징적 인물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에서는 망각 속에서 사물이 취하는 왜곡된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망각된 과거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 혹은 낯섦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3/1 수. 친구 s를 만남. 우리는 약속 장소를 서로 다른 곳으로 생각해 한 번 어긋났다. 친구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뒤늦게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 왔는데 높고 높은 계단을 올라와 나를 부르는 그 친구를 돌아봤을 때, 아아 몹시 반가움. 우리는 시킴으로 갈 표를 사기 위해 뉴잘패구리역에 들렀다가 콜카타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오늘 s와 많이 걷고 쉴 때마다 이런저런 대화를 했는데 그중 내 마음에 남은 건 “경마장의 말이 몹시 추운 날 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얘기다. s는 경마장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 경마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에게 경마장은 일종의 학대 현장이다. 나는 과도한 육식 보다 놀이나 유흥으로 동물을 이용하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경마도 결국 도박에 말이 이용되는 건데 ‘소싸움처럼 싸움을 시키지는 않아서’, ‘원래 말은 뛰는 거니까’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덜 잔인하게 느끼는 걸까?  

-s는 수박을 좋아한다. 좌판에 썰어두고 파는 수박을 사먹다가 접시 아래로 너댓 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리가 불쌍한 표정을 짓자 주인은 ‘어쩌라고’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여러 조각을 다시 얹어 준다. 

-3/5 일. 어제 시킴으로 넘어 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고 싶던 지역이다. 수도인 갱톡에서 근교로 나가면 히말라야를 볼 수 있을 텐데 날이 흐려서 나간다고 해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난 도시에서 바로 히말라야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아침이니 밖으로 나가 봐야지. 새벽 6시 좀 넘어 일어나서 한국에서 하던 동물 단체 활동을 체크했다. 여행 왔다고 해서 동물에 관한 일을 잠시 중단할 수가 없네. 내가 관여돼 있고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 싶으면 계속 신경 쓰고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응? 왜 이렇게 생각했지? 운동에 있어서 나 개인의 힘을 너무 믿는 걸 경계했던 걸까)

-여기 와서 영화 생각은 거의 안 하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하고 싶던 일은 현재 작업 중인 영화에 삽입될 글을 쓰는 거였는데. 맥간에서 오래 머물며 쓸까 싶다. 

-동료 감독의 부고를 들었다. 충격이고 슬프다. 친구랑 통화하다 조금 울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같은 창작자로서 친밀감을 느끼던 감독.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고양이 없는 일상. 

-오늘은 쏘공호수에 다녀왔다. 중국과 맞붙은 곳이다. “여기”라고 가이드가 내리라는 순간 주변 풍경에 당황스러웠다.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 도로가였기 때문이다. 인적 없는, 오직 히말라야 설산과 눈부신 빛깔의 호수가 기다릴 거라 상상했기에, 그래서 꽤 비싼 돈을 내고 여기까지 왔기에. 중국 국경에서 퍼밋을 까다롭게 검사해서 더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다. 다즐링에서부터 칸첸중가를 못 보고 있다. 날이 흐리기 때문이다. 날이 흐려서 히말라야를 보지 못한다. 히말라야는 높기 때문이다. 산이 높으면 구름에 가려지기 쉽다. 가리기 쉬운 것들은 보기 어렵다. 

-동물 운동을 하며 새삼 강렬하게 깨달은 것. 관여하기. 관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도는 새장에 새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가봐. 한국도 예전엔 많았던 것 같아. 어릴 적 엄마도 새를 키웠다. 새장에 있던 새들이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 새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여행을 다니더라도 일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 습하지 않은 숙소. 창문이 있는 숙소. 창문은 소중해...
둘.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카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문양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문양으로 영화 형식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의 눈이 공간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어느 한 점으로 중심을 찾아서 안정을 얻고자 하므로, 그 지루함과 불안정감을 없애기 위하여 공간을 메우려는 무늬가 나타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문양 검색해서 나온 정보. 


-3/7 화. 룸텍 사원에 다녀왔다. 기도하는 스님의 자세를 한참 보았다.
시킴에서 가장 가고 싶던 곳은 룸텍사원이었다. 기대하고 상상했다. 못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녀왔다. 발을 디뎠다. 보았다. 냄새를 맡았다. 촉감을 느겼다. 
기대하던 곳---------직접 그곳으로 가 마주한다. 나는 이 과정 자체를 즐긴다.  

-지금은 카페. 페북글 읽다가 옮긴다. 

“어쨌거나 뉴질랜드의 성매매법 개정안은 성노동자의 인권보호와 착취금지, 분야 내 개인의 보건 및 복지와 안전 증진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베이어의 의견에 어디까지 동의하건 그녀가 성매매 현장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염려하고 보살피고 개선하려 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이어의 그런 목표는 저도 공유하는 것이고요. 무수히 엇갈리는 의견 속에서도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함께 발을 디딘 공통의 토대를 확인하며 작별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긍심 속에서 평안하기를.”-신필규

특히 두 문장.
.무수히 엇갈리는 의견 속에서도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함께 발을 디딘 공통의 토대를 확인하며 작별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자긍심 속에서 평안하기를.


-이번 여행에서 나는 계속 비인간동물을 생각한다. 비인간동물을 본격적으로 염려하고 부터 인간사가 하찮게 느껴졌다.  인간사의 비극이 다소 시시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이 시시하다는 건 인간의 죽음보다 동물의 죽음이 더 슬펐다는 의미다. 그렇게 2년 넘게 보냈다. 지금은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무엇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 상태. 즉 모든 생각이 다 동물로 환원되는 상태에서 많이 벗어났다. 균형을 잡아간다는 건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인간동물에 많은 걸 의지하는 사회인데도 그들의 목숨은 인간에 비해 한없이 하찮다. 이런 시간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단해질 마음과 실천. 

-3/8 수. 시킴에서 실리구리로 왔다. 
여전한 건 세상 돌아가는 걸 알고 싶다는 마음.

-나는 인도에 왜 오지?

-3/10 금. 어제 바라나시로 왔다. 
기억에 대해, 기억이 드러나는 작용에 대해 생각 중. 몇 년 전부터 고양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최근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생 시절, 아이들 한 무리가 술렁이며 노란 고양이가 죽어 있다고, 저기 넘어가는 길에 고양이가 죽어있다고, 아주 큰일이 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 “고양이가 죽으면 꼬리 아홉달린 여우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고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난 이 이야기를 분명 학교에서나 하교 길에 ‘들었을 텐데’(직접 본 게 아니므로) 최근 이 기억이 떠오른 순간에 보인 이미지는 높은 곳에서 그 고양이가 죽어 있는 장소를 내려다 보는 풀샷이었다. 단층의 건물 위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고양이가 죽어 있는 곳을 나는 내려다 보고 있다. 고양이는 작은 무덤처럼 누워 있고, 다시 그 무엇으로도 태어날 것 같지 않다. 지금의 내가 그 자리에 서서 내려다본다. 이 장면은 30년 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상상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까, 그동안 무의식이 조금씩 완성해둔 걸까.    

-내가 동물에 관심이 생기고 과거 관련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평소 각인돼 있던 사건도 아니다. 신기하다. 기억의 작용이란. 얼마 전에는 어릴 적 차를 타고 가다가 운전석에 있던 이모가 창문을 열며 침을 탁 뱉고는 방금 죽은 고양이를 봤다며 재수 붙은 걸 떼내야 한다고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미신이 있었다. 아마 그때 난 동물이 가엾다는 생각은 안 했겠지?

-벤야민의 매력. 사람들이 왜 벤야민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겠다. 10년 만에 다시 읽는 벤야민의 글이 완전 새롭게 다가온다. 

-앞으로 10년간은 동물 공부, 다큐와 예술에 대한 더 치열한 공부. 이 두 가지를 계속 열심히 하기.

-“‘읽기’는 상당히 복잡한 심리적 인지 과정입니다”
내 다음 작업이 읽기의 형식이어야 하는 이유. 

-3/12 일. 계속 바라나시. 
(예전에 내가 일기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여행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느낌. 

“강이나 숲, 길도 내게는 살아 있는 고유한 존재들이었습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운명의 섭리, 혹은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인해 어쩌다 실감하는 상호 간의 연결성과 긴밀한 영향 관계. 나는 평생 이러한 것들에 매료되었습니다.”

“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자연에 뿌리를 두고, 맥락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쉬운 새로운 이야기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지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시 읽고 있던 『다정한 서술자』에서 옮겨둔 듯하다)


-3/14 화. 오늘 바라나시를 떠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기 좋았던 얼굴은 다즐링의 바이크 렌탑샵 여자 주인. 푸지에를 닮은 얼굴. 청자켓. 순한 얼굴. 웃을 때의 모습.

-바라나시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고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각자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공유하고 나는 다시 혼자 떠나기. 

-바라나시에서 현지의 다친 개들을 챙기는 한국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개박사님이라 불렸다. 여행지에서는 쉽지 않을 개입일 텐데 존경스러움. 

-바라나시에 작은 매점들이 많이 사라졌다. 정부에서 길을 넓히려고 상인들을 쫓아냈단다. 보상도 없는데, 상인들은 항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데모하면 경찰이 어떤 다른 이유를 걸어서라도 수감시킨다고. 민주주의 국가 맞나?

-special라씨를 먹고 일찍 잠들었다. 자다가 깼을 때 나는 왼쪽으로 모로 누워 있었는데 눈앞의 테이블 위 생수통에 비치는 무언가들이 마치 가까이 있는 듯 아주 크게 보이고, 아래층 리셉션의 소리도 크게 들리고, 등뒤에서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감각의 교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리는 경험. 이 재미. 

-졸리다. 오전부터... 문득... 식용견과 반려견은 다르다는 말, 그 논리가 화가 나네. 구분 짓고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들에 저항하리. 

-3/15 수. 아그라로 왔다. 다시 혼자. 
인도인들의 얼굴을 관찰한다. 부모와 닮은 아이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자녀 얼굴 한 번, 부모 얼굴 한 번 본다. 

-아까 타지마할에서 잠깐 졸다가 맥간을 생각했다. 맥간을 계속 생각했던 건... 사실 따져보면 특별한 기억이나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닌데 맥간에 갔던 여행 이후 돌아오자마자 꿈을 꿨기 때문이다. 꿈에 나는 맥간에 다시 갔다. ‘아, 다시 여기 와서 너무 좋다’ 하며 눈앞의 땅을 밟은 순간 꿈에서 깼다. 꿈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이곳을 그리워 한다는 걸.   

-바라나시에서의 기억. 동물권에 대한 내 실천을 얘기하며 “난 비건이지만 내 반려동물의 음식으로 육식 사료를 먹인다. 이런 현실이다. 이런 모순을 안고 간다”라고 말하니 개박사님은 그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 그걸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증법적 사고처럼 말이다. 그런데, 해소한다는 건 뭐지? 내 사고에 한정된 노력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현실에서 더 나은 실천을 위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건가? 

-가수 도마 생각. 여느 인디밴드처럼 좋아하던 도마의 죽음이 아주 슬픈 것도 아니었는데 잔잔한 채로 오래 지속되고 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잊지 않는’ 상태인가? 도마 인스타 계정의 바라나시 사진과 '나를 위로해주던 풍경' 두 가지. 

-3/17 금. 
어제 아침에 눈을 떴는데 기분 나쁜 체기가 있었고 하루 내내 몸이 힘들었다. 겨우 일어나 델리 가는 버스표를 사고 아그라포트도 보고 왔다. 아그라포트, 멋있긴 하더라. 아그라에서는 숙소 루프탑에서 아침마다 짜이와 포리지 먹는 낙이 있었다. 옥상에서 맞는 아침의 바람도 참 좋았고. 

-소리. 동물 소리. 

-3/19 일. 10년만의 맥간. 설산으로 맞아주어 고마워. 

-새벽에 다람샬라에 도착해서 합승지프를 타고 맥간으로 왔다. 짐이 많은 스님들과 합승했는데 오는 길 내내 옆자리 스님의 향내가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향. 향의 내. 향 자체. 은은한 향. 몸에 배인 향의 내. 

-최근 들어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글을 꼼꼼히 읽자. 덜 읽어서 주요 정보를 놓치거나 대충 읽어서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티벳불교를 좋아하는데 티벳불교에서는 육식을 금지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 모든 게 완벽(?)하기를 바랄 수 없다.(완벽하다는 표현도 내 중심적인 사고일 거라는 경계를 한다) 이런 길을 걸어왔으면 이런 쪽으로 가야 하는데... 하는 것도 나만의 생각일까? 인권 운동 하는 사람들이 왜 동물권에는 관심을 안 갖지? 같은 것. 일단 이것 하나는 주의하자. 덩어리로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그 안의 무수한 차이가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기. 

-인도에서 거리 개들에 대한 먹이 급여 기사들 재밌다. 한국 가면 계속 찾아봐야겠다. 

-동물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착취 당하면 안된다(는 지향성)
지금은 이 거리가 너무 먼 것을 지적하고 좁혀가야 하지 않을까.  

-내 유서에 추가할 것: 장례식 음식에 육식은 뺄 것. 꼭 필요하지 않으니까. 

-3/20 월. 사원 주위의 코라를 반대로 걷다가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맞닥뜨렸다. 그 중 사원 입구에서 연주를 하며 구걸하던 가족도 있었다. 그들이 나와 가까워지는 찰나 남자의 품에 있던 세네 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장우산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는데, 이내 나는 떨어진 게 아니라 남자의 품에서 내팽개쳐졌다는 걸 알아 챘다. 아이가 주저 앉은 채로 울자 남자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 손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아이는 더 울었다. 아마 부모겠지, 아이를 때린 남자와 여자가 나를 스쳐지나갔고 여자 아이는 바닥의 장우산을 집어 들고 놓칠새라 뒤따라갔다. 스치는 순간 보았던, 무심한 혹은 무심한 척하는 갓난 아기를 든 여자의 표정. 해질녘이었고, 난 이 장면 때문에 하루의 모든 기분을 망쳤다. 이때의 내 감정은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는 분노가 아니었다. 내 안식처인 여행지에서도 가정 폭력을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짜증남. 이내 여자 아이와 여자 어른에 대한 걱정에, 빈곤의 문제와도 떼어낼 수 없는 그들의 상황에 슬픔이 밀려 왔다.  

-3/24 금. 아직 맥간.

-3/25 토. 밤새 계속 비.
어제 꿈에 여행 직전까지 장애인 활동 보조를 했던 사람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근육장애인인 H가 엎드려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타나 “아니 애를 아직도 안뒤집었냐”며 H의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과 몸이 오래 눌려 있어서 시커매져 있었다. 꿈에서도 내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코라를 돌고 있는데 어제 길가의 야채 가게 앞에서 만난 에스토니아인이 아는 척을 했다. 결론은 즐거웠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도 이 정도로 통하다니...하는 경험을 했다. 나를 잘 알아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나저나 이 친구는 어제 야채 가게 앞에서 왜 나에게 아는 척을 했지? 아는 사이도 아닌데.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 편하다. 물론 여기가 이국땅이라 그렇겠지만. 

-맥간에서 작은 개 하나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흔히 요크셔테리어로 불리는 개. 개는 원래 털이 빠져야 하는데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교배된 이 개는 인간이 잘라주지 않으면 털이 계속 자랐다. 하지만 이 개는 입질을 했다. 털은 계속 자라고 엉키고, 그 무거운 털을 달고 걸어 다닌다. 눈 상태도 나쁘다. 인간의 손길이 전적으로 필요한 동물을 만들어냈다는 게 너무 절망스럽다.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가능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실로 그렇게 하는 것인가”

-동물 운동 단체 대표의 강의를 듣다가, “사람한테 2천만 원 쓸 거 동물한테는 1백만 원이면 된다. 동물한테 돈을 좀 쓰자” 명쾌하다. 공리주의의 쓸모. 

-트리운드에 어느 한국인과 같이 올랐다. 30대 후반 남자이고 제주도에서 감정평가사를 한다고 했다. 본인 소유의 2층 집과 월세 받는 낡은 아파트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건축을 전공해서 건축 얘기를 하면 즐거워 보였다. 그래, 부동산과 건축은 다른데 말이지. 그는 15년 전 네팔 히말라야 14박 15일 트레킹을 하다 동행한 네 명 중 한 명이 10일째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서 이틀을 돌아가며 업고 다녔다고 한다. 같이 간 포터 중 나이 있는 포터는 죽은 시신을 절대 안 만진다며 가차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고.

-맥간은 춥다. 그래도 지낼만 하다.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침낭 속에 넣고 자면 밤새 버틸만 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데서 느끼는 행복감. 전기가 끊기면 물을 데울 수 없다. 그나마 낮동안 데워진 물이 페트병을 하나를 채울 정도는 되길 바라며 귀가한다.   

-에스토니아인과의 대화.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는 처음에 붓다를 sympathetic했다고 말했다. 동정, 연민햇다고? 그게 아니라 좋아하다, 호감을 느꼈다, 겠지? 그런데 붓다를 연민했다는 거 재밌다. 붓다도 연민 받을 수 있어. 

-3/27 월. 맥간 9일째. 테라스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좋아. 오늘이 가장 맑다. 맑다는 건 구름이 없다는 의미. 구름이 없는 걸 보고 사람들은 하늘이 맑다고 말한다. 

-심오하다. 물이 깊다. 겉의 물결이 일더라도 그 안에 있는 진짜 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내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 옮긴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   

-3/29 수.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블레싱을 받는다고 표현하더라. 신청한 지 하루만에. 복이다. 복이로소이다. 달라이 라마 존자님과 마주 앉았는데 함박 웃음이 터졌다. 그를 만날 때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나 보다. 정성스러운 외국인들은 티벳 전통 복장을 하고 왔다. 난 그저 편지 쓸 생각이나... 그것도 반입 금지라 전하지 못 했다. 까닥? 그거라도 하나 사왔어야 했다. 편지에는 무슨 티베트 문화 존중하겠다, 프리 티벳 이래놓고... 사실 달라이 라마 만나는 것보다 더 좋았던 건 두 한국인 여성을 만난 것이다. 그 중 한 분과의 깊은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날 것. 

-달라이 라마에게 블레싱을 받기 전날, 뭐라도 준비해야 하나 싶어서 엽서에 편지를 썼다. 당일인 오늘은 아침 7시까지 사찰로 갔다. 다들 까닥은 필수로 챙겨 왔고, 전날 만난 한국인은 티벳 전통 복장까지 정성스럽게 차려 입고 왔더라. 그때부터 나의 바보 같은 성격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미리 잘 준비하지는 않으면서 무리 안에서 내가 튈까봐, 틀렸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이 마음. 달라이 라마의 거처가 있는 마당에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거의 2시간을 기다렸다. 먼저 티벳인들이 축복을 받고 그다음에 외국인인 우리에게 기회가 올 때까지 나는 그 영광스러운 상황을 즐기지 못하고 여기 올 때 최소한이라도 챙겼어야 하는 까닥을 계속 생각했다. 나처럼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은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없었다... 집단 안에서 튀는 것. 규범을 지키지 못했을 때(그걸 원하면서도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 마음 어딘가 조여오고 초조해지는 걸 느끼고, 또 한편 그러고 있는 나를 반성했다. 그럼 애초에 잘 챙기든가... 아니면 당당하든가! 이런 내 자신이 참 재밌군. 정작 달라이 라마 앞에 섰을 땐 불안했던 마음 까맣게 잊고 빤히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달라이 라마가 손으로 머리를 만져주는 걸 블레싱이라고 해서 다들 고개부터 숙이던데... 철없다. 철없도다. 

-블레싱을 함께 기다렸던 p라는 한국인이 권유해서 오늘 새벽 사원에서 108배 하고 집단 독경을 보기로 했다. 막상 이른 새벽에 일어나 가는 게 쉽진 않았지만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사원으로 가서 함께 108배를 하고 사원 안에 앉아 함께 스님들 독경을 듣고 카푸치노를 마시며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념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걸 보니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하는 분이다. 힌두-불교-요가가 다 이어져 있다는 걸 배웠다. 그 배움의 계기가 된 아픈 개인사까지 들었다. 공감했고, 위로 받았다. 

-한국에 가면 티벳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봐야겠다. 아직 명상은 그리 끌리지 않는다. 순간 호기심은 들지만. 

-오늘 비가 많이 오네... 어제 보았던 어린 소는 내내 배고프겠다. 소들만 챙겨주는 사람이 있을까? 없는 것 같아 슬프다. 하지만 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야. 매이지 말자. 너무 가엾어 말자. 가방에 바나나랑 남은 개 간식을 다 주고 가야지. 이번 여행은 마음에 걸리는 동물들이 많네ㅜㅜ 맥간에서 한쪽 눈이 실명되고 털이 길고 엉킨 개랑 새벽에 개밥도 못 얻어먹고 내가 바나나를 주자 6개를 몽땅 받아 먹던 배에 털이 길게 내려온 어린 소. 

-영희, 노랭이, 서준이, 그리고... 잊지 말자. 

-4/6 목. 여행이 끝났다. 사진기에서 다시 소리가 난다. 찰칵찰칵. 인도에서는 폰카를 찍을 때마다 소리가 나지 않아서 좋았다. 그 소리가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겼는지 알지만서도, 어쨌든 막 찍는대서 느끼는 자유로움이 너무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물갈이도 하지 않고 아그라에서 체기로 하루 기력 없고 토한 것 빼고는 그냥 일상처럼 잘 다녀왔다. 


*이제부터는 구글 문서에 적힌 여행 메모.

-2.17
여행지에서의 첫 잠. 새벽 6시 45분인데 누운 채 깨어있다. 들어본 적 없는 새소리가 들린다.

-2.18
동물도 인간이 받는 대우만큼, 자원을 배분받고 다양한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다. 국가로 치면 인도는 어떤가?

-뭄바이에서 함피로 이동 중. 일상의 단절이 아닌 연속인 것 같은 이번 여행.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메마른 건지 내가 변한 건지, 현실에서 여러 바쁜 일들로 충분히 여행을 기다릴 만큼의 마음가짐이 안 된 건지, 서서히 달아오르는 건지. 설렘도, 두려움도 전 같지 않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떤가.


-2.19
처음 며칠은 모기 때문에 새벽 늦게서야 겨우 잠들었고, 어제부터 17시간을 버스에서 쭈구려 불편하게 잤으니 난 지금 엄청 피곤해야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 밥도 길거리 음식으로만 먹어서 부실할 텐데 배고픈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어떤 거지? 하지만 이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졸음이 쏟아진다.

-2.20
지금 머무는 함피의 kalyan 게스트 하우스의 베드룸은 무척 깨끗하지만 창문으로 멋진 뷰를 볼 수 없다. 이게 아쉬워. 뷰를 중시한다. 이 이유를 새삼 알겠어. 왜 사람들에게 창문 밖 뷰가 중요한가를. 밖을 볼 수 있다는 게 왜 중요한가를.

-2.23
해가 빨리 떨어진다

-2.24
50대 한국 여성인 Y님과의 길고 깊은 대화. "고정된 내가 있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지켜본다. 나라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음악과 같다. 계속 변하는 것이다" 등등. 
그와 대화를 하며 새삼 깨달은 건 나는 자족하며 사는 인간은 못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좀 더 나아지는 데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로 소통이 원활하지 못 하다. 뭐라고 하는지 대부분은 모르겠다. 흘려들어도 될 게 있지만 잘 알아들어야 일을 진척시킬 수 있는 일도 있다. 어떻게든 들리는 것만 이해하고 더듬더듬 일을 헤쳐 나간다.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 느낌? 나쁘진 않다.

-함피에서 만난 제리가 은근 생각난다. 하나의 장면 때문인데, 돌산 한가운데 함께 오래 앉아 있을 때 그는 갑자기 자기 발이 지저분해 보이는지 가방에서 흰 양말을 꺼내 신었다. 그의 움직이는 발, 손 매무새, 표정. 그는 나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의식하면서도 아주 솔직했다. 온 진심을 다해 나를 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집착으로 변하기 전에 도망쳤다.   

-2.25
사라 정 박물관에서. 문양을 만들듯 형식을 창조해보기. 

-이슬람교가 강한 지역은 여성들끼리 잘 돕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쿤데라바드에서. 시끄러운 도로변, 아파 보이는 개들, 지독한 매연만큼은 힘들었지만 시끄러운 곳을 뒤로 하고 조용한 곳을 찾았을 때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기쁨. 교회와 세바스찬 거리. 참을 수 없게 시끄럽고, 믿고 싶을 만큼 고요한, 세쿤데라바드.

-반드시 샛길로 들어가라.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한 곳으로 밀려들어갈 때의 기쁨. 아난드आनंद

-2.26
기차역에서 쥐 구경하기. 

-3.2
뉴잘패구리역으로 가는 기차 안. 이번 여행에서 꼭 가고 싶던 시킴에 가까워진다. 보고 싶던 곳에 가까이 거의 닿았을 때. 사진으로만 가고 싶어하던 마음이 실행으로 이어져 기어코 대면했을 때.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실망해도 괜찮아.

-3.4
실리구리에서. 바구니에 감금된 닭들. 구겨져 있는 닭들. 삐약삐약 소리가 나는 바구니로 손 하나가 들어가고 닭의 목덜미가 쥐어져 옮겨 진다. 칼이 목을 자르고 피가 푹 나오고, 뒤이어 침을 뱉는 소리. 지형의 모양 때문에 실리구리는 닭모가지라 불린다고. 나에겐 불편한 설명이다. 

-3.8
시킴을 떠나 다시 뉴잘패구리역. 이제 바라나시로 간다. 식당에서 릭샤를 타고 역으로 이동하는데 사거리에서 잠시 멈췄다. 내 오른쪽 시선에 한 남자가 무언가를 맞히는 시늉을 하는 게 보였다. 던질듯 말듯 하더니 땅 쪽을 향해 손을 빠르게 뻗었다. 무언가 던진 자리에 개가 자고 있었나 보다. 1, 2초 정도 흘렀나, 개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서더니 그 남자를 향해 짖었다. 화가 나서, 아프다고, 내가 들어본 적 없는 개의 비명소리로. 남자는 빠르게 뒤돌아 자신의 릭샤로 도망 갔다. 그를 향해 마치 서럽고 화나는 듯 고통의 소리를 지르는 개. 순간 화가 났지만 그 개가 도망가지 않고 인간을 향해 잡아먹을 듯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조금 감격스러웠다. 함부로 대하는 인간을 가만두지마. 항의해! 그 개의 모습과 소리가 안 잊히네.

-3.16
마투라 고고학 박물관. 작품 이름이 ‘적당한 있는 그대로의 설명’인 게 새삼 흥미롭네.
포도송이를 든 여자. 머리 없는 비슈누 상. 네 개의 얼굴 등. 매력적이야. 

-3.18
이번 여행에서는 덩어리였던 인도인들이 개별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많았다. (이제야?) 그리고 보다 안전하게 느낀다. 한 인도인이 해코지 해도 다른 인도인이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버스. 델리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승객들이 일어나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길래 왜인가 했는데, 와이퍼가 없다. 흐릿한 시야로 계속 달리는 버스... 두 직원은 안쪽 창문만 닦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꾸역꾸역 버스는 나아간다. 걱정스러운 건지 비가 신기한 건지 계속 일어서 있는 사람도 있다. 10여분 지나자 갑자기 하늘이 쨍쨍해졌다. 갑자기 신나는 음악이 들리고 뭐가 좋은지 따라 부르는 사람들, 심지어 옆 사람 무릎까지 두들기며 낄낄대고 노래 부른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계속 버스를 몰고 나아가는 힘, 뭘까? 그저 막무가내인 건지, 경험에 의한 건지.

-3.19
오늘 남걀사원에서 문득 생각한 것. 나와 영화의 관계는 평등한가? 혹시 종교처럼 신과 신자의 관계인가? 

-동물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부당하다고 느낀다구요.

-도덕성 높은 인간이라 비건 실천을 한다: 이 말이 마음에 안든다. 무언가 더 고양된 상태라서 그런 의식을 갖는다고 ‘치부’되기 때문에. 난 동물에 대한 인간의 고려가 당연한 상태가 되길 바라는 거지, 몹시 도덕적인 인간들의 취향이나 활동 같은 걸로 다루려는 게 싫다.

-인도에서는 운전자에게 길거리 동물을 치지 못하게 규제하는데 한국은? 왜 운전자에게 조심하라고는 하지 않나?

-이미지의 위계 없음, 평등함을 얘기하는 게 왜 공부가 덜 된 생각인지 공부하기.

-3.22
맥간에서 다람콧에 올라왔다가 비가 내리고 우박이 내려서 못 내려가고 있다. 티샵에서 짜이 마시고 매기라면도 먹고 오줌이 마려워서 투시타 명상센터로 와 시원하게 해결하고 지금은 천막 아래에 앉아 있다. 아, 춥다. 여긴 아무도 없나? 이 넓은 곳이 이토록 고요하다는 게 신기해.

-4.1
나의 카르마. 운명이자 업보. 

-한국인 wh의 이야기들. 스스로도 망상이라고 표현한 이야기들이 난 너무 흥미로웠고, 이 이야기들을 이따 밤에 친구에게 영상 통화로 들려줘야지 싶어 온 집중으로 다해 외우며 들었다.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높여주는 집중력. 영화 일도 그렇지. 

-4.3
Chamba에서 Jassur로 이동했다. 나란히 붙은 설산의 봉우리들이 멋졌다. 

-Jassur에서 강가의 천막촌을 향해 걸었다가 몹시 아파 하는 개를 봤다. 주변에 몇몇 청년과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천막촌의 주민들이 뭐라고 소리치고, 이내 한 남자가 포대를 갖고 왔다. 동행이 쉰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개의 상태를 본다고 귀를 한번 뒤집었는데 개는 꿱 소리를 지르더니 죽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쓰다듬어 주었고. 아프다고 아프다고 소리를 내던 개... 그런 건 처음 봤다. 쓰레기로 가득한 강가에서 뭘 잘못 주워 먹은 걸까. 그때 그 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포대 위로 올라갔다. 아... 대체 이게 뭔지 어떻게 알고 그 위로 올라가는 걸까… 두 남자가 들것처럼 포대를 양쪽에서 들고 개를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의 구석에다 두었다. 여기서 아끼며 돌보는 개 같았다. 은빛 목걸이도 하고 있었으니까. 어디 아픈 거냐고, 아니면 임신을 한 거냐고 했는데 힌디어로 해서 못 알아들었다. 그때 영어로 “우리는 이 개를 치료할 돈이 없다”는 한 청년의 말. 우리는 걸어가며 멀찍이서 포대 위의 개가 있는 곳을 보았다. 아픈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여웠다. 부디 그저 체한 거라서 크게 토하고 다시 회복하기를, 그게 아니면 크게 고통 겪지 않고 떠났기를. 아프다고 소리 지르던 모습, 목소리. 비틀거리며 일어나 스스로 포대 위로 올라가던 모습…

-우리는 그 장소에서 멀어졌고 강가 바위에 앉아 인도 담배를 나눠 피우며 천막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와 매를 한참 보았다. 내가 보는 것들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워 하던 검은 개의 몸. 은빛 목걸이를 달고 친구들과 맘껏 달렸을 검은 개의 행복했던 시간도 그 강가에 영원히 남아있겠지.



(끝)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퉁런

여행 2020. 8. 29. 01:01

2016년의 여행 사진 들춰보는 새벽.
중국 샤허에서 퉁런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한 노인이 앉았다. 노인은 한 번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본 적이 없는지 안전벨트 매는 법을 몰랐다.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손짓으로 부탁했다. 나보다 많이 작던 몸집, 한 쪽 다리를 대신하던 지팡이. 퉁런에 도착해서는 동행과 함께 가는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우산도 없이 걷던 뒷모습들. 그때 나는 우산이 있었던가? 티벳불교의 가장 큰 사원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퉁런이었는데 머무는 동안 한 명의 여행자도 볼 수 없었다. 자주 비가 왔고, 완전히 혼자인 느낌이 좋아서 하염없이 걸었다. 혼자 잠드는 건 무서웠다.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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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루계곡

여행 2019. 9. 11. 00:43

좌석 1, 2번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했다. 인도의 마날리에서 수도 델리까지는 12시간이 훨씬 넘게 걸릴 터였다. 우리는 심야버스를 탔다. 가장 좋은 좌석이라고 들었는데, 나와 친구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가는 내내 불편했다. 운전기사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였는데, 시크교도는 인도에서 잘사는 편에 속한다. 보통의 인도인들에 비하면 체격이 좋다. 그의 넓은 등판을 계속 볼 수 있는 건 좋았다.
버스가 시내에서 벗어나면서 해가 졌다. 밝은 건 달빛과 차들의 헤드라이트뿐이었다. 고속도로 비슷한 곳으로 진입했는데 난간이 없었다. 난간이 없는 도로에서 떨어지면 낭떠러지였다. 아래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꿀루계곡이라 불린다고 했다. 그 풍경을 보자마자 바로 압도당했다.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었다. 새롭거나 색다르게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많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강은 바닥이 없고 물안개는 거미줄보다 촘촘했다. 그 사이 무엇이 걸려들었을지 모른다. 공포를 느꼈다. 당장 피하고 싶은 공포감은 아니었다.
1차선보다 조금 더 넓은 도로는 맞은편에서 차라도 다가오면 낭떠러지 반대편에 바짝 붙은 채 기다려야 했다. 꺾어지는 길이 나타나면 마주 달려오는 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익숙한 듯했다. 숱하게 핸들이 여러 바퀴 돌아가고 또 한 번 꺾어지는 길이 나타났을 때 환한 빛에 드러난 건 검은 허공이 아닌 소들의 얼굴이었다. 앞다리를 꺾은 채 웅크리고들 앉아 우리를 보고 있었다. 빛에 눈부시지 않을까, 아니 소들은 빛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버스의 헤드라이트에 소의 얼굴이 오래 밝았다가 다시 검어지던 순간, 나는 문득 내 죽음을 생각했다. 나는 델리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과 예감 비슷한 것이 들자 나는 곧 죽게 될 것이었다. 이제 나는 스스로를 괜찮다고 성심껏 달래기 시작했다. 사람은 죽는다. 짧지만 죽음을 예감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살던 곳에서 멀리 와 죽는 게 억울하지도 두렵지도 않다, 괜찮다. 수많은 일본 여행자들이 마약을 찾아 이 깊은 계곡까지 들어왔다가 죽거나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들은 모험심이 강한 걸까, 삶을 함부로 대한 걸까. 낭떠러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소들은 차가 피할 거라고 믿는 걸까 더는 물러설 데가 없는 걸까. 어쨌거나 괜찮다. 이 도로 위에서 내가 죽더라도. 슬펐다.
나는 꿀루계곡의 물안개와 달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겨 있어서 얼핏 운전자의 등판이 보였을 때에야 내 죽음을 상상하길 그만둘 수 있었다. 버스는 넓고 낡은 휴게소에 내렸다. 나와 동행은 오줌을 시원하게 싸고 마른 볶음밥을 나눠 먹었다. 불편해서 밤새 못 잘 것 같던 1, 2번 좌석에도 적응해 이후 우리는 내내 잤다. 다시 깼을 때는 마른 공기와 매연 냄새가 진동하는 도시 델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기 직전이었다.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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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여행 2019. 1. 15. 12:50

 


2016년의 배낭여행에서 찍은 영상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회전하는 노동을 반복했을지 모를 저 인형에는 빛과 그림자를 반씩 섞어만든 어떤 영혼이 깃들었을 것 같다. 시안에서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보고 나오는 길에 찍었다.

나오는 길에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한숨이 나올 만큼 더웠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창구의 줄이 무척 길었고, 아이도 어른도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서는 뜨거운 볕을 피해 맥도날드 건물 아래에 앉았다. 시원하고 달콤한 것이 몸 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고 나와 같이 그러고 앉은 사람들이 열댓 명은 되는 우리 앞으로, 누군가 빠르고 요란하게 지나갔다. 전력질주해서 누군가에게 당도한 맥도날드 직원은 손님에게 잔돈을 잘못 챙겨준 모양이었다. 적은 액수인데다 바빠서 모른 척할 법도 한데 입구도 좁은 창구에서 굳이 나와 이 더운 거리 위를 달린 거다. 그는 손에 쥔 동전을 상대에게 건네주고는 손님의 표정도 보지 않고 다시 매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급해서 빨리는 가야겠는데 지친 다리가 상체를 따라가지 못해 곧 바닥에 엎드릴 듯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내 앞을 지나 좁은 창구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얼굴은 땀으로 반질거렸다. 스무 살은 됐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여자였다. 그는 숨을 짧게 내쉬더니 다시 능숙하게 아이스크림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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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오만,

여행 2018. 7. 10. 11:25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이제는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아마 국제 바자르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가이드북에 위구르족의 생활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시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첫날에는 가이드북에 적힌 대로 버스를 탔는데 알고 보니 반대 방향이었다. 그냥 포기하고 종점까지 가서는 좀 걷다가 돌아왔다. 부채를 좌우로 아주 천천히 부치던 한 여자만 기억에 남아 있다. 다음 날에는 제대로 버스를 탔는데도 헤맸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원하는 곳에 가닿질 않았다. 더위에 체력은 금방 바닥났다. 땀을 내는 게 아닌 몸을 바짝 말려버리는 더위였다. 6월의 우루무치가 그랬다. 나는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길을 묻지 않았다. 중국어를 모르기도 했고 더위에 기운을 빼고 싶지도 않았는데 어쨌거나 오기를 부리는 거였다. 정말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나는 중국에서 자꾸 중국이 아닌 것을 찾고 있었으니까. 중국 표준시로는 밤 열 시가 다 되도록 해가 지지 않는 이 땅에서 진짜, 아니 이 표현보다는 자연스러운, 시계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온통 한족뿐이었다. 당연했다, 중국 땅이니까. 그럼에도 신장위구르 자치구 시내 어디에서도 위구르인 한 명 보기 힘들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놀랍게도 나는 떠나기 전 날까지 헤맸고 결국 허겁지겁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에게 중국어로 하나부터 열까지 셀 수 있다며 오기를 부린 기억이 남아있다. 찾던 바자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은 후였다. 상상했던 곳은 아니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쇼핑몰에 가까웠으니까. 근처의 큰 마트에 들어가 에어컨만 실컷 쑀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물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면 어느 방향에서 버스를 타야 할까, 만일 택시를 타면 어디로 가자고 해야 하나, 낯선 곳에서 조금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자 나는 그런 생각을 떨치고 싶어 그냥 낯선 방향으로 걸어버리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막 다 먹은 즈음이었던가 몸통에 회칠을 한 나무가 많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마법처럼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 거리에 위구르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에, 벤치에, 주택가에, 나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도시의 변두리였다. 더위가 좀 꺾이는 해 질 녘, 피부를 식히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그 밑으로 낯선 언어가 낮게 깔렸다. 조용하고 묵직한 활기가 내 발을 이끌었다. 사람들이 모인 벤치에 가 앉았다. 이상하게 배밑에서부터 조금씩 안도감이 차올랐다. 

우루무치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본 건 무장한 군인들이다. 그때 내가 공포스러웠던 건 일어날지도 모를 위구르족의 테러보다 눈앞의 총을 든 군인들과 장갑차였다. 감시와 억압이라는 말을 조금은 실감했다. 겨우 여행자일 뿐이었는데도, 아니 여행자이기에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루무치에서 삼일을 머물고 기차로 열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카슈카르에서 나처럼 계속 서쪽으로 이동 중인 한 한국인을 만났다. 그도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인을 만나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이 사는 구역에서 묵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그는 공무원 학원을 많이 보았는데, 그게 좀 씁쓸했다고. “어쨌든 중국 사회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위구르족 청년들이 많다는 거 아니겠어요. 부모도 자식이 안전하게 편입되길 바랄 거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자 하는 건 당연한 마음일 텐데, 어쩐지 나는 그 애쓴다는 말이 오래 맴돌았다. 나로서는 가늠하기도, 판단하기도 어려운 문제들이 그 땅에 있다. 문제가 단순한 것 같지는 않다. 샤허에서 란저우로 가던 버스에서 티벳 청년을 만났을 때 나는 반가운 마음에 질문을 쏟아냈다.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앞으로 티벳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내 호들갑에 그는 조금 시큰둥하게 답했다. 지킬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고. 

글을 쓰는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티벳 자치구에 점점 더 많은 한족들이 몰려들고 더 높은 건물들이 지어지고 어떤 종류의 편리함들이 늘어갈 것이다.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하고 딱지 붙일 수는 없는 변화들이 그곳에서 복잡다단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느꼈던 감시와 억압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반발할 수도 없게 만드는 무서운 기운이. 얼마 전 신장 위구르를 검색하다가 중국 정부가 그 지역에 새 모양의 드론을 띄워 위구르족의 분리투쟁운동을 더 치밀히 감시하게 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를 보고 상기된 몇 년 전의 중국 여행, 중국 아닌 것을 더 찾았던 당시의 오기와 고작 여행자일 뿐인 나의 오만, 그럼에도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배 밑에서부터 묵직이 떠오르는 화는 여전히 떨쳐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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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에서

여행 2017. 12. 25. 22:02

  땀이 그의 등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다. 색이 바랜 티셔츠는 아마 본연의 색이었을 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구멍이 난 낡은 티셔츠에 목에 두른 스카프만은 화려하다. 오늘 기온은 사십 도를 넘겼다. 이곳은 인도의 암리차르, 삼십분 후면 나는 마날리로 가는 버스를 타야한다. 여기서 버스로 열다섯 시간 이상 떨어진 곳이다. 숙소 앞에서 사이클릭샤를 탔다. 버스정류장에 넉넉히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이 릭샤왈라는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십 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내가 자전거에 올라타던 순간 휘청대던 그의 마른 몸을 봤을 때부터 불안했었다. 버스 출발시간까지 십오 분이 채 남지 않았다. 뒤에서 한숨소리만 크게 내던 나는 결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제발 빨리 가달라’고 말한다. 그는 느리게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고 한 발 한 발 페달을 밀어내듯 누르다가 힘에 부치는지 이내 엉덩이를 내린다. 그러고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이마에 묶는다. 긴 눈썹으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오토릭샤와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우리를 앞지른다. 시커먼 매연이 우리 쪽으로 날아온다. 그는 ‘저 교차로를 건너 직진하면 오 분 안에 터미널이 나올 거다’며 ‘노 프라블럼. 돈 워리, 돈 워리’ 여러 번 힘주어 말한다. 그가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왜 나는 돈 몇 푼 아끼자고 오토릭샤나 택시를 타지 않았을까. 네거리에는 신호등이 보이지 않는다. 창문으로 먼저 팔을 내미는 운전사들이 빠르게 제 갈 길을 갔고, 그렇게 차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도를 건넌다. 곳곳에서 제각기 다른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 있긴 한데 호루라기 소리만 더 정신없게 할 뿐이다. 인도의 이런 혼란을 내가 좋아한다지만 버스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조급한 마음 앞에서는 짜증만 솟구친다. 여행자의 여유 같은 것도 어느새 잊었다. 릭샤왈라의 힘을 덜어줄 수 있을까 싶어 나는 엉덩이를 의자에서 살짝 뗀 채로 힘을 줘본다. 이젠 그의 검은 팔뚝도 온통 땀으로 반짝인다. 이 교차로를 건너기나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러니까 분명 교차로를 건너면 터미널이 나온다던 그는 느닷없이 자전거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버린다. 경사가 낮은 내리막길을 따라 자전거는 스스로 달리기 시작하고 당황한 나는 무슨 일이냐고 그의 등을 툭툭 친다. 그는 ‘웨이트, 웨이트’라고만 말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울화가 목 끝까지 치미는데 얼마 안 가 그가 자전거를 세운 곳은 수도 앞이다. 이미 사람들로 북적하다. 그는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플리즈 웨이트’라고 말하고는 내 반응도 살피지 않고 달려가 물을 마신다. 쉬지도 않고 물을 몇 컵 연달아 마시는 걸 보자 짜증났던 선명한 감정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물 한 컵을 가져와 나에게도 내민다. 물이 입에 닿고서야 나도 목이 말랐다는 걸 깨닫는다. 뒤늦게 인도의 수돗물은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이 떠오르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 그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돈 워리’ 하더니 자전거를 방향을 돌린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모르겠다. 그는 자전거를 끌며 달리기 시작한다. 속도가 붙은 자전거에 그가 올라타자 자전거가 크게 휘청거린다. 순간 놀란 나는 그의 어깨를 꽉 잡는다. 그는 또 한 번 ‘돈 워리, 돈 워리’ 흥얼거리며 오르막길을 오른다. 한 발 한 발 페달을 누를 때마다 자전거 체인이 끊어져버릴 것만 같다. 차라리 이 자전거가 망가져버리면 나는 버스를 포기할 수 있을까. 그래도 아직 버스가 출발하려면 몇 분 남았다. 나도 엉덩이를 들었다. 아수라장과도 같은 교차로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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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기운

여행 2017. 9. 19. 11:21

베란다 문을 열면 남해가 펼쳐졌다. 바다는 어제 늦은 오후 숙소에 도착해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해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친구가 카메라를 집어 들더니 산책을 가자고 했다. 나는 어제 저녁으로 먹은 순두부찌개가 담긴 냄비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순두부, 애호박, 팽이버섯과 제조된 양념으로만 만들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밥을 감탄하며 먹은 건 오랜만이었다. 두 사람의 한 끼 분량이 꼭 남아있었다. 그럼 아침식사를 하고 나설까, 하고 친구에게 물었다가 좀 더 배가 고프기를 기다리자고 내가 먼저 답했다. 알람 없이 일어나 바다를 보았고, 이제 산책을 한 후 아침식사까지 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런 게 여행이지. 우린 모자를 단단히 쓰고 숙소를 나섰다. 펜션 주인네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청소를 하고 있었다. 깔끔한 펜션이었다. 편백나무로 깔았다는 바닥 덕분에 상쾌한 향이 나는 것하며 식탁, 침대, 진열장 같은 가구도 신경 써서 갖춘 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집보다 좋은 숙소에서 단 며칠이라도 묵는 게 아니겠는가. 내일도 기대되는 기분 좋은 상태로 땡볕 아래를 걸었다. 바다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었다. 좁은 흙길을 따라 내려가니 바위들이 보였다. 바위까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먼 곳에 작고 새카만 섬이 보였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섬이라고 친구가 일러줬다. 신발을 벗고 마른 발로 바위 위를 걸어 바다로 들어갔다. 파도가 높이 칠 때마다 허벅지까지 말아 올린 바지가 젖었다. 우리는 까불며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젖은 발로 바위를 걸으니 표면에 쫀득하게 붙는 발바닥의 느낌이 좋았다. 뜨거운 볕에 발은 금방 말랐다. 한껏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이던 바다의 표면도 그새 강한 볕에 조금 누그러진 듯 보였다. 모래밭이었다면 바다를 끼고 근처의 유명 해수욕장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시야에 보이는 저 너머까지 바위 길로만 돼 있어서 우리는 이내 포기하기로 했다. 그만 돌아가자고 했더니 친구는 베란다에서 본 큰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가자고 했다. 크고 푸르렀으며 누가 관리를 하는지 아주 단정한 나무였다.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던 나무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달력 사진처럼 완벽했다. 우리는 멋진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며 기대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나였는지 친구였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이제 배가 고프네.”라는 말이 나왔다. 다시 둘 중 누군가가 “나무랑 사진만 찍고 어서 순두부찌개 먹으러 가자.” 라고 했다. 그 순간 내 발이 멈췄다. 순간 머릿속에서 화악하고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질렀다. “가스렌지 불 켜놨어!” “언제! 난 못 봤는데.” 친구가 말했고, “아닌가? 아니 켰는데 껐을지도 몰라. 아니야. 켜둔 것 같애.” 말은 오락가락했지만 사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찌개를 데우려고 가스 불을 켰다가 끄지 않았다는 걸. 일단 펜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라 금방 지쳤다. 친구가 빠르게 앞서 달려갔다. 더 빨리 힘을 내서 달려야 하는데, 나는 두려운 마음에 도착을 피하고만 싶었다. 펜션에 연기가 나고 있으면 어떡하지. 혹시 불이라도 붙었으면 어떡하나. 감당할 수 있을까. 사고라는 건 이렇게 순식간에 벌어진다는 걸 실감했다. 몇 분을 달려 펜션 앞에 도착했다.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화난 얼굴의 펜션 관계자들도 없었다. 뛰어오느라 헐떡거리는 숨과 겁이 나 벌렁거리는 심장소리가 온 몸을 두드렸다. 빠르게 숙소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집 안은 희끗한 연기와 매캐한 냄새로 차 있었다. “불 켜 있었어?” 친구는 묵묵히 냄비 바닥을 닦고 있었다. “응.” 난 쭈뼛거림과 신속함이 뒤섞인 걸음으로 다가가 싱크대를 내려다 봤다. 국은 완전히 졸아 냄비바닥에 시커멓게 덩어리져 있었다. 그때 주인이 문을 세게 두드렸다. “음식 태웠죠?” 죄송하다고, 음식이 좀 탔다고 했다. 주인은 손으로 코앞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거 다 편백나무라 냄새 배이면 안 된다구요!” 얼굴을 찡그렸지만 길게 말하지는 않고 떠났다. 혹시 주인이 문을 두드렸을 때 우리가 집에 없었다면, 아찔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어떻게 불을 켜둔 걸 까맣게 잊을 수 있는지, 그런데 또 어떻게 순식간에 그 사실이 빠르게 환기가 됐는지. 난 또 이런 사실들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친구는 괜찮다며, 다행이라며 냄비 바닥이나 열심히 닦자고 했다. 국을 데울 때 물 한 컵만 넣었다면 이렇게까지 많이 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머릿속에서 가스렌지에 불이 붙을 때 나는 화악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햇반을 데워 참치 한 캔과 밥을 먹었다. 목이 말라 자꾸 물을 마셨다. 결국 밥에 물을 부어 말아 먹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안심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느낀 평온함은 싹 사라졌지만, 그 평온함보다 이 안심하는 감정이 더 달콤해서 냄비 닦는 일은 제쳐두고 침대에 누워 그만 낮잠에 들었다. 꿈에 결국 가보지 못 한 아름다운 나무가 보였다. 나무를 올려다보는데 내 쪽으로 커다란 파도가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온 몸이 물에 젖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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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의 메모들

여행 2017. 1. 23. 13:39

(인도에서 파키스탄을 거슬러 중국까지 되돌아가는 메모)

-사방을 둘러싼 산들. 밤이면 산들이 마을에 더 가까이 다가온다. 산등성이에서 빠르게 솟아오르는 달.

-멀리서만 보던 라다크의 독특한 산을 오늘은 차를 타고 달리며 가까이서 보았다. 손을 뻗으면 곧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멀리서 볼 땐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꼈는데 곁에서 보고 있자니 이건 오를 수 없는 산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동키가 풀을 뜯는 모습은 하루종일이라도 보겠다.

-이렇게 세상의 멀리까지 오니까 세상은 쉽게 멸망하지 않을 거라는 묘한 위안이 생긴다. 그 위안이 희망 때문인지 절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뚜르뚝 마을. 벌이 많은 곳. 꽃이 많은 곳.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곳. 지천에 떠있는 살구들.

-나무껍질같은 산과 산등성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구름. 이 아름다운 롱테이크를 눈을 깜박이는 것도 아까워하며 지켜보았다.  

-도로 곳곳에 비석처럼 세워진 표지들: Don't worry, Be happy. Never give up. 달라이 라마의 말씀. 어딘가에선 흔해진 말이 다른 어딘가에서는 가장 절실한 말이다.

-킬롱으로 가는 로컬버스 안. 내 왼편엔 젊은 여자와 그 품에 안긴 작은 아이가 있다. 아마도 모녀. 아이는 작은 손으로 과자를 꽉 쥐고 있다. 내가 쳐다보니 행여 과자를 뺏을까 싶어 눈을 살짝 흘기고는 등을 돌린다. 아이는 먹은 과자를 금새 토한다. 작은 머리통. 여자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토를 받는다. 오백 원짜리 동전 만큼의 토사물. 비포장 도로에 버스가 넘어질 듯이 비틀거린다. 어느새 여자와 아이는 잠에 들었다. 아이를 품에 앉은 채로 여자는 한 손에 토사물을 감싼 수건을, 또 한 손으로는 앞좌석을 꽉 쥐고 있다. 운전 기사가 핸들을 꺾을 때마다 내 몸은 좌석 밖으로 튕겨나가거나 모녀에게도 쏠린다. 그들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엉덩이에 힘을 준다. 힘이 풀렸는지 이제 여자의 검지 손가락 만이 손잡이에 걸린 채 버티고 있다. 둘은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는다. 아이가 자꾸 여자의 품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여자. 까맣고 긴 머리를 땋았고 작고 마른 몸. 안경을 끼고 있다.  

-창 밖으로 개가 짖는 소리. 여행하는 동안 보았던 끔찍한 기사들. 터키, 방글라데시, 이스라엘의 테러들. 터키의 쿠데타. 이게 모두 두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벌어졌다. 

-윤회를 끊기 위해, 그래서 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않기 위해 바라나시에 죽으러 간다는 노인들. 이 말을 듣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파키스탄와 인도의 국경인 와가보더. 인도로 넘어가자 입국장으로 데려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짧은 거리를 굳이 버스로 이동시켜주니 편안하긴 한데 왠지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버스 안에서 광광 울리는 음악도 시끄럽다. 그래도 흥이 나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그립던 문화.

-여행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루하루 즐겁고 싶어서. 보람과는 상관 없는 것.

-중국에서 자꾸 중국 아닌 것을 찾고 있다. 우루무치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총을 든 군인들을 보았다. 몇 년 전 위구르족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테러의 끔찍함 보다는 중국의 폭력적인 중화 사상에 더 치를 떨게 된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위구르인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얼굴들이다. 도시의 끝에 와서야 만났다. 이들은 도시의 변두리으로, 더 서쪽 지역으로 떠밀리고 있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시 반,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2,400km 떨어진 이곳은 어쨌든 중국의 땅. 그래서 베이징의 표준시각을 따르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체시계는 그렇지가 못하다.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어디서 만나도 좋은 풍경.

-둔황의 막고굴을 만들기 위해 당시 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천년 후를 생각해 투자했다. 아 이거 정말 멋지잖아.   

-중요한 건 내가 여행지에서 무엇을 느끼느냐다. 나의 느낌. 그리고 그걸로 쉽게 판단하지 않으면 된다.

-난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해발 삼천 미터의 샤허에 오고 고산병 증상에 시달렸다. 두통이 멈추질 않았고 그래서 평소 내 속도대로 걸을 수 없었다. 입맛이 없고 무기력했다. 누워서 천장만 보다가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겠어서 마을을 천천히 산책했다. 기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봤을 때 두 시간이 지난 걸 보고 놀랐다. 깊은 주름이 박인 산들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고, 지붕 없는 집들은 높은 데서 보면 마치 납작 엎드려 있는 것 같다. 이 집들이 받들고 있는 것은 라브랑 사원. 티벳 불교의 3대 사원 중 하나가 이 샤허에 있다. 야크 버터를 들고 사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법당에선 24시간 내내 야크버터를 태운다. 처음 법당을 들어섰을 때 압도당한 것은 시각도 청각도 아닌 이 야크버터 냄새에 놀란 후각이었다. 코끝에서 야크 버터 냄새가 가실 즈음 고산병도 나았다.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닌, 그래서 가장 평온할 땅들이 창밖으로 한참이나 펼쳐진다. 

-중국에서의 첫 기차. 인도에서의 기분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밤기차를 타고 침대에서 자다보면 새벽에 문득 깨는 일이 있다. 달리던 기차가 잠시 멈춘 탓이다. 선로가 하나로 바뀌는 곳에서 반대편의 기차가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잠시 고요한 사이 들리는 잠의 소리들.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머-언 곳에서 경적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안개를 뚫고 달려오는 피곤한 얼굴의 기차가 보인다. 이내 기차는 레일을 누르며 내 옆을 지나가고 그 진동의 여운이 내 몸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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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트 포트에 갔다가 알리라는 가이드를 만났다. 그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카페트가 깔린 방에 앉아 짜이를 두 잔 마시고 막 따온 체리도 잔뜩 먹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었다. 학교에서 여동생이 돌아왔다. 요람에서 잠자던 아기가 그녀의 딸이었다. 남편은 돈을 벌러 외국으로 갔다고 했다. 아기는 삼촌인 알리가 아빠인 줄 안단다. 집에서 나와 수로길을 걸었다. 훈자의 수로는 유명하다. 빙하에서 녹은 물을 마을까지 끌어다 쓰는 거다. 미네랄이 많아 회색빛이다. 그가 동네 아이에게 컵을 얻어 수로에서 물을 떠서는 내게 권했다. 시원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알리는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모르겠다고, 그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다른 나라에서 일하기 위해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해외에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 일을 하러 간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다. 도와줄 수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런 건 잘 모른다고, 나는 답했다. 꼭 오고 싶던 아름다운 훈자, 설산과 포플라 나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주는 곳, 그리고 이곳에 사는 한 청년은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는 먼훗날 자신의 집을 지을 터를 보여주었다. 사과와 체리나무가 많은 땅이었다. 물이 흐르는 아랫마을과 설산이 잘 보였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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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를 계속 읽는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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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정신없이 책에 몰입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의 느낌이 좋다.

-뭘 잘못 먹었는지 체했다. 위액이 나올 때까지 토하고는 다음 날에도 내내 잤다. 꿈에서 엄마와 이글네스트에 다녀왔다. 꿈에서 자꾸 목이 말랐다.

-S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에 전혀 지치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새로운 여행자와 나란히 혹은 마주 앉아 몇 시간씩 대화를, 그것도 즐겁게, 목소리에 힘이 빠지지도 않고 한다. 놀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잘 노는 사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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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건강하게만 살고 싶은데 슬프고 고통스럽기도 할 거라는 걸 감안하며 살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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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으면 하늘이 무너질듯 슬플 것 같다. “어머니가 죽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했던 정릉동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눈화장을 하고 반바지를 입은 파키스탄 청년을 만났다.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물론 많지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남에게 뭐라하지 않으니 당신도 나에게 뭐라하지 말라.”고 한단다. 그는 이 나라의 옛 것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자유가 좋다고 했다. 중국어, 페르시안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페르시안어는 유투브를 보고 배웠단다.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곧 중국으로 가서 공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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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부터 자전거로 여행 중인 또래의 홍콩 청년을 만났다.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가 내리는 아침에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 영어가 유창해서 이 사람과 더 깊이 대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떠났다. 저녁 여덟 시가 되기 전에는 길기트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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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훈자왕이 사는 궁전엘 갔다. 궁전이라고 부르지만 대저택에 가까웠다. 이곳 정원의 체리맛은 여지껏 먹어본 것들 중 최고였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경호원이 나서서 체리를 따주었다. 그리고 파라솔 아래에서 같이 수다를 떨었다. 우린 왕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왕이 자신의 창 너머로 놀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깔깔거렸다.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느슨함이 좋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일하다가 올해 훈자로 배치된 이 경호원은 “이곳에서는 사람을 감옥에 보낼 일이 없다”고 했다. 평화롭다 못해 심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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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 체리나무를 갖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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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카포시 베이스 캠프 트래킹을 하는 날. 새벽 네 시에 출발해야 하는데 네 시 오분에 동행이 방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쿠리와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쿠리는 스위스 사람이다. 셋이서 같이 쓰는 방에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며 짐들을 늘어 놓았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지 않는다. 입던 바지, 그 앞에 신던 양말, 그 옆에 티셔츠, 그 앞에 먹던 빵과 잼. 하루하루 차곡차곡 짐들이 진열되고 쌓여갔다. 미소를 지은 채 자곤 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라고 했다. 스위스의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는데 물어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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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카포시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 남자 동행들의 걸음에 뒤처지지 않아야 했다. 숨이 심장까지 전달되도록 숨을 끝까지 들이쉬고 길게 내뱉기를 반복했다.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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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는 길에 한 사람씩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만났다. 난간이 없고 오른편엔 낭떠러지였다. 이 길의 건너편에서 소 세마리가 줄지어 걸어오기 시작했다. 서로 못 지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가이드는 주저하지 않고 길로 진입했다. 사람이 보이자 소들은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방향을 틀어 도망치다가 좁은 길에 두 마리가 지나가려고 우왕좌왕 하더니 한 마리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소들이 놀라서 움찔하던 순간, 근육질의 몸이 펄떡거리며 방향을 트는 모습, 한 마리가 또 한 마리를 추월해서 달리려다가 좁은 길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던 순간, 짧은 순간 그걸 보아야했던 나는 비명을 질렀고 순간 눈앞이 하얘져서 차마 아래를 보지 못했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우리는 소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런데 굴러 떨어져서 아마도 저 먼 아래에 죽은 채로 있을 줄 알았던 소는, 그 소는, 몇 미터 아래의 절벽에 붙은 바위 위에서 우리를 향해 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 걸음만 걸어나가면 바로 추락할, 딱 소 한 마리가 서 있을 만한 크기의 바위 위에서 말이다. “유아 럭키!”라며 가이드가 얄밉게 소리쳤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했다. 소는 정말 운이 좋았지만 거기서 소가 올라올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냐며, 구해줄 수 없느냐고 우린 걱정했고, 가이드는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이라고 하며 주인이 와서 구해줄 거라고 태연히 말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두 마리의 소가 우리 주위를 서성였다. 아아, 나는 괴로웠다. 사람이라고 저 무거운 소를 들어올릴 수 있을까? 밧줄로? 소가 제 몸에 밧줄을 묶을 수 있을까, 그냥 두면 결국 굶어죽는 거 아닌가? 가이드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못해 우리도 발길을 돌려 따라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움머어~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세 마리의 소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당황해하는 우리를 보고 가이드는 “히 이즈 스트롱, 히 이즈 로컬 카우” 하며 웃었다. 네 발로 기어오른 것이다. 아아 네 발의 힘, 네 발의 힘, 저 근육질 몸의 힘. 너무너무 놀라웠다. 기어오르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게 몹시 아쉬웠다. 아아, 로컬의 힘이란... 그리고 소들이 겁이 많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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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람 하이웨이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끝난다. 이제 훈자를 떠나 이슬라마바드로 간다. 이른 새벽인데 쿠리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동행할 친구가 손을 흔드는 쿠리의 사진을 찍었는데 푸른빛의 공기와 푸른 옷과 모자를 쓴 쿠리의 모습이 참 좋았다. 친구는 “언니 나 내년에 여기 꼭 다시 올 거예요.”라고 했다. 아침 일곱 시에 출발한 버스는 다음날 새벽 네 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낮에는 나도 친구도 땀을 뻘뻘 흘리며 잤다. 이슬라마바드도 라호르도 숨막히게 더울 거라고 다들 겁을 주었다. 기사 한 명이 스무 시간 내내 운전을 했다. 처음에는 노동권이 안 지켜지네 어쩌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저 그가 지치지 않기만을 응원했다. 무사히 도착하게 해달라고.. 그의 뒷모습에서 후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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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마바드로 가는 동안 대여섯 번의 검문을 받았다. 어느 검문소에서는 기사가 총을 받아왔다. 장총을 운전석 옆에 툭 하고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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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리는 길에 세계 최고봉의 설산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설산이 너무 좋다.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릴 때는 버스가 넘어질 듯이 흔들거리고 그 버스보다 내 몸이 더 흔들린다. 흔들리는 대로 몸을 편하게 둔다. 비가 내리면서 더위가 좀 가셨다. 해 질 녘 버스는 강을 오른쪽에 끼고 절벽 위를 달린다. 갑자기 선명해지던 비 냄새, 비에 젖은 흙 냄새, 기름 냄새, 사람들의 땀 냄새, 절벽 아래의 강물 냄새.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익숙하고도 낯선 이 냄새를 오래 기억하자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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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마바드에서는 지인의 집에 묵었다. 외곽에 위치한 베리아 타운이라는 곳이다. 여기는 테러의 위협이 없다고 했다. 전기가 끊기는 일도 없단다. 이 타운에 들어갈 때는 신분 확인을 받았다. 이 부유한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담이 느껴졌다. 밖은 거의 50도에 육박하는 더위로 끓는데 지인 덕분에 우리는 시원하게 이틀 밤을 잤다. 뜨거운 물로 사워도 했다. 지인은 삼계탕을 해주겠다고 했다. 차를 타고 베리아 타운을 구경했다. 타운 안에는 주거지 건물들뿐 아니라 학교, 영화관, 쇼핑 센터, 카페 등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마련돼 있다. 거주민들 대부분이 타운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과 거리는 깨끗하고 세련됐다. 아이스크림 집에서 만난 아이들은 외국인인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왕이면 막 잡은 닭을 사자고 해서 타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늦은 새벽에 도착해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풍경, 타운의 입구를 지나자 어지러운 전깃줄과 낡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포장 안 된 거리는 더운 모래가 날렸다. 그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구걸을 하는 아이들이 차를 향해 다가왔다. 아이들은 차를 쫓아 달려왔고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닭집 주인은 빗자루로 아이들을 쫓았다. 사실 낯설지 않은 풍경인데도, 이상하게 두려웠다. 이렇게 선명한 부와 가난의 대비는 낯설다.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오는 이 풍경은 거짓말 같다. 그래도 머리로는 알고 있는 거잖아. 놀라는 내가 당황스럽다. 생닭을 잡는 것을 보았다. 닭장 안의 닭들은 자신들 앞에서 하나의 닭의 목이 비틀리고 털이 뽑히고 토막이 나는 것을 쳐다보았다. 죽어가는 닭을 볼 수 없어서 그걸 보고 있는 닭장의 닭들만 바라보았다. 닭값을 계산하는데 직원이 피 묻은 손으로 거스름돈을 건넸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지인이 대신 받았다. 건네받은 봉지가 묵직했다. 마늘을 아낌없이 넣어 만든 삼계탕은 맛있었다. 사실, 너무너무 맛있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씻고 따뜻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었다. 근처에 큰 마트가 있다고 해서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갔다. 이렇게 크고 밝고 물건들과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 이상하게 점점 기운이 빠졌다.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을 것 같은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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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에 물렸다. 훈자에서 물린 것 같다. 빈대가 배를 좋아한다더니 정말 뱃살 위를 잔뜩 물었네. 진짜 너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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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로 간다.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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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는 이슬라마바드보다 더 덥다. 새벽 내내 잠의 근처를 서성이면서 이마에서 굵은 땀이 귀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내 감각이 흐르는 땀들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땀의 궤적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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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길을 걷다가 렌즈가 빠지는 꿈을 꾼다.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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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박물관을 다녀왔다 폭탄 테러와 명예 살인으로‘만’ 알려진 파키스탄.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예술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철학자도 예술가도 죄다 서양이 익숙하다. 문득 나와 같은 여행자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를 더 알고 싶으니까. 이해하고 싶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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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의 힘을 믿고, 그 힘으로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국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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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적이 있었고 어느 시절이 지나고부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내 마음은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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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다는 챠만 아이스크림 집에서 아이스크림 두 컵을 내리 퍼먹었다.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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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에서의 짧은 일기들-1


-중국에서 파키스탄으로 왔다. 시계를 세 시간 뒤로 돌렸다. 숙소에 따뜻한 물 한동이를 부탁했는데, 받는데 자그마치 한 시간이 걸렸다. 다른 나라로 왔음을 실감한다. 한동이로 몸은 충분히 헹구었으나 머리를 감느라 찬물을 두동이 썼다. 머리를 헹구는데 물을 많이 쓴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국경을 넘어 처음 도착한 소스트(Sost)는 도로 하나를 두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이 도로가 카라코람 하이웨이(K.K.H). 이 도로를 꼭 달리고 싶었다. 이제 원없이 달릴 것이다. 도로에 서면 보이는 웅장한 설산은 아무리 보아도 영원히 질릴 것 같지 않다. 그 설산을 향해 걸으면, 이 정도는 견디며 다가오는 사람만을 맞이하겠다는 듯 피부를 때리는 세찬 바람이 분다. 걸어도 걸어도 그 설산에 닿지는 못하겠지만. 

-혼자보다는 둘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는 여행이다. 왜 둘이 만나 (꼭 제도로서가 아닌)결혼을 하라고 하는 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둘이 되면 ‘상실감’이라는 게 생기겠지. 나는 상실감이 두렵다. 

-미도리는 늦게까지 책을 읽는다. 먼저 자는 나를 위해 불을 끄고는 휴대폰 전등앱을 희미하게 켜둔다. 자다가 문득 깨어 돌아보면 저만치에서 그녀가 등을 돌린 채 책을 읽고 있다. 일본의 작은 책이 유난히 귀여워 보인다. 

-흔히 사람들에게 훈자 마을이라고 알려진 카리마바드(Karimabad)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였다. 숙소의 책꽂이에 『여행생활자』가 있었다. ‘
덕분에 십년 후의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새로운 곳에 도착하고 숙소에 짐을 풀고 난 뒤의 막막함. 여행을 시작한 지 꽤 되었음에도  새로운 장소로 옮길 때마다 매번 이런다. 특히 숙소가 나쁘면 빨리 적응하기가 어렵다. 당연하게도, 시간이 해결해준다. 

-파수(Passu)의 서스펜션 다리를 건널 때의 두려움과 집중력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다. 세상에서 건너기 가장 무섭다는 다리였다. 

-아마 평생 고통에 관한 질문들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포플라 나무를 쳐다보다가 문득 긍정적인 질문들도 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통해서 말이다. 꽤 불행한 일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건강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래 나는 내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나를 ‘생존자’의 관점에서 관찰해보면 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다시 이 숙소를 찾는다면 지금 눈앞의 포플라 나무 때문일 것이다. 이 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모네가 왜 하루종일 포플라 나무를 그렸는지 알 것만 같다. 굵지 않은 줄기로 여느 나무보다 높게 자랐고, 줄기의 대부분이 가지와 잎들에 뒤덮혀 있다. 바람이 불면 줄기까지 함께 흔들린다. 처음에는 보기에 위태로웠는데 익숙해지니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 사이로 빛이 고일 때, 이 나무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반짝거리는 잎들. 잎이 반짝거린다는 것은 별 거 아닌 말이지만, 이렇게 그 말이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을 직접 바라보고 감동하고 있으니까 아직 내가 겪지 못한 흔한 말들이 아쉽다. 

-넉넉한 마음, 바라지 않는 마음

-『오래된 미래』를 계속 읽는다. “그것은 깊은 생각과 직접적인 경험의 결합에 의해서만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p.97)

-어제 꿈. 백 루피, 한국 돈으로 천 원 가량의 돈이 없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여자가 있었다. (깨기 전까지는 무척 선명했던 그 얼굴) 나는 가진 돈이 별로 없어 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도 자꾸 마음에 걸려서 나는 결국 돈을 빌려주기로 결심하고는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정까지 백루피를 갚아야만 한다고 했었다. 갚지 못하면 위험할 지도 몰랐다. 나는 조급하게 그녀를 찾아 헤맸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어느 건물 안에서 마침내 그녀를 발견했고, 그 순간 내 왼손에 백 루피가 쥐어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웬일인지 그녀의 모습은 전과 달리 무척 깨끗했다. 심지어 화려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왼손에 쥔 돈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지갑에서 꺼낸 것은 한뭉치의 돈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니 내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명백히 느끼게 하는 동선으로 이동해서 창구 너머로 돈을 깊숙이 밀어넣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던 동정과 연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느낌이 주던 기쁨. 기뻤다. 해방감에서 느낀 기쁨. 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고 알 수 없다. 그저 이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 앞선 드라마(그것도 내가 만든)가 필요했을 것이다. 

-중국의 동티벳을 다녀온 한 여행자의 말: “티벳 사람들은 부처를 정말 사랑하나봐요.” 사랑이라. 믿음과 사랑은 다른데. 

-어제 한 시간쯤 자면서 짧은 꿈을 꾸고, 잠시 깼다가 다시 잠들어 긴 꿈을 꾸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드라큘라처럼 날카로운 이를 가진 소녀를 보았다. 나는 그 이가 무서웠다. 그래서 있던 곳에서 도망쳤는데 도망친 곳에서 소녀를 또 보았다. 떠나기 위해 돌아섰을 때 그녀가 바로 앞에 서있었다.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나는 너의 이가 무섭다고, 날 해치지 않을 거냐고 하니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 미소와 한번의 끄덕임이 나를 편안하게 했고 순식간에 그녀가 좋아졌다. 그녀가 좋아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내 얼굴을 가져갔다. 

-꿈은 현실에서 받은 자극들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꿈을 통해 전혀 새로운 감각을 얻기도 한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손가락에 힘을 주어 이 감각의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덮는다. 

-아주 가끔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늘 바라는 꿈. 하지만 매번 충분히 날지 못한다. 날개짓에 힘이 너무 많이 들고 곳곳에 장애물도 많다. 하지만 어제는 처음으로 ‘마음껏’ 날았다. 도시의 밤하늘이었다. 너무 벅찼고 온몸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느꼈다. 공기를 가르며 날개짓을 할 때마다 손가락들은 차갑고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내 마음은 깊은 곳까지 시원했다. 그래서 너무 좋은데, 그런데 너무 쓸쓸했다. 나를 끌어내리는 중력도 없고 피해야 하는 높은 건물도 없다는 것이 너무 행복한데,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너무 마음이 아팠다. ‘왜 이럴까.’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꿈에서 깼는데도 이 느낌이 남아서 오래 누워있었다. 

-저녁 여덟 시부터 숙소의 평상에 앉아 별이 뜨는 걸 본다. 설산이 지워지고 별들이 반짝인다. 

-잠이 솔 들 때 바로 진입하지 않으면 반의식 상태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어제는 모기가 계속 내 얼굴과 팔에 붙어있다는 착각(?) 때문에 얼굴과 팔 여기저기를 긁었다. 누가 보면 그런 내 모습이 어떨까. 

-한 달 후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하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떠올리는데,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 돌아가는 걸 알고 싶고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한다. 터키의 테러 소식에 모험과 호기심은 바보 같은 걸로  돼버리는 것 같다. 마음이 무겁다. 

-유년 시절 내게 특별했던 
주문이 생각났다. 
어떤 상황에서 문득 두려움이 일기 시작하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그 상상을 끝까지 한다. 엄마랑 동생과 함께 밤중에 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느닷없이 겁이 났다. 나도 모르게 지금부터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상상을 끊은 건 내리자는 엄마의 목소리. 동생의 손을 잡고 걷는데 안도와 동시에 허무함이 찾아왔고, 아마 내가 상상하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이었기에 종종 사용했다. (원하지 않게 좋은 일들에도 적용됐다.) 하지만 나는 철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상상했던 나쁜 상황들이 실제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고, 상상도 못하는 더 끔찍한 일들도 발생한다는 걸 알았다. (좋은 일도? 좋은 일에 관해선 이 주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데, 모를 일이다. 좋은 일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어제는 자신의 몸을 칼로 난도질해 자살한 파키스탄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의 우울이 더 심각하기도 하다고. 세상의 고통을 피하고 싶어 여행을 다니는 것은 아닌데, 어딜가도 피할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다.

-비가 온다. 짜이를 마시며 안개 낀 산들을 
보았다. 

-내가 살던 곳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지금 있는 곳에 대한 낯설음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령, 이곳은 파키스탄이라는 것.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해가 지면서 살구빛으로 물든 구름이 설산을 감싸고 있다. 그런 구름에 설산은 자신을 온순하게 내맡기고 있는 듯하다. 아이의 목에 수건을 두르고 얼굴을 씻어주는 부모 같다. 오늘의 설산과 구름. 

-꿈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나는 쇼트트랙을 배웠고 재능이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게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것을 잘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았다. 다가 올 경기에서 중국인들을 이겨야 했는데, 그들을 이기고 싶다는 경쟁심도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알아줌. 완전히 알아줌. 

-내가 느끼기. 무언가를 통하지 않고 내 힘으로 내 감각으로 느껴보기. 

-숙소 
건물의 난간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며 현지인과 나눈 이야기.
파키스탄은 핵을 갖고 있지만 전기는 부족하다. 사람들에게는 전기가 더 중요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람들끼리는 서로 싫어하지 않는다. 긴장을 만드는 것은 정부고 군사다. 사람들은 군대를 원하지 않는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빠른 성장은 위험하다. 한국은 너무 빨리 성장했다. 파키스탄은 한국에 비해 천천히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주위는 어두워지고 아랫마을에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들려오는 모스크의 기도문 소리.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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