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일상 2014. 6. 7. 03:00


제사상에 깔 창호지가 한 장도 남아있질 않다는 걸 깨달은 건 제사를 지내기 삼십 분 전, 이런 휴일에 열려 있는 문구점은 없을 거라 짐작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리나케 밖을 나섰다.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주 추운 설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상가를 다 돌아다녀도 문 열린 데가 없어서 큰 길까지 나갔다. 편의점에라도 가 볼 참이었다. 그때 저 멀리 옅은 분홍색의, 아마도 낡고 헤져서 그리 된, 잠바가 보였다. 할머니였다. 아니 대체 언제 외출하신 거지. 아침 내내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신 줄도 몰랐다. 새삼 알았다. 우리 할머니 몸집이 저리 작으시구나.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채 구부정한 몸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할머니!” 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걸음을 멈추시더니 한쪽 팔로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펴시는 게 보였다. 난 후다닥 달려가선 이렇게 추운 데 왜 나왔느냐고 했다. 별 대답을 않으셨다. 난 창호지를 빨리 구해야 했기에 내가 지금 뭘 사야 한다고 대충 말하곤 가던 길을 뛰어갔다. 예상대로 창호지를 구할 순 없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는데 아까 그 자리에 할머니가 아직도 서 계신 게 보였다. “할머니!” 난 달려갔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왜 아직 안 들어 가셨냐고 채근하니 별말도 않으셨다. 할머니 코에서 콧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그러고 뒤늦게 “저리로 한바꾸를 돌았다.” 라고 하셨다. 아휴 빨리 들어가요, 하면서 난 할머니를 뒤에 두고 앞장서 걸었다. 그 순간에도 난 할머니와 같이 걷고 있다는 당장의 상황보다 혼자 제사상을 차리고 있을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몇 걸음을 빠르게 걸어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빠르게 땅을 짚는 지팡이와 뒤이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잠시 걸음을 늦췄다가 뒤돌아 보았다. 할머니는 지팡이로 앞을 가리키며, 어여 가자, 고 했다. 예, 하며 난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난 할머니께 죄송스럽다기보다 순식간에 빨라진 지팡이와 발걸음 소리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에 참지 못하고 또다시 빨리 걸어 보았다. 다시금 후다닥 지팡이 짚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났다. 앞서 걸으며 소리 없이 내내 웃었다. 귀여운 할머니. 할머니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그런 생각과 고민거리들을 안고 살까. 아니면 나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일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하며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2012. 01. 26)


 

어버이날이라서 연락했어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보낸 문자. 정작 내용은 없는 문자였다. 이 문자에 아버진 대답은 않고 “할머니한테 자주 연락하라”고 답장이 왔다. 나는 더 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도 오랫동안 할머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산다고 말해버려도 될 만큼 행동도 말도 무심한 날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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