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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17 한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9


김민기 : 미대 들어가서 나는 오히려 그림을 포기하게 됐어. 음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미대라는 교육제도 때문에. 당시엔 어려서부터 그림을 한 것이 아니라 고 3쯤 돼서 '어디 갈까' 하다가 2학기 때부터 미대나 가볼까 그래서 미대 교수 과외를 받고 들어온 애들이 태반이었어. 걔들 기준으로 커리큘럼이 짜지는 거야. 실망을 했지.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어. 그런데 교수님 중에 한 분 전성우 씨라고 계셨어. 어느 날 그분이 외국 그림책들을 쓱 보여줘. 난 내 그림은 우주 역사 이래 최초로 만든 나의 작업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책 안에서 누군가 이미 다 한 작업인 거야. 그럴 때의 그 아픔. 그 '쟁이'들의 아픔. 그림 안 그려본 사람들은 모르지.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왔는데.

주철환 : 이상하지 않아.

김민기 : 비슷한 기억이 또 있어. 공장 나오고서 막노동판 다닐 때. 그때 일당이 오천 원인가. 그 일당 받고 죽어라 연립주택 지을 땐데 아무리 열심히 일당 받고 일해도 저 집에서는 내가 살 수가 없더라고. 마르크스적인 명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야. 어디 머슴으로 살더라도, 비록 소유는 내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 입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아니냐. 그걸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농사를 지으러 간 거야. 가면서 절망인 것이 한쪽 옆에는 항상 공상을 갖고 있다고. 창조, 생산, 이러한 어휘들에 대한 프라이드가 농사일에 있을 것이다, 거기는 뭔가 있을 것이다 하는 그런 공상. 한 3년째인가, 모내기 일을 하고 나면 말이야, 묘한 잠깐의, 긴장을 전제로 하지만, 휴식이 있어요. 모내기에서 김매기까지. 모내기하면 한 달 반 정도 떼로,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잖아. 하고 나면 기분 좋은 휴식이 있다고. 마지막까지 하고 나면 그 다음 날은 새벽에 물꼬를 보러 나가거든. 논이라는 게 밤새 물이 찬단 말이야. 물에 다 잠기면 숨 막혀 죽거든. 새벽에 나가 물꼬를 터서 물을 빼준단 말이야. 실상 물꼬라는 게 한 삽 분량밖에 안 돼. 물이 쏴아~. 그건 똥 사는 것보다 시원하지. 배설이지. 근데 그때 퍼뜩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농사라는 게, 내가 그렇게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왔던 이 일, 여기서 한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한 삽의 흙을 옆으로 옮겨놓는 이상은 아니더라고. 물이 가진 완전한 수평은 사람이 불도저로 아무리 흙을 인위적으로 해도 막을 수가 없어. 바람이 불어주고, 벌레들이 왔다 갔다 하고, 햇빛 때문에 광합성하고, 그중에서 농부가 하는 일이란 게 그 흙 한 삽 옮겨주는 것밖에 없더라고. 그걸 갖고 생산이 어떻고 창조가 어떻고 그렇게 믿고 왔던 거야.

주철환 : 큰 깨달음을 얻었네요. 

김민기 : 그런 처참함이라는 것은 차라리 축복이지. 꼭두새벽인데, 너무 창피하고, 너무 죄송하고. 그래서 논두렁에 납작 엎드렸지. 그것이 결국 '쟁이'라거나 그런 것과 직접 통한다는 얘기야. 창작에 대한 컨셉트도 바뀌더라. 전체 매커니즘 중에 내가 같이 참여하면 '그건 내 창작이다'라고 생각이 바뀌더라고.  


김민기 인터뷰 _ <결벽증과 완벽증 사이> 중에서


 

내가 믿는 대부분의 가치들은 경험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겨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여전히,
아침에는 이것에 의지하다 저녁에는 저것에 의지한다. 봄에는 이것을 탓하다, 가을에는 저것을 탓한다. 와중에도 이런 생각은 변함없다. 내가 확신해야만 하는 가치는 반드시 찾아 온다고.

김민기의 마지막 말이 참 인상적이다. 전체 매커니즘 중에 내가 같이 참여하면 '그건 내 창작이다'라는 생각, 태도. 이런 마음가짐이 내 일상에서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깨달음을 일상의 태도로 연관시킬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성실함, 결국은 진정성. 그게 느껴진다, 힘이 된다, 김민기가 좋다, 쑥스러워 손을 휘휘 젓고 도망칠 사람이라 더욱 좋다. 아마 당신 능력이라고 믿지 않아 쑥스러워할 것이기에 더더욱.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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