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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4.05 자궁 병동
  3. 2010.09.15 dear billy 2

운동화

2016. 8. 21. 00:02


자꾸 내 신발이 신경쓰였다. 오른쪽이었던가 왼쪽이었던가 아마 왼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왼발에 더 힘을 주어 걷는지 내 신발들은 왼쪽의 뒷축이 더 낡아있으니까. 아무래도 왼쪽이었던 내 신발의 밑창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지는 꽤 오래되어서 신발을 허공에서 흔들면 밑창이 덜렁거리고는 했다. 평지에서 빠르게 걸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달랐다. 단풍이 가장 예쁘다는 시절에 사람들과 서울의 북쪽 끝에 있는 산을 올랐다. 무릎에 힘을 주어 한걸음씩 오를 때마다 뒷축이 벌어졌다 닫히는 것을 느꼈다. 그날 내 뒤에서 걸었던 동행을 기억한다. 뒷꿈치에 힘을 주며 올랐지만 그런다고 떨어진 밑창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부끄러웠고 가난했다. 부끄러우니까 내가 가난하단 걸 알았다. 많은 것들이 내게 사치였고, 사치를 못부리는 내 가난이 좋았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살짝 취한 동행 중 한 명이 내 어깨에 기대 중얼거렸다. 지금 이 사람들이 너무 좋다고, 함께 집회에 나가고 공부도 할 수 있어서 참 좋다고. 이내 우리는 잠들었고, 결국은 좋은 날이었다. 신발을 바로 버렸는지 그러고도 오래 신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지하 매장에서 산, 굽이 낮은 감청색의 캔버스화였다. 끈이 있었지만 신고 벗을 때마다 손대지 않아도 되었다. 밑창이 딱딱해서 발이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었는데 적응되고 나니 너무 편해 일 년 내내 그 신발만 신고 다녔다. 그래서 빨리 낡았다. 사실 그 시절엔 신발이 늘 한켤레였다. 그 신발의 모양은 지금도 꽤나 선명한데, 내가 한걸음씩 돌계단을 딛고 오를 때마다 신발 밑창이 벌어졌다 닫히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데, 왠지 그 신발이 내게서 영영 떠났던 순간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김 숨의 『L의 운동화』를 읽다가 한때 내 운동화였던 그것이 떠올랐다. L과 L의 운동화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내 운동화 역시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는 소설이다. 영영 잃어버린 L의 왼발 운동화도, 밑창 떨어졌던 내 운동화도 지금은 손에 잡히지 않을 무언가가 되어 모두 같은 곳에 있을 것만 같다. 신발에 영혼이 있다면 말이다. 가끔은 그렇다는 걸 믿어야만 한다. L의 운동화 복원가가 그리고 이 책의 작가가, L의 운동화를 “지켜보고, 기다리며,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듯이, 그랬듯이. <이한열기념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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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 병동

2011. 4. 5. 23:00

 

 

도리스 레싱의 단편 모음집 <런던 스케치> 그 안의 <자궁 병동> 

  결혼하고 이십 오년 동안 단 한 번도 남편과 떨어져 밤을 보내본 적이 없다는 여자가 입원했다. 산부인과, 여자들이 농담처럼 부르는 ‘자궁 병동’에. 보호자도 없는 조용한 오후 2시의 병실, 소설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반나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덟 명의 ‘늙은 여자’들이 모인 좁은 병실. 정말로 늙지는 않았지만, 젊은 여자 간호사들에게 그저 늙은 여자에 불과한 이 환자들은, 다닥다닥 붙은 침실에 나란히 그리고 밀어내며 누워 있다. 서로가 낯선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병을 앓고 있어 친밀한 관계. 그렇게, 다른 세계들이 기묘하게 공존해 있다. 그들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계급도 달랐으며, 아이가 여럿 있는 여자이기도 또 얼마 전 유산을 한 여자도 있으며, 누군가는 이미 남편과 사별했고 어떤 여자는 평생 남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오후에 입원했다던 여자는 아직도 남편과 함께 있다.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남편의 손을 놓지 못 하다 기어코 울기 시작한다. 밥을 떠먹여 주는 남편 앞에서 몇 번이고 눈물이 뚝뚝 흘리고 닦아내고 스스로 불행하다는 걸 참지 못 하는 듯 이내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짓길 반복한다. 남편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자 여자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혼자 보내야 할 밤이 다가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남편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제 다른 일곱 명의 여자들은 슬슬 그런 그녀를 짜증내 한다. 그녀의 우는 모습에서 되려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 여자인지를 보는 다른 여자들. 남편은 결심한 듯 냉정하게 병실을 나가버렸고 간호사에게 핀잔까지 들은 그 여자는 기가 죽어 이젠 소리를 죽이고 흐느낀다. 그 사이 퇴근한 남편들은 아내를 찾아 병실을 찾고 안부를 묻고 아이들 얘기를 하다 집으로 간다. 이내 병실은 조용해졌다. 공허하고 막막한 병동의 공기.
 
잠에 들어야 할 시간, 예민한 여자들이 잠에 잘 들도록 따뜻한 우유들이 전해진 후 병실의 불은 꺼졌다. 그럼에도 그 여자(여자의 이름은 마일드리드 그랜트다)는 흐느낌을 멈추지 않는다. 대체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작정인지, 짜증이 나면서도 측은함을 느끼던 여자들은 이내 기계처럼 이어지는 그녀의 흐느낌에 익숙해지고 그때 즈음, 여자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각자의 내부에 자신의 권리와 요구 사항을 가진 달랠 수 없는 어린 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그들은 그 아이를, 그리고 그 아이를 누르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저마다의 침대에서, 가까이 밀접해선 툭툭 침범하는 타인을, 그로인해 또 다른 자신을 느끼며.
 
무엇을 참을 수 없었는지 귀부인인 한 여자가 몸을 일으키며 그랜트를 내보내겠다고 말을 꺼냈고 그와 동시에 한 여자가 무거운 몸을 일으키곤 자신의 침대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녀는 평생 남편을 가져본 적이 없는 여자, 미스 쿡이다. 그녀는 그랜트에게 다가간다.
 “이봐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울지 마, 정말로 그러면 안 돼....”
 
그때, 바로 그 순간, 그랜트는 몸을 돌려 자기 팔로 미스 쿡의 목을 왈칵 안는다. 미스쿡은 당황했을 거면서도 어린 애 달래듯이 도닥여 주며 말한다 “당신은 얼마나 운이 좋은 여자요, 안 그래요? 언제나 톰이 있었으니, 확신하건대 우리 모두는 우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래요.” 만지고 토닥거리고 안아줄 사람 아니 대상이란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 한 늙은 여자가 칭얼대는 또 다른 늙은 여자를 어설프게 안아 주고 있다. 여자들은 말없이 생각을 나누었고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미스 쿡은 말한다. “아,, “살면서 배우는 거지.” 그리고 그들은 곧 자신만의 세계에 잠긴 채 깊이 잠든다. 

  글을 읽고 난 후 잔잔하게 오래 지속되는 감동이 좋아서 이야기가 몸에 밸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소설의 화자는 마치 병동 위에 고정된 카메라처럼 그 자리에 붙박혀선 각자의 인물들에 다가갔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누군가가 된다거나 옆에 찰싹 붙어 그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시점이 아니다. 개입하지 않고, 섣불리 누군가의 대변자가 되어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건 그게 게으른 시선이 아닌 굉장히 철저하고 전략적인 시선이란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완벽한 관찰자가 되기 위해, 성실하게 그 누군가가 되어 보고 또 되어 보는 과정을 겪은 것 같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그 힘으로 끌어나가는 경우가 많지만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선 특별히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그저 늘 그곳에 있던 사람처럼, 일상에서 만나듯 소설을 읽다 우연히 만나는 것 같다. 
 
작가는 아주 가볍게 인물과 상황을 묘사하고 치고 빠지면서도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충분한 문장을 쓴다. 도리스 레싱에게 중요한 건 매력적인 인물이나 흥미로운 이야기의 창조보다, 상황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걸 얼마나 통찰력있게 분석할 수 있는 것이냐로 보인다. 그녀의 단편들이 너무 ‘인상’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인상적인 건 일상적이어서다. ‘소설을 읽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좀 전의 시간은 소설을 읽은 시간이 아니라 자궁병동 안의 여자들을 지켜보던 시간으로 기억하게 되는, 이런 느낌 말이다.  

자궁을 하나씩 달고 살았던 각자의 사연을 지닌 여자들이 병동이라는 한 공간에 모여서 그 차이에 부딪치고 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하는 연민과 연대에 저도 모르게 왈칵 안아 버리게 되는 순간, 그래서 이 단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그러니까 그랜트가 미스 쿡을 와락 안고 난 후 이어지는 이 문장. 
 
“그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렇게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 것은.
 서로 껴안고 붙들고 키스하고 밤이면 가까이 눕고 꿈에서 깨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팔을 더듬거나 손을 뻗을 수 있어서 “안아줘, 내가 꿈을 꾸었나 봐.”라고 말하는 세상."  
 
사는 건 어쨌든 사는 것에 계속 도움을 준다. 살면서 배우는 거니까. 그 과정은 아주 단순할 지도 모른다. 자기 세계가 다른 세계와 계속해서 만나는 것. 도리스 레싱은 삶의 무수한 풍경 중에서도 이런 만남을 볼 수 있는 일상, 흔하지만 집중해본 적이 없어 아주 독특해 보이는 짧은 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그려내고 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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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billy

2010. 9. 15. 00:30


                                                                             




보네거트, 제 5도살장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이것은 "생에 대한 열정이 없음에도 그런 대로 살아가게 해 주는 방법을 표현한 기도문", 이라고 보네거트는 말한다. 이 기도문은 검안사인 빌리 필그림의 진료실에 걸려 있다. 그는 미군으로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직전 그는 독일의 드레스덴에 포로로 잡혀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던 도시, 드레스덴이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모습을 본다. 그는 운이 좋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어쨌든 죽는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렇게 가는 거지'

빌리 필그림이 체험했고, 빌리 필그림을 창조한 보네거트가 직접 겪은 이야기. 너무나 재밌고 슬픈 반전(反戰) 소설이자 인생을 말하는 소설, 내겐 너무나 진리인 이 소설.  

왠지 웃긴 뭐한데도 너무 재밌는 상황과, 문장과 문장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엉뚱함에 실실대고 낄낄 거린다. 아이고 그런데 왜 이렇게 슬퍼? 주인공에 몰입할 심리묘사가 딱히 섬세한 것도, 전쟁을 겪는 주인공의 상황이 비극적으로 그려진 것도 아니다. 웃는 지 우는 지 모를 묘한 표정을 한 소설, 아무래도 나는 울고 싶은데 아무래도 울면 안 될 것 같은 기운에 책을 읽다, ‘작가가 선사하는 슬픔에 흠씬 젖어보라’ 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물이 뚝-.


음매 하는 울음소리에 아기 예수 잠이 깨요. 그래도 어린 주 예수 울지 않아요.

울 만한 일이 종종 있어도 거의 울지 않았던 빌리. 빌리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사람' (그래서 더욱 골똘해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 . 옆에서 대신 울어줄라치면 모나리자만큼이나 미묘한 미소를 슬쩍 던져버릴 사람. '우연이 허락해주어' 드레스덴 대공습 때 살아 남고 어찌저찌하여 결혼하고 꽤 돈도 벌고 자식도 낳으며 그럭저럭 살아간 사람.

그런 그에게 아무래도 비밀이 있으니 그건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처음 시간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했다.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라고 마르고 허약한 몸으로 전장을 헤매던 그에게 신이 내린 위로 같은 것. 과거, 현재, 미래 일직선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한데 모두 펼쳐진 과거현재미래를 여기저기 여행했던 사람, 전쟁터에 있다가도 미래 신혼생활의 침대 위로 옮겨 갔다가 느닷없이 과거의 갓난아기 때로 이동하곤 한다. 그래서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꼭 그 곳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사람. 또 하나 비밀은, 아마 지구인은 모르는, 아니 몇몇 지구인은 알지도 모르는,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의 생활. 외계인에게 납치된 그는 그곳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인간 동물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생활, 트랄파마도어의 삶.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은 빌리에게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그렇게 되도록 구조 지어져 있으니 전쟁도, 우주의 멸망도 피할 수 없다고. 그러니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라고’ 그리 권한다.

"트라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생의 행복한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불행한 순간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충고한다. 영원이란 놈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빌리에게 이와 같은 선택적 집중이 가능했더라면, 그는 마차 뒤꽁무니에서 햇볕을 듬뿍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그 순간을 생애에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택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빌리의 무기력함에, 트랄파마도어 외계인의 허무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태도에-, 나는 아아무런 반발심도 어어떤 얄미움도 들지 않는다. 이 모든 걸 다 받아들이고 오래오래 품으며 살겠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내게 온기가 있다면 뭔가를 세상에 피울 수도 있으려니, 그러려니, 그러면 충분한 것. 딱히 이 지구를 긍정하지도 특별히 내 삶에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살아가겠다. 다시 한 번 위의 기도문을 읊조리며, 그래서 내게 이 책은 더 없이 강한 반전(反戰) 소설, 나는 아니까, 빌리는 2차 세계대전의 현장에 있었다.

울 만한 일이 종종 있어도 거의 울지 않았던 빌리. 유일한 단 한 번의 울음. 드레스덴 폭격 이후 그는 마차 뒤꽁무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그러다 소리에 잠을 깬다. 눈 앞엔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인 부부, 그들은 마차에 매인 말들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을 느낄 정도로 말굽이 깨진대다, 갈증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빌리는 영어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즉시 영어로 말들의 상태를 두고 그를 꾸짖었다. 그들은 빌리에게 마차에서 내려 말들을 살펴보게 했다. 그 교통수단의 상태를 본 빌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 전쟁에서 다른 일로는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빌리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후 터진 울음. 그 때 나는 빌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정든 빌리에게.
싶지만,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쉽게 전할 수 없고, 섣부른 위로도 믿지도 않는 충고를 하고 싶지도 않다. 사실 내가 위로를 받고 싶은데 뭐라 타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늘 그랬다. 말을 나누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지구가 별로라는 것도 알 것 같다. 대신 나는 그가 낮잠을 자는 동안 어떤 꿈을 꾸었을까를 상상해 본다.

하나의 커다란 농담 같은 이 소설 안에 무심한 척 건네는 진담들. 그리하여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난 보네거트가 너무 좋다.

빌리와 포로들은 이리저리 다니다 가로수 길에 이르렀다. 나무들에 잎이 돋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아무런 통행도 없었다. 탈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말 두 마리가 끄는 버려진 마차였다. 마차는 녹색이었고 관처럼 생긴 것이었다.
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물었다. 
 
"짹짹?"  




  저 멀리 어디쯤에서 기저귀를 갈며 웃고 있을지도 모를 보네거트에게 경외를. 혹시 트랄파마도어에서 멋진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를 보네거트에게 사랑을. 아, 아무래도 평화로이 낮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다.    그에게 휴식을.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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