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98건

  1. 2015.01.25 진심, 합의, 질문
  2. 2014.12.13 병원
  3. 2014.11.09 살핀다. 3
  4. 2014.06.10 제철 과일만 잘 챙겨 먹어도,
  5. 2014.06.07 세월
  6. 2014.06.07 다나하시
  7. 2014.06.07 이젠 거기에 없다
  8. 2014.05.26 우리 누나 줄라고 2
  9. 2014.03.17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2
  10. 2014.03.10 아무도 없기를,

진심, 합의, 질문

일상 2015. 1. 25. 12:40


엄마가 내 삶을 존중해 준다면 난 훨씬 기쁘게 살아갈 텐데, 그렇다는 내 말을 엄마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전화를 건 엄마는 꽤 오랜만에 딸에 대한 푸념, 걱정, 비난을 섞어 풀어 놓았고(당신이 던지는 화살이 온전히 나를 향해 있지 않다는 걸 이젠 안다), 난 진지함 반 건성 반으로 반응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벼락같이 따져 물었다.
“그래 너는 사는 게 재밌나.”

본능적으로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기에 바로 “응. 재밌다.”고 답했고,  

“그래 그러면 됐다. 재밌으면 됐다.”며 내 성의 없는 대답에, 엄마는 진심으로 답했다. 진심을 느꼈다.
엄마의 체념과 안심이 뒤섞인 그 말에 조금 미안했고, 조금 더 고마웠다.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에 나 역시 안심했다. 그래도 아직은 엄마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노력해보고 싶은 거다 어쨌든 내 방식으로. 
그리고 사는 게 재밌느냐는 질문이 꽤 많이 다른 당신과 나의 합의점일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이제는 사는 게 재밌다고 쉽게 답할 수 없고, 어떻게 고민해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세상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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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일상 2014. 12. 13. 01:32

병원의 외래실. 비어 있는 두 진료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대기좌석엔 남녀가 붙어 앉아 휴대폰을 함께 보고 있다. 그 앞엔 데스크 주위를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남녀에게 말을 걸더니 답을 들은 건지 외면당한 건지 다시 데스크 앞을 계속해서 걸어 다닌다. 데스크에 여간호사가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다가가 접수증을 내민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예약을 확인해 달라는 말에 그녀는 주치의가 누군지를 묻는다. 톤이 좀 올라간 목소리로 남자는, 그러니까 주치의를 확인해달라, 고 한다. 등록번호를 컴퓨터에 두드려넣은 간호사가 이름 하나를 일러 준다. 남자는 뭐라고? 라고 되묻고 간호사는 또박또박 다시 이름을 불러 준다. 남자는 갑자기 한 손을 오른쪽 머리 위에 갖다 대더니 잠시 얼굴을 찡그린 채로 있다. 남자는 털모자를 쓰고 있고 그 털모자에 반쯤 가려진 반창고가 보인다. 남자는 소리를 지른다. 왜 데스크에 간호사가 아무도 없었느냐고. 눈이 커진 간호사는 지금 오지 않았느냐고 답하고는, 억울한지 약간 메인 목소리로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라고 말한다. 간호사에게 더 바짝 다가선 남자는 병원이라는 곳에서 환자가 기다리는데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냐고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그런 그를 잠시 빤히 쳐다본 간호사는 한숨을 푹 쉰다. 저희도 밥을 먹어야 할 것 아니에요, 라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하고, 뭐 이딴 곳이 다 있어! 라고 소리친 남자는 여전히 그의 머리에서 손을 계속 떼지 못하고 있다. 다시 접수증을 뺏어 든 남자가 털모자를 반쯤 벗었다가 다시 눌러 쓰며 좌석으로 가 털썩 앉는다. (201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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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핀다.

일상 2014. 11. 9. 02:41

 

꿈을 꾸었는데, 옛날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옛날에 가까이 했던 사람들, 그때 그 시절 소중했던 사람들. 막 눈을 떴을 땐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조차 몰랐고, 그저 꿈에 눌려 배어나온 어떤 기운에 압도당한 채 부신 창문만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거리에 내팽겨친 듯한 짐들을, 각자 맡은 바가 있는 듯 신중하고 열심히 닦고 분류하며 상자에 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앞에 한 사람, 고개를 돌리니 또 한 사람,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반가워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하려 애썼다. 반가운 마음이 넘쳐흘러 벅찼다. 하지만 내 마음은 상대에게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공간만을 진동시키는 듯 했다. 이곳이 허물어질 것 같았다.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잘 지내냐느냐고 물으며 얼굴 표정을 살폈다. 후회를 인정하면 내일 죽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을 안다. 후회되는 게 너무 많다고 고쳐 말한 사람을 안다. 아름다운 꿈이었다. 일순간일지라도 오직 한가지 감정으로 꽉 채워진 기분은 오래도록 남아 황홀하다. 꿈일지라도. 소중한 걸 매번 허물어뜨리며 지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폐허 속에서 기어코 기어나오는 것만을 수습해가며,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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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다큐 <그가 없는 8월이>엔 이런 장면이 있다.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을 아는 주인공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좋아하는 감을 더듬거리며 깎아선 성글게 집어 먹으며 이런 말을 한다. “제철 과일만 잘 챙겨 먹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대.”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여워서일 수도 있고, 가여우니까 애틋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약한 자가 부리는 소박한 의욕이 내 몸과 마음을 덥힌다. 이 열기 때문에 뭐라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붙잡고 싶은 조건들을 찾는다. 제철이나 과일 같은 것, 제철 과일 같은 것. 그냥 제철 과일. 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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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일상 2014. 6. 7. 03:00


제사상에 깔 창호지가 한 장도 남아있질 않다는 걸 깨달은 건 제사를 지내기 삼십 분 전, 이런 휴일에 열려 있는 문구점은 없을 거라 짐작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리나케 밖을 나섰다.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주 추운 설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상가를 다 돌아다녀도 문 열린 데가 없어서 큰 길까지 나갔다. 편의점에라도 가 볼 참이었다. 그때 저 멀리 옅은 분홍색의, 아마도 낡고 헤져서 그리 된, 잠바가 보였다. 할머니였다. 아니 대체 언제 외출하신 거지. 아침 내내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신 줄도 몰랐다. 새삼 알았다. 우리 할머니 몸집이 저리 작으시구나.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채 구부정한 몸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할머니!” 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걸음을 멈추시더니 한쪽 팔로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펴시는 게 보였다. 난 후다닥 달려가선 이렇게 추운 데 왜 나왔느냐고 했다. 별 대답을 않으셨다. 난 창호지를 빨리 구해야 했기에 내가 지금 뭘 사야 한다고 대충 말하곤 가던 길을 뛰어갔다. 예상대로 창호지를 구할 순 없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는데 아까 그 자리에 할머니가 아직도 서 계신 게 보였다. “할머니!” 난 달려갔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왜 아직 안 들어 가셨냐고 채근하니 별말도 않으셨다. 할머니 코에서 콧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그러고 뒤늦게 “저리로 한바꾸를 돌았다.” 라고 하셨다. 아휴 빨리 들어가요, 하면서 난 할머니를 뒤에 두고 앞장서 걸었다. 그 순간에도 난 할머니와 같이 걷고 있다는 당장의 상황보다 혼자 제사상을 차리고 있을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몇 걸음을 빠르게 걸어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빠르게 땅을 짚는 지팡이와 뒤이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잠시 걸음을 늦췄다가 뒤돌아 보았다. 할머니는 지팡이로 앞을 가리키며, 어여 가자, 고 했다. 예, 하며 난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난 할머니께 죄송스럽다기보다 순식간에 빨라진 지팡이와 발걸음 소리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에 참지 못하고 또다시 빨리 걸어 보았다. 다시금 후다닥 지팡이 짚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났다. 앞서 걸으며 소리 없이 내내 웃었다. 귀여운 할머니. 할머니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그런 생각과 고민거리들을 안고 살까. 아니면 나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일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하며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2012. 01. 26)


 

어버이날이라서 연락했어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보낸 문자. 정작 내용은 없는 문자였다. 이 문자에 아버진 대답은 않고 “할머니한테 자주 연락하라”고 답장이 왔다. 나는 더 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도 오랫동안 할머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산다고 말해버려도 될 만큼 행동도 말도 무심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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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하시

일상 2014. 6. 7. 02:48

짙게 분칠한 하얀 얼굴, 까만 단발머리, 노란 저고리, 빨간 치마. 그리고 검은 옷고름. 그녀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작지만 한복 안엔 살집이 꽤 숨겨져 있다.

그녀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잠시 정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와라오우!” 웃으라는 일본어가 들리고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 웃는다.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입술을 한껏 올린다. 얼굴에 자글해지는 주름. 오십 대 후반의 여자. ‘김치-’ 라는 어색한 한국어가 들리고, 김치- 다나하시 에리코. 어디선가 부르는 그녀의 이름이 들린다. 찰칵. 

갑자기 한복을 입은 일본 중년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슬로우 모션으로, 그녀 주위로 몰려 들어와 살짝 분주하게, 이내 준비된 자세를 빠르게 취하고 동시에, 김치- 한다. 찰칵.  (2012. 01. 15)

 

 

 

지하철에서 실종자를 찾는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일본의 한 주부. 한국 연예인을 보러 이곳에 왔다가 실종됐다고 한다. 그 모습과 이름이 내내 맴도는 와중, 함께 떠올랐던 이미지들.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생사에 관한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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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거기에 없다

일상 2014. 6. 7. 02:33
 
여기는 내가 늘 오는 선술집이다. 밤에 골목을 배회하다 우연히 찾았는데 멀리서 보이던 따스한 주황빛이 참 좋았다. 불빛을 따라온 이곳은 간판도 없이 주택집들 사이에 아주 작은 공간 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올 때마다 너댓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밖까지 배어나오진 않았다. 가게 앞엔 내가 앞다리를 높이 뻗은 것의 두 배는 될 법한 나무 상자들이 쌓여 있다. 난 항상 나무상자 꼭대기에 올라 술집 안을 구경한다. 나무상자는 꽤 널찍해서 내 큰 엉덩이가 앉기에 불편함이 없다. 사람이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늘 가게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밖으로 나와선 내 옆에다 생선을 주곤 했는데 내가 먹을 것 때문에 이곳을 찾는 건 아니었지만, 물론 먹긴 했어도, 어쨌든 나를 홀리는 건 이 안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좋다. 나는 들을 수 있다. 내가 당신들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도 들을 수 있단 걸 알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내 표정을 인간들이 보지는 못 할테니 아마 한 번씩 창밖의 나를 보며 고양이다, 귀엽다, 배가 고픈 걸까, 정도의 대화 안줏거리로 삼겠지만 말이다. 나는 안다. 여기는 숨길 것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걸.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이였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연인들. 나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고 또 슬프다. 낮에 좀 먼 데까지 나가 돌아다니다가도 어디 누워 낮잠을 자다가도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늘 새로웠다. 밤마다 나는 홀린 듯 이 술집 앞을 찾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이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슬픈 이야기를 매일매일 듣는다. (2012. 0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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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나 줄라고

일상 2014. 5. 2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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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속에서 너는 정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꿈틀거리던 모습을 기억한 순간, 불덩어리가 명치를 박은 것같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쉬려고 너는 평소의 정대를 생각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정대를 생각했다. 여태 초등학생같이 키가 안 자란 정대. 그래서 정미 누나가 빠듯한 형편에도 우유를 배달시켜 먹이는 정대. 정미 누나와 친남매가 맞나 싶게 못생긴 정대. 단춧구멍 같은 눈에 콧잔등이 번번한 정대. 그런데도 귀염성이 있어서, 그 코를 찡그리며 웃는 모습만으로 누구든 웃겨버리는 정대. 소풍날 장기자랑에선 복어같이 뺨을 부풀리며 디스코를 춰서, 무서운 담임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한 정대. 공부보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정대. 누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고 입시 준비를 하는 정대. 누나 몰래 신문 수금 일을 하는 정대. 초겨울부터 볼이 빨갛게 트고 손등에 흉한 사마귀가 돋는 정대. 너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칠 때, 제가 무슨 국가 대표라고 스매싱만 하는 정대.

천연스럽게 칠판지우개를 책가방에 담던 정대. 이건 뭣하러 가져가? 우리 누나 줄라고. 너희 누난 이걸 뭐에다 쓰게? 글쎄, 이게 자꾸 생각난대. 중학교 다닐 때 공부보다 주번이 더 재미있었다지 뭐냐? 한번은 만우절이라고 애들이 칠판 가득 글자를 써놨더래. 총각 선생이 지우느라 고생할 줄 알았더니, 주번 누구냐고 호통을 쳐서 누나가 나가서 열심히 지웠대. 다들 수업하는데 혼자 복도에서 창문 열어놓고 이걸 막대기로 탁탁 털었대. 중학교 이년 다닌 것 중에, 희한하게 그때가 제일 생각난다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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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 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쉬는 일요일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법 강의를 듣던 그녀는, 자신이 배운 것을 빼곡히 노트에 정리해와 소모임에서 강의했다. 한자 공부를 할 거란 성희 언니의 말에 당신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모임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 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 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처럼 상냥하고 낭랑했다.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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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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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떤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떄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차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알람 없이 새벽의 희미한 햇살로 잠을 깨는데 익숙해질 즈음, 그렇게 깨고도 한참이나 가만히 누워 있는 걸 즐기게 된 여행의 날들하고도 어느 아침, 이 시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었었다. 중얼중얼 조그맣게 소리내어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고 겨우 마저 읽었을 즈음엔 이미 코가 꽉 막혀있었다. 침낭으로 다시 깊숙이 들어가 얼굴을 파묻고 마저 펑펑 울었다. 여행의 허세였을 법도 한데, 아마 그때부터인가, 이 시를 읽으면,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특히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에 오면 앞서 얼굴을 뱅글뱅글 돌던 눈물이 코끝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나를 나이게 하는 무수한 것들이 이 말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내가 그러하지 않으려 해도. 그리고 숱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까지. 비슷하게 그러할 거라는, 꿈꾸어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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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기를,

일상 2014. 3. 10.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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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 사는 동물들을 돌보는 교육을 받았고, 난 이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일을 책임지고 하게 될 참이었다. 관리자가 짐을 넣을 가방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는데 그 가방을 손에 받아들자 난 문득 지금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고 마음 먹었다. 꿈이었다. 함께 있던 무리엔 낯선 이도 있었고, 동창도 있었고, 내 동생도 있었고, 동물들도 있었다. 상기할수록 난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었고 꿈 속 이야기는 신비로웠다, 물론 이런 생각을 꿈 속에서도 했더라면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나는 어렵지않게 돌아서 나갔다. 등을 보이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만 돌리곤 그만하겠다고 말하고,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꿈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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