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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2.11 광기가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疯爱, 'Til Madness Do Us Part, 2013), 왕빙 (2)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즈음 나오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느 밤 한 남자가 정신병원으로 ‘끌려’ 온다. 어둑한 복도에 서서 쇠창살 너머로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사람에게 울먹이며 말한다. “왜 날 여기에 데려왔어.” “여기 있기 싫어.” “다시 날 데려가줘.”

정신병원에서 4개월간 촬영해서 만들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인물들이 이곳에 머문 기간과 이름만을 자막으로 보여줄 뿐, 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그저 카메라를 따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넘어가며 그들의 행동, 말, 공간을 막연히 지켜본다. 원형 감옥과 비슷하게 생긴 그 정신병동이라는 공간을, 쇠창살에 갇힌 그들을, 그안에서의 비위생적이고 무기력한 생활을, 이상하고 멀쩡한 말과 행동을. 

그렇게 총 네 시간 분량의 반이 지나갈 즈음 위 장면을 만났고, 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정신병원으로 끌려 온 그가 가여웠고, 억울할 것 같았다. 그가 느낄 막막함을 나도 느꼈다. 호기심으로 골똘하게 지켜보던 마음이 점점 물러지면서 어느새 이 정신병원의 인물들에게 이입해가는 시점이었다. 이들은 피해자들이었다. 사회로부터, 정상성이라는 것으로부터, 무엇으로부터의 피해자라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점점 불쌍해졌다. 그리고 이들이 가엾은 피해자라는 생각은, 다음 장면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날, 어젯밤 갇힌 이 남자의 딸이 정신병원으로 찾아 온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아빠 괜찮아?” “아빠는 아파서 여기서 당분간 지내야 한대.” “엄마는 안 왔어.” 불안하고 슬픈 모습이었다. 딸과 남자는 마주보고 조금 훌쩍인다. 

나는 쇠창살을 두고 아버지와 마주선 딸을 보았을 때에 ‘정신이 들었다.’ 왜 가족을 정신병원에 보냈을까, 맞아 이 사람들은 그저 피해자가 아니구나, 가령 가족에겐 가해자겠구나. 시달리는 폭력이고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겠구나,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르고 여기 끌려 온 사람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에 미치니 난 더 이상 그들의 자유롭지 못함을, 갇힌 그들을 그저 안타깝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연민은 쉽게 걷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여기까지, 한 사람이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진실이다. 이런 순간이 없었다면 이 당연한 진실도 잊고 살기 쉽지만 말이다. 

그러자 중요해지는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유를 지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병실 안에 들어오는 유일한 외부자가 있다. 어느 환자의 부인이다. 간간이 찾아와 남편에게 옷가지와 먹을 거리를 챙겨주는 모양이다. 찾아올 때마다 부인에게 내 짜증을 부리던 남자는 우물쭈물하다 “나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하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장면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가길 원하는 저 남자의 바람에 끄덕일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지도 모를 그 자유를 지지할 수 있는가.  나는 물론 여전히, 그에 대한 연민까지 거둘 수는 없다. 계속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건 어쨌거나 내가 인물과 상황에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어떤 관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가, 그것도 이 왕빙이라는 감독이자 촬영자의 다큐멘터리가 나와 인물 사이에 만들어 내는 더욱 특별한 관계. 그리고 이런 관계는 아마 내 아버지라면, 내 남편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구체적인 현실로, 절실한 질문으로 옮겨갈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련의 질문을 던지면서도 계속해서 남는 찝찝함이 있다. 왕빙이라는 감독이 애초에 왜 정신병원에 들어왔는지를 알려주지 않은 건, 결국 그가 만들어낸 다큐가, 내가 던지는 것과 같은 질문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는 짐작 때문이다. 그저 이들의 모습을 보라고. 인생이 아닌 생활을, 가족과 사회가 아닌 관계 자체를,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영혼을, 생명을.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는 방식인가. 차라리 인물들의 ‘사연’을 알아서, 내가 지지할 수 있는 자유를 고르고 대책 없는 연민을 분배할 수 있으면 편하겠다 싶던 내 마음은 찝찝함을 더 증폭시킨다. (하지만 내 대책 없는 연민이, 자문하는 질문들에 대한 거칠은 하나의 해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이 영화를 보며 새삼 느낀 건 내가 관객이라는 것이었다. 카메라 근육을 떠올렸다. 마치 근육처럼 움직이는 카메라였다. 그렇게 느낄수록, 내가 지금 움직이는 건 겨우 눈과 조금씩 뒤척이는 다리 정도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했다. 정신병원 복도를 달리는 저 환자와, 따라 달리는 저 카메라와 내가 같은 근육을 쓰고 있진 않구나. 이 사실이 왜 그리 새삼스러웠을까.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세계를 알고 싶고 태도를 배우고 싶은 나는, 규정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을 답습하지 않고, 무엇보다 연민으로 귀결되지 않고 ‘볼 수 있을까’ 새삼 아니 처음일지도 모를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본다는 건 무엇인가. 내게 막연하고 대책 없는, 그래서 벅찬 질문들을 남긴 영화였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