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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1 꺼끌거림 (2)
  2. 2010.02.24 의미의 떨림

꺼끌거림

일상 2010.03.01 04:51


#경계도시2 단상 

대한민국 레드콤플렉스 문제는 그렇다치고,

계속해서 송두율 교수를 지칭하고자 하는 그 '경계인'이라는 단어 말이다. 다큐 속에서 보여준 그 사건을 보다보니 그 경계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가 싶었다. 경계인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사회도 문제지만 경계인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이 들었다. 경계에서 피는 꽃,을 상상하긴 한다만 경계가 있긴 있는 걸까 싶은. 아니면, 경계라는 것의 순수성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문제인 걸까. 아니, 그렇다면 경계는 없다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런 고민을 한다고 해도, 경계는 있고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다고 믿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도 싶다. 또 강박적으로 순수한 게 경계가 아니라 얼룩지고 희미한 것이 경계이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아야겠지.  
 


이 다큐 이후에 본 의형제.

<경계도시> 다큐와 <의형제>를 본 이후, 계속 남아있는 꺼끌거림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개운해지지는 않다. 또 다른 사건들을 만나봐야만 잘 정리될 것 같다.

어쨌든.
의형제가 이념의 대립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라는 호평이 자자하다. 여러모로 영화가 좋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켕기는 아쉬움이 있었다.
극 중 간첩인 서지원, "나는 어떤 이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구도 배신하지 않으려 했을 뿐 그저 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다고 말하는 이 인물이", 난 오히려 되게 뻔하고 (대안이라기보다) 안일한 설정 같았다. 그리고 어떠한 강박증이 불편하게 다가왔는데, 그건 '나는 무슨 주의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닌 가족과의 행복이 더 중요한 평범한 개인일 뿐' / 이 '뿐' 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왜굳이강조?', 손사래치며 한발자국 물러나는 이미지.

이념을 넘어서, 라는 말은 좋은데 그 이념을 넘어선 자리를 이미 꿰차고 있는 건 뭘까. 이념 없는 것이 제일 강한 이념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개인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식의 문장이 나는 꺼림칙하다. 근현대사를 공부할 때 습관처럼 되게 쉽게 쓰는 말이지 않은가. 그게 하나의 진실이라는 걸 알지만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죄없음'을 '인정'해주는 듯한 뉘앙스로 보여서다. 아 이념좀있으면뭐어때 무슨주의있으면어때 그렇게 말하고 싶다. 개인 앞에 저러한 수식어를 꼭 왜 적어야만 하는걸까. 내가 일상생활에서도 느끼는 문젠데, 어떠한 대화를 오고 가다보면, 아 제가 무슨 주의를 갖고 있는 건 아니고요, 라고 덧붙일 때가 있다. 나 역시 이런 말을 가끔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말의 끝자락에 밟히는 미묘한 수치심이 있다. 변명 혹은 방어처럼 이런 말을 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실,이 아니라 강박적인 방어가 되는 듯한 기분이 싫다. 그러니까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결국은 송두율 교수 사건의 문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의미의 떨림

일상 2010.02.24 01:44

의미의 떨림 Le frisson du sens

그의 일 전부가 기호의 도덕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도덕성'은 '도덕'과 다르다). 도덕성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테마인 의미의 떨림은 두 종류의 위치에 나타난다. 제1의 상태는 '자연스러움'이 동요하기 시작하여 의미 작용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이다(재차 상대적, 역사적, 관용어적으로 변해 버린다). '당연히 그렇게 될 일'이라고 하는 (불유쾌한) 착각의 표피가 벗거져 떨어지고 삐걱거리며. 여러 가지 언어 활동의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해, '자연'이 그 속에 농축되어 잠자고 있던 모든 사회성에 의하여 흔들려 떤다. 나는 문장들의 '자연스러움' 앞에서 놀란다. 마치 헤겔Hegel의 고대 그리스인이 자연을 눈앞에 두고 놀라며 의미의 떨림을 거기서 청취하는 것같이. 이 의미론적 독서의 최초 상태에서는 사물들이 '참'의 의미(역사의 의미)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지만, 다른 장소에서 그리고 거의 모순되게 또다른 어떤 가치가 이 상태에 대응한다. 즉, 의미가 비-의미화 속에서 소멸되기 전에 또 떨림을 보이는 것이다. '의미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잡을 수 있지' 않다. 굳지 않고 유체인 채로 가벼운 거품이 일어나 계속 떨린다.
사회성의 이상적 상태는 다음과 같이 선언된다
: 거대하고 지속적인 시끄러움이 무수한 의미에 생기를 부여한다. 그 의미들은 시니피에로 서글프게 무거워진 기호의 결정적 형태를 결코 취하지 않고 다만 작열하고, 불꽃튀는 소리를 내며, 섬광을 내뿜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동시에 불가능한 테마이다. 왜냐하면 이상적으로 떨고 있는 이 의미는 고체화한 어떤 의미(독사의 의미) 또는 아무것도 아닌 의미(해방을 외치는 신비주의자들의 의미)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회수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 떨림을 나타내는 형식들 : 텍스트, 의미 산출signiiance, 그리고 아마도 중성neutre.) 


새벽 잠들기 전, 책꽂이의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를 꺼내 읽는다. 어느 페이지든 펼쳐 읽으면 되는 짤막한 텍스트들의 엮임이다. 139페이지 중간에서 140페이지의 반을 조금 넘어 차지하는 글을 읽는다. 읽히는 것들만 읽는 것은 그저 내가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한번 읽어본다. 두 번 세 번 네 번 ... 예닐곱번쯤 읽었는데, 텍스트를 이해한건지아닌건진 알 도리 없지만 뭔가 화아 밝아지는 기분에 뿌듯한 마음으로 바로 책 덮고는 잠에 들었다. 난 가끔 더 깊게 생각하기 위해 잠을 택한다.
<아, 의미의 떨림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경계도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경계인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던 한 지식인의 바람은 대한민국 시스템 안에서 아주잘근 뭉개진다. 그의 진의를 따져보고말고를 떠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단순소박절실한 질문으로 건너뛴다. 어떤 사건에 동참하여야 할 때,
나는 '무딘 양자택일자'가 되고 싶지도 '얄미운 관찰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  

모든 내 말과 행동이 '실수'라 한다면, 그래도 사건 하나를 겪을 때마다 반발자국만이라도 '성숙'해지고 싶다. 좀 더 괜찮은 태도와 시선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뭔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듯한 느낌' 만은 분명 있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느낌이 있으니까 좀 더 괜찮은 태도와 시선을 기다린다. 찾는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