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아(존 버거)

인용 2016. 9. 6. 21:19

영국인이 말주변이 없다는 것은 많은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청교도주의나 소극적인 국민성 등으로 이를 설명하곤 한다. 그런 설명은 더 심각한 사태를 가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영국의 노동계급이나 중산계급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전반적인 문화적 황폐화의 결과로 말주변이 없게 되어 버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사고(思考)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해 버렸다. 
그들은 경험을 보다 분명히 밝혀 줄 말을 찾을 때 참고할 수 있는 그런 예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속담의 형태로 구전되던 전통들은 오래 전에 파괴되어 버렸고, 또한 엄격히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문맹이 아니라고 해도, 글로 남겨진 문화적 유산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일반적 문화라 함은 거기에 비춰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적어도 자신의 모습 중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한다. 문화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훨씬 적게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들의 경험 중 많은 부분 ㅡ 특히 감정적이거나 내재적인 경험ㅡ은 그들 자신에게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결국 그들의 주된 자기표현 방식은 행위를 통한 것이다. 이것이 영국 사람들이 '직접 해보기(DIY)' 취미에 그렇게 많이 매달리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때 정원이나 작업대는 만족스러운 자기반성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무엇이 된다.
가장 쉬운ㅡ그리고 가끔은 유일하게 가능한ㅡ 대화의 형식은 행위와 관련된 혹은 행위를 묘사하는 대화이다. 말하자면 행위가 하나의 기술이나 과정으로 여겨지는 상황이다. 그때 이야기되는 것은 말하는 이의 경험이 아니라 완전히 외적인 메커니즘 혹은 사태ㅡ자동차의 엔진이라든지, 축구 경기, 배수로 혹은 위원회의 운영 등ㅡ다. 이런 주제들, 개인적인 부분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는 이런 주제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스물다섯 살 이상 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대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더 어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의 욕망이 가지는 힘 덕택에 이러한 탈인격화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대화에는 따뜻함이 있고, 거기서 우정이 생겨나 계속 유지될 수도 있다. 대화의 주제 자체가 가지는 복잡함 덕택에 대화자들이 가까워질 수 있다. 마치 대화자들이 주제 자체의 아주 작은 세부까지 철저히 살피기 위해 서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 과정에서 손을 마주잡는 것만 같다. 그들이 교환하는 전문가적인 의견이 곧 공통의 경험을 상징하게 된다. 이미 죽어 버렸거나 지금 함께 하지 않는 친구를 생각할 때, 남은 친구들은 항상 전륜구동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던 그 친구의 설명을 생각한다.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그 설명은 이제 그들 사이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p.107-108 

-『행운아』,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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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있었던 일인지는 기억이 안 나…… 거기가 어디였는지…… 한번은 헛간에 부상자들이 200명 가까이 꽉 찼는데, 위생병은 딱 나 혼자였어. 전쟁터에서 부상자들이 생기는 대로 곧장 헛간으로 데려오다보니 그렇게 많아졌던 거지. 마을 이름은 잊어버렸어…… 그후로 몇 년이나 흘렀는지도 모르겠고…… 꽉 나흘을 잠 한숨 못 자고 잠깐 앉을 새도 없이 뛰어다녔던 것만 기억나. 그 많은 부상자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불러댔지. ‘간호병! 간호병! 제발, 도와줘요!’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한번은 발이 걸려 넘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지 뭐야. ‘조용! 명령이다. 모두 조용히 한다!’라는 고함소리에 잠이 깼지. 지휘관인 젊은 중위였어. 역시 부상당해 들어온 그 중위가 다치지 않은 옆구리로 반쯤 몸을 일으켜 소리치고 있더라고. 중위는 내가 쓰러질 지경이라는 걸 안 거야.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명령이고 뭐고 당장 죽을 것 같은데. ‘간호병! 간호병!’ 부상병들은 계속 나를 불러댔어. 나는 벌떡 일어나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른 채 뛰어다녔지. 그리고 그때 전선에 온 이후 처음으로 울고 말았어.

그리고…… 사실 사람은 자기도 자기 마음을 모를 때가 많아. 한번은 겨울에 우리 부대 옆으로 독일군 포로 행렬이 지나갔어. 포로들은 찢어진 옷으로 머리를 싸매고, 불에 타 구멍이 숭숭 뚫린 외투만 걸친 채 우위에 꽁꽁 얼어 있었어. 그때 날이 얼마나 춥던지 날아가던 새가 다 떨어질 정도였지. 새들이 날다가 그대로 얼어 죽은 거야. 그 행렬 속에 병사 하나가 가는데…… 어린 남자애였어…… 울었는지 뺨에 눈물 자국이 얼어 있더라고…… 그때 마침 나는 손수레에 빵을 담아 식당으로 가져가던 중이었어. 그 아이가 빵수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거야. 옆에 있는 나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지 수레만 뚫어져라 바라봤지. 빵이다…… 빵…… 나는 큰 빵 하나를 집어들어 좀 떼어서 그 아이에게 줬어. 아이가 받긴 받는데…… 어리둥절한 것 같았어.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 그래, 믿을 수가 없었겠지. 

냐는 행복했어…… 내가 다른 누군가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뻤어. 그리고 그런 나 자신에게 스스로도 많이 놀랐지……” 

-나탈리야 이바노브나 세르게예바, 사병, 위생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p.156-157,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속으로 읽다가도 인용의 마지막에 사람 이름이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밖으로 소리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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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

인용 2016. 8. 23. 11:43

1. “저는 영화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부분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아주 높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밥을 먹는 모습, 길을 걸어가는 모습, 거리의 분위기 등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기 떄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산에 오셔서 길을 걷다 어시장의 한 아주머니를 보게 된 경우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장갑을 낀 아주머니께서 생선을 손질하는 모습과 밥을 먹는 모습을 볼 때, 그 분이 말 한 마디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분의 일상과 인생이 어떠할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영화가 지닌 신기한 매력일 것입니다. ”

2. 정한석: 감독님은 누구보다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정서를 표현하는데 능한 연출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인물들을 세워놓고 그들의 언어를 빌어서 기억을 끌어내거나, 혹은 그로써 이것이 조정된 다큐멘터리임을 밝히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아장커: 누군가를 영화화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미세한 신체의 움직임이나 표정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그의 감정상태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24 시티>는 바로 연기자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 표정의 변화 하나를 통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아주 미미한 감정특징을 포착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만든 영화입니다. 예를 들어 <24 시티>에서 천총(陳冲)은 의자에 읹아서 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움직이며 다른 자세를 취합니다. 이런 동작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복잡하면서도 제한된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반 영화에서는 이러한 인물의 미세한 내적 감정의 표현에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3. 카메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초상을 찍는다. 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순간은 그들이 했던 말의 일부를 카메라가 생각할 때다. 그렇다. 생각하는 카메라다. 카메라 앞에 서 있던 노동자가 실수로 시선을 던질 떄 카메라는 그들의 응시를 받아주는 무언가이며 동시에 그들이 말하지 못하거나 보여주지 못한 것을 스스로 생각할 떄에도 역시 그 무언가이다. 한 사람씩 말이 끝날 때마다 자막으로 그들이 했던 말 또는 하지 않았으나 그들을 기억할 만한 말들이 화면에 문자로 떠오를 떄 과연 그건 누구의 상념일까. 그건 이미 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생명을 갖춰 버린 카메라 자체의 상념이며 이떄 <24시티>는 정신과 기억을 갖춘 자율적인 생명이 된다. 인민의 곁에서 인민과 하나가 되려는 카메라, 그렇게 하여 또 하나의 인민이 되려는 영화. <24시티>는 지아장커의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카메라에 정신과 기억이 배어 있는 가장 복잡하고 숭고한 생명체의 영화가 된다. 이것이 지아장커가 현재에 오른 위대한 봉우리다. 

4. 그는 <스틸 라이프>와 <동>을 완성한 직후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사회적인 자리에서 사람을 보았다면 이제 나는 그것을 생명이라는 각도에서 보게 됐습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 사회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지아장커 -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정한석 지음, 인출연.예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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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적인 것(이정빈)

인용 2016. 5. 25. 17:04

물론 이 글은, 이제까지 사례로 든 디자인 리서치나 아티스틱 리서치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미래의 예술 형태를 섣부르게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 디자인 리서치나 아티스틱 리서치의 사례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긴요한 점은 프리프로덕션의 일부로 취급되어 온 기존의 리서치 개념보다 확장된 대문자 R로서 리서치(Research)이다. 이러한 리서치가 연구 수행 과정 즉, 하나의 예술 작품에 직접 관련하며 몸을 통해 얻어진 감각적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면 이에 관한 비평 역시 감각을 바탕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대문자 R로서의 리서치가 가진 인식론적 의미는 암묵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과학철학자 마이클 폴라니는 암묵적 지식 논의를 토대로 인간의 몸속에 있는 지식, 명제화되어 있지 않은 지식과 창의성의 발현을 논한 바 있다. 암묵적 지식이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외의 행위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현상의 요인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 암묵적 지식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 몸 안에 잠복한 감각을 통해 외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이며 또한 상상력과 창발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구자나 예술가들이 지닌 몸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영상ㅡ미술작가의 영상 작품, 영화, 다큐멘터리 등 모든 장르를 포함한ㅡ을 암묵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발언하고 있는 내용에 관해서가 아니라, 등장하는 세계 내 인간과 자연의 마찰, 다시 말해, 내용을 떠받치는 과정 자체가 암묵적이기 때문이다.

미술이나 영화에 선 그어진 매체 특정적 분류는 영상에 의해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예술의 각 영토나 장르에 대한 명시적 접근이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감각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감각은 암묵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수용하려는 태도와 그것을 비평하고 전달하기 위해 언어와 비언어적 표상의 종합과 배열을 확장하는 실험에서 비롯할 것이다. 암묵적 지식은 문제는 해결하는 데 발휘할 수 있는 감각적 능력이다. 아직까지는 불확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를 파악함으로써 종국에 발견될 인식의 범위는 더욱 확장될 수 있다. 미술작가들과 영화감독들의 리서치에서 카메라에 담긴 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든 설령 우발적으로 포착된 것이든 간에 살아 있는 사람의 암묵지와 현상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풍경이다.

소문자 r로서의 리서치(research)가 아닌, 대문자 R로서의 리서치(Research)는 연구를 위한 자료 수집보다 더 넓은 의미로서, 현상에 관한 여러 가지 감각들을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해 조사하고 배치해 내는 방식이다. 도래할 영화가 전해 줄 활력은 한 화면 안에 다양한 미디어의 요소들이 자유롭게 놓일 때 발생할 것이다. “과학 그 자체는 이론이 아닌, 과학자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할 때 직면하는 문제를 파악하는 경험”이라는 폴라니의 말에서 과학을 예술로 바꾸어 다시 적는다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은 불확정적이고 암묵적인 인간의 감각과 현실 인식에 관한 R로서의 리서치(Research)이다. 


이정빈, 대문자 R로서의 Research <OKULO 0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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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는 봄의 등뒤에 대고 지껄이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볍고 투명한 '소란들'을 반쯤 접힌 귀로 무심히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소란은 누군가의 등뒤에서 잔잔해지기도, 어여뻐지기도 합니다. 


앞은 부끄럽습니다. 

등을 보고 있을 때가 좋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먹는데, 하루살이가 음식에 날아들었습니다. 케이크 주변을 맴돌아서 손을 휘저어 쫓아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약이 올라 포크를 휘두르며 좀더 공격적으로 대처했습니다. 하루살이는 포크를 피해 케이크와 접시 위에 번갈아 앉으며 수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안 되겠어서 휴지로 잡아보려고(죽여보려고), 적극적으로 손을 움직였습니다. 

급기야 하루살이가 접시 아래로 숨어버렸고, 휴지를 움켜쥔 저는 접시를 번쩍 들어올렸는데! 접시 위에 있던 포크 두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이 광경이 무척 우습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하루살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살이는 얼이 빠진 제 표정을 바라보더니,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미소를 흘리며' 사라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일화에 '가벼운 소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혼자 커피를 마실 때마다 생각할 것입니다. 작은 것과 싸울 때조차 포크를 휘두르던 제 모습이 떠올라 멋쩍게 웃을 것입니다. 


이 일이 '오늘 겪은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모든 소란은 결국 뭐라도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하루살이의 미소 같은 것.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騷亂은

우리의 소란巢卵이 될 테니까요. 


-『소란』 중에서, 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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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팔다리가 쉽게 움직이는 것은 그 움직임이 공간과 물질세계에 투명하게 맞아들어가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윤리적 태도는 사회적 행위의 효율을 높이고 사회관계를 보장하는 궁극의 필수조건이다. 법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것이 반드시 쉽게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들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희망은 윤리적 투명성을 잃지 않는 사회 질서 속에 사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사람이 존재의 투명성에 접하기를 원하는 것에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윤리에 관련하여 칸트는 하늘에는 별들이 있고 마음에는 도덕률이 있다고 했거니와, 여기에서 도덕률과 별들의 병치는 도덕규범의 엄존(儼存)을 비유로 말하려 한 것이기도 하지만, 둘을 이어주고 있는 존재론적 바탕 ㅡ 그 투명한 바탕에 대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말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김우창, 『성찰: 시대의 흐름에 서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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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인용 2016. 1. 24. 23:00

 

1,

아득한 현실에 대한 비난과 미래에 대한 냉소

-조성주, “오늘도 우리의 역사가 된다”, 경향신문

 

2.

일찍이 게으르크 루카치는 “하나의 독자적이고 완전한 삶에 대해 독자적이고 완벽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에세이는 예술과 대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에세이란 삶을 전달하기 위해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추구하려는 예술적 열망의 사물인 것이다. _이도훈, “김응수의 에세이 영화들에 대한 단상” 중에서, 『비평전문지 독립영화』 45호

 

3.

80년대에 태어나 88올림픽을 지켜보며 자랐던 우리는 <88만 원 세대>라는 낙인 아래, 어떠한 시대적 기억을 공유하며 공동체를 열망하는 ‘발성법’을 획득할 수 있을까." <88작업노트 中)

 

3-1.

나치의 집권이 임박할 무렵, 발터 벤야민은 베를린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글의 서문에서 벤야민은 “강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이미지들-유년시절의 이미지들”을 의도적으로 불러내되 그 노스탤지어적 이미지들이 가져올 “동경의 감정”을 "억제하려 애썼다"고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해내고자 했으며, 이렇게 불려 나온 이미지들이 "미래의 역사적 경험을 미리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전시 “88”에서 <논픽션 다이어리>로 이어지는 한국의 90년대에 대한 정윤석의 기획 역시 벤야민의 그것과 닮아있다. 얼핏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그가 택한 지존파 사건→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사회학적 조사나 보고서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픽션 다이어리>가 획득하고 있는 역사성과 시의적절성은, 감독 스스로의 청소년이기도 한 90년대에 대한 탐색의 과정(전시 “88”에서의 시도)이 없었다면 얻기 힘든 성과였을 것이다. _권은혜, “<논픽션 다이어리> 작품론”, 『비평전문지 독립영화』 44호

4.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실의 전부인 사람들을 사진으로 어떻게 풀어낼지 정말 막막하지요. 험한 산을 들었다 놨던 기운을 보여 주고 싶은데, 얼굴이 드러나면 남루하거나 너무 목가적으로 비춰질까봐 그건 싫고 뭘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_한금선

 

4-1.

타자에게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스스로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굳이 마음 속 온도와 작업의 온도가 같을 필요가 있을까. 같은 온도를 유지하는 분들에 대한 찬사와 존경은 필요하지만, 까뮈의 산문 『안과 겉』처럼 안과 겉이 다름을 인정한 상태에서 게임을 벌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안은 무엇이며, 밖은 또 무엇인가, 그 둘은 어떻게 교통하는가. _노순택


4-2.

예전에는 현장에서의 내 마음을 최대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나 가감 없이 보여 준다는 게 사실은 불가능하잖아요. 그 불가능을 인정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렇다면 내 마음의 온도는 알겠으나 작품의 온도는 어느 정도에 맞춰야 하나 고민을 하는 거죠. 말하려는 방식이 바뀌니까 찍는 방식도 바뀐 것 같아요. _노순택


4-3.

사진은 이미 수단을 다 깔고 있잖아요. 특히 사람을 찍을 때 장면이나 상황을 수단으로 삼는 게 전제가 되는 거지요. 직업 속에 적게 혹은 많게 드러나느냐의 차이일 뿐. 그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대상을 수단으로 대하고 있는 속물임을 인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속물임을 부인하면 발언의 수위, 행동의 반경이 너무 협소해지는 거잖아요. _노순택


4-4.

존 버거를 좋아해요. 그의 글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지닌 온도도 감탄스럽고. 따뜻하고 이성적이면서도 너무나도 냉정하게 찌르잖아요. 보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는 얘기도 의미 있고. 말하기와 보는 것에 방법이 있다면 보여 주는 것에도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고민을 던져 주죠. 사실 보여 주기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건 쉽지만, 도대체 그 방법이 무언지를 터득하는 것은 쉽지 않잖아요. 아무리 주제가 좋다고 해도 보여 주는 게 너무 단순하고, 인식의 확장이나 시각의 확장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은 실패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_노순택


4-5.

노순택의 관심사는 이렇듯 국가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국가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천태만상의 행동 양상을 띠는가에 맞닿아 있다. _송수정

 

_송수정,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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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내 인생의 책

: 봉인된 시간(타르코프스키)


삶을 아름답게 할 시간의 재창조


“일주일 동안 나는 당신의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습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진정한 삶을 산다는 것, 진정한 예술가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한 여성 노동자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 보낸 편지의 일부다. 영화라는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내게도 그런 것이다.

<봉인된 시간>은 부분적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연출노트이면서 영화와 예술 전반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사고와 통찰을 보여주는 유례없는 책이다. 사실 대개의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미학을 글로써 말하기보다는 영화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의 작업환경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내내 당국과 마찰을 빚어야 했고, 실제로 작품과 작품 사이에 ‘고통스럽고 긴 휴식’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 ‘강요된 휴식’ 속에서 그는 영화 창작 과정에서 추구하는 목적을 숙고했고, <봉인된 시간>은 그 산물이다.

그가 말하는 영화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다. 영화의 순간들을 창조, 구성하는 데 있어서 그가 유난히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 이상이다. 그 윤리학의 미적 실천을 위해서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시적, 혹은 정서적 연결이다. 그는 이런 순간을 포착하고자 한다. “(…)사형수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무리 중의 한 명이 무리에서 벗어나 구멍투성이의 양말을 신은 채 한참을 물구덩이 속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일분이 지나면 전혀 필요가 없게 될 자기 외투와 장화를 내려놓을 마른 땅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서 이보다 더 격렬한 순간은 많지 않다.





내가 무얼 찾고 있는 건지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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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윤동주)

인용 2015. 9. 3. 00:20

 

어쩌다 읽은 윤동주 시집인데 너무 좋다.

평생 ‘서시’, ‘자화상’과 ‘별 헤는 밤’으로 기억하고 말았을 지도 몰랐을 시인의 시들이기에 더욱 감탄이 난다. 그렇게 감탄하고 다시 읽는 ‘서시’, ‘자화상’과 ‘별 헤는 밤’은 더욱 좋다. 어떻게 나는 더 이상은 교과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를 읽을 수 있게 된 걸까. 다행이다.  

 

 

 

아침

 

윤동주

 

휙, 휙, 휙

소꼬리가 부드러운 채찍질로

어둠을 쫓아

캄, 캄, 어둠이 깊다깊다 밝으오.

 

이제 이 동리의 아침이

풀살 오른 소엉덩이처럼 푸르오.

이 동리 콩죽 먹은 사람들이

담물을 뿌려 이 여름을 길렀소.

잎, 잎, 풀잎마다 땀방울이 맺혔고.

 

구김살 없는 이 아침을

심호흡하오, 또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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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diction

인용 2015. 3. 30. 02:34





최근 산 시집 <철과 오크>의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망원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익사체로 남은 천사들이 한강으로 날아와

성산대교니 행성이니 하는 것들을 부수고 있었다

멋진 광경이었다

 

이미지가 지루해지면 집으로 왔다

 

 

-

시와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깊이 읽고 듣지도 못했지만

이것들이 그것 아니라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기쁨을 준다는 것은 알겠다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있으면 좋을 기쁨이 아니라

없으면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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