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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31 가능성이 더 높다 (3)
  2. 2010.05.20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3. 2009.01.08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2)

가능성이 더 높다

일상 2011.01.31 00:48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_신형철<몰락의 에티카>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TAG 신형철

 
시(詩)



"이제 이대로 다 끝난 건가요. 완전히?"

 아이들이 저지른 잘못을 숨기기 위한 어른들의 공모와 합의가 성공하자, 미자는 묻는다.
 "이대로 다 끝난 건가요. 완전히?" 돌아오는 답에 미자의 질문은 없다. '좀 찜찜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이 일이 새어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누군가의 아비가 답한다. 

이러고 말면 끝인가요, 아직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거, 아니 안 보려고 하는 건, 어떡하나요.  

이 놈이 누군가를 죽게 했지만 그래도 내아들인지라, 아이 장래가 달려 있다는 절박함에 은폐하려 달려드는 아비도, 저 때문에 죽게 된 여학생의 영정 사진을 식탁 위에 두어도 불안함 애써 감추며 담담하게 밥을 집어 삼키는 손자도, 딸이 자살했지만 그래도 산 자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합의금을 받고 사건의 진실에 입닫는 어미도, 학교의 명예를 위한다는 교감도 교무주임도,

그래, 그 누군들 이해 못 할까. 하지만 미자는 살겠다고 엉켜 붙은 사람들 틈에서 나와 엉거주춤 멀뚱히, 그들 한 번 바라보고 붉은 꽃 한번 바라보고, 그들 다시 한번 보고 강물 한번 바라본다. 시를 쓰겠다고 뭐하나 허투루 보지 않고 눈 밝히던 그녀에게 모든 것은 혼란이었으리라. 나는 그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이해의 끝까지 가보려 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괴로웠을까. 이불 속에 웅크려 틈 하나 안 주는 손자를 붙잡고 제 힘으로 어쩌지 못 해 마른 목으로 절규하고, 문득 주저앉아 치마에 얼굴을 파묻어 한참 울던 그녀.

'아, 어쩌나, 미자 마음 어쩌나' 싶은 컷이 있었다. 베란다에 서서 미자가 내려다본 곳에 어린 소녀들과 놀고 있는 손자 종욱이의 모습. 누가 되게 밉더라도 멀찍이 떨어져서 뭘 하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냥 되게 가엾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그럼 감정 있잖는가. 나는 이 순간에 할미가 느꼈을 감정의 동요, 고통 같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이해는, 그들과 같은 이해가 아니었으니. 자꾸 외롭고 고독해지는 미자의 마음도 모른채, 누군가의 아비는 이리 묻는다.

"지금 사정을 이해 못 하시겠어요?"

훔쳐서라도 합의금을 마련하는 게 할미가 손자에게 할 수 있는 '인간의 도리'라 믿는 자들은 그리 말했다.
그 누구를 '위한다는 게' 대체 뭔지. 내가 누굴 위해서 해준다는 게 대체 뭘까. 그 사람의 장래를 위하는 거? 그 사람 아프지 않게 하는 거? 그 사람이 나쁘고 끔찍한 걸 보지 않게 하는 거? 



결국 미자가 제 몸과 마음을 투신한 건 죽은 여학생이다. 산 사람들만의 절박함, 혹은 자기 기만. 산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미자는 죽은 자의 곁에 선다. 아무도 말 하지 않는 죽은 여학생. 그 곁에 선다. 너와 나의 목소리. 너와 나의 마음. 너와 나의 고통. 너와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미자의 선택이 단순히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 한 것의 구도 안에 있는 건 아니다. 집단과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변하는 도덕이나 윤리라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에라고 할 수 있는 명확한 단어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나는 그저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누굴 위할 수 있다면 그리 하는 게 모두를 위하는 것이라고. 또 종욱이를 위한 것이라고. 내가 그리 해줄테니 너는 고통스러워해라. 그 위함이 얼마나 더 잘 살게 해줄지는 몰라도, 장미가 아름답고 또 아픈 것이듯이. 그리 단순한 것. 그것과 대면하여라.
그래, 손자는 할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미자의  그 선택에는 '시를 쓰겠다는 마음' 이 같이 갔다.
오늘 우연히 신형철의 어떤 글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에 점점 무감해지는 시대에 시인들의 책무가 하나 더 늘어났다고. 그건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마지막까지 울던 자가 시인이었으리라.

나는, 시인이라 부르기보다 '시를 쓰겠다는 마음' 이라 말하고 싶다. 



이 영화.

그냥 좀, 
미어진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절대 쉽게 쓰는 단어가 아니다. 쉽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미어진다. 






 + 덧붙여, 신형철의 그 글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302.html

정호승에 대한 신형철의 비판 글이다.
시를 쓰겠다는 마음,과 시를 쓰는 순간,과 시,는 믿지만, 시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믿기 어렵다.

"시인은 진실의 수호가이지 가설의 선동가가 아닙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요즘 이 책 읽느라 정신없다. 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읽을 수는 없다.
이 평론집 덕에 이번 겨울 방학, 문학 작품 수두룩 쌓아 두고 읽을 맛 나게 생겼다.


1.
믈라덴 돌라르는 정신분석 상담과정에서 분석가와 분석주체 사이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이 사랑'에 대해 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랑이다. 단지 분석 상황의 한 기능이자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만약 그것이 병리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사랑 그 자체가 고도로 병리적인 상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증거는 수두룩하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여자는 다 그래>에서부터 호프만의 '모래인간'과 헨리 제임스의 일련의 단편들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빠지는 일 속에는 자동적이다 못해 거의 기계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용될 수 있고, 또 남용될 수 있다."
(중략)
사랑은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듯 보일 때 가장 기계적인 매커니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런데 '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라캉은 앎(knowledge, 지식)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스스로를 알고 있는 앎'과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그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앎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고 있는' 앎이 있다. 우리의 향유(jouissance)와 우리의 진실(truth)이 존재하는 곳은 후자 쪽이다. 나는 나의 진리를 모른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그곳에서 나는 '즐긴다'.

3.
'몰랐다'는 것과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많이 다르다. 나는 몰라도 나의 욕망은 알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 우리에겐 "인생을 통째로 복습"해도 알 수 없는,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있으며, 거기에 나의 진실과 향유가 걸려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