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필이 지저분하게 꽂힌 상자 사이를 뒤져 커피 믹스를 하나 꺼낸다. 바닥에 흩어진 슬리퍼를 발로 찾아 신고는 엉덩이로 의자를 밀어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른손에 커피믹스를 쥐고, 왼손으로는 아까의 상자에서 가위를 꺼내 봉지 끝을 자른다. 바닥에 떨어지는 봉지를 슬쩍 보고는 컴퓨터 모니터 옆에 놓인 종이컵을 집어 정수기로 향한다. 사무실에 일렬로 늘어선 책상들 끝에 놓인 정수기를 향해, 오직 그것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걸어 간다. 정수기 앞에 도착하자 오른손에 쥔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한번에 털어 넣고는 지저분한 휴지통으로 빈봉지를 구겨넣는다. 종이컵을 온수가 나오는 꼭지 아래 두고 오른손으로 온수 버튼을 누른다. 커피믹스가 갓 잠길 만큼만 담은 후 종이컵을 오른손으로 옮겨쥔다. 그리고 정수기에서 옆으로 두 발 정도 물러난다. 우선 허리를 살짝 구부린 후 팔꿈치를 수평으로 유지하고는 컵을 둥글게 그리고 빠르게 돌린다. 다섯 번 정도 돌린 후 컵을 좌우로 기울여 앙금이 없는지 확인한 후 처음 받은 온수의 양만큼 물을 더 받는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후 만족스런 표정으로 슬리퍼를 끌며 자리로 돌아가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엉덩이에 힘을 줘 의자를 당겨 책상에 배를 바짝 붙인 후 발에서 슬리퍼를 털어 낸다. 이제 집중해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다.


2.  

35도는 된다는 일본 소주를 쥐고 있던 컵에 3분의 1쯤 받아든다. 한모금을 들이키는데 목이 바로 삼키는 걸 거부해서 일단 입 안에 머금는다. 5초쯤 그러고 있다 한번에 삼킨다.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한 손으로 화닥거리는 목을 부여잡고 이마에 주름을 짠뜩 잡는다. 얼굴에 혈액이 돌고 광대뼈가 위치한 피부는 불그스룸해지며 입은 자꾸만 처진다. 중력에 끌려 내려가는 입술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마치 화가난 듯한 표정이다. 사람들이 말을 걸지만 그저 눈동자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할 뿐이다. 타이밍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내 입꼬리를 늘어 뜨린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 허공에 자욱을 남길 정도로 느리고 묵직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위아래로 주억거린다.


 

3.

화면에는 전역을 출발한 지하철이 이번 역을 향해 떠듬 떠듬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다. 발을 쭉쭉 뻗어 환승통로를 걷는다. 빽빽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틈을 찾아 운전하듯 차선을 갈아탄다. 오른쪽 어깨를 비틀어 빠르게 지나치기도 하고 속도를 냈다 줄였다 하며 최대한 타인의 몸에 닿지 않으며 걷는다. 왼쪽으로 코너를 돌자 계단이 보이고 무릎과 허벅지는 고정시킨 채 오직 발 만을 이용하여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다. 오른발이 계단 한 칸을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왼발이 받쳐주듯이 뒤따르는 식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왼발이 받쳐주어야 몸의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다. 이때 손은 주머니를 뒤지며 동전의 수를 헤아린다. 계단을 내려서면 지하철을 타는 곳, 눈 앞에는 매점이 보이고 나는 그 매점의 냉장고로 직행해 층층이 쌓인 우유들 사이에서 커피우유를 골라낸다. 주인에게 동전 아홉 개를 건넨다. 빨대는 사양한다. 이미 지하철은 도착했고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있다. 내리는 사람과 타려는 사람들이 뒤엉킨 승강장에서 나는 우유를 뜯으며 사람들 사이를 유연하게 비집고 들어가 비어 있는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우유를 들이키기 시작한다.

 

 

4.

하루 내내 뭐에 눌린 듯 갑갑했던 명치가 저녁이 되자 일정한 박자로 꾹꾹 눌리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이내 온 몸으로 퍼져 나가고 살갗이 아플 정도로 추워졌다. 팔과 다리는 무력하게 자꾸 아래로 늘어진다. 주변의 소음보다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생각들은 사라지고 몸의 고통에만 예민해진 뇌는 빠르게 팔과 다리를 움직여 화장실로 뛰게 한다.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변기 뚜껑을 들어 올리고 오른손 검지를 그대로 목구멍에 넣는다. 시커먼 덩어리들이 툭툭 떨어진다. 재빠르게 왼손으로 물을 내리고 손가락을 목구멍에 더 깊숙히 넣는다. 몸을 거슬러 꾸덕꾸덕 올라 오는 음식물들. 남은 음식물들이 다 나오자 누런 색의 물들이 쏟아진다. 신맛 나는 이것들이 내 목을 태운다. 변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눈 앞이 흐려지고 눈을 감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코 끝에는 콧물이 매달려 있다. 왜 몸 안에 들어 갔다 나오는 것들은 다 더러워지는가. 입 안에 고인 침을 뱉고는 물을 내렸다. 물을 타고 두어 번 휘감으며 사라지는 음식물들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5.
병원에 일렬로 늘어 선 의자들 가운데에 늙은 남자가 앉아있다.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꼭 쥐고 있고 연신 떨어대는 왼손은 옆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은 한에서 공중에 띄워 두고 있다. 혹은 방치하고 있다. 온 몸의 힘이 실린 지팡이가 순간 균형을 잃고 미끄려져 대리석 바닥에 고꾸라진다. 남자는 귀찮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상반신을 한번 숙이고 그다음 조금 더 숙이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숙여서 지팡이를 손에 쥔다. 지팡이를 집고는 삼 초 정도 가만히 있더니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만에 상반신을 세운다. 이마가 간지러운지 덜덜 떨리는 왼손을 팔꿈치의 힘으로 이마를 향해 들어 올리다가 거의 닿았을쯤 다시 팔을 떨어트린다. 못마땅한 얼굴을 지어보이더니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꽉 쥐고는 엉덩이에 힘을 주어 의자에서 들어올린 후 오른발을 한걸음 앞으로 옮긴다. 그리고 왼발을 끌어 오른발과 나란하게 이동시킨다. 지팡이가 대리석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꾹 눌러찧으며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6.
내시경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뒷통수는 미세하게 계속해서 떨리고 있다. 이 떨림은 불규칙이고 무규칙적인 방향으로 정수리를 중심으로 반경 일이센치 이내에서 지속된다. 앞으로 굽은 어깨에 쭉 빠진 목. 그의 시선은 내시경 렌즈에 갇혀 있고 이 렌즈는 수술대 위의 뇌를 향해 있다. 그의 커다란 손은 1,2mm의 수술기구를 미세하게 움직이며 뇌의 깊숙한 곳으로 접근하는 중이다. 고요한 수술실에서 가장 분주한 것은 수술 모자를 쓴 그의 머리통. 그의 집중력이 높아질수록 머리는 점점 더 빠르게 떨리고 너무 빨라서 그것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7.  
손바닥이 크고 손가락이 길다. 늙은 남자는 그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젖히며 웃는다. 소리 내 웃는다. 울림이 좋은 성대로 아하하하하하하 웃는다. 문자 그대로 아하하하하하하. 말하는 상대를 만족시키는 시원한 웃음. 손가락들 사이로 임플란트를 한 새하얀 이들이 빛나고 있다. 이내 손을 치우고 입을 벌린 채 마저 하하하하 웃는다. 파문이 인듯 볼과 눈에 주름이 퍼진다. 점점 웃음소리가 잦아 들고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웃음을 마무리한다. 


 

8. 
지하철에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앉아있다. 남자는 오른손 검지에 붙여 놓은 밴드를 연신 만지작거린다. 살짝 떼어냈다 붙이고는 이번엔 상처가 보일 때까지 뜯어내더니 손가락으로 상처를 꾹 눌러 보고 다시 밴드를 붙인다. 여자가가 계속 말을 거는 와중에도 그는 밴드만 쳐다보며 떼어냈다 붙이기를 반복하더니 이제는 밴드 끄트머리의 때를 벗겨내고 있다. 여자가 대답을 원하는지 고개를 숙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더 숙여서 바라보면 그제야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는데, 밴드를 계속 만지작 거리는 채로다. 그렇게 한 번 쳐다봐주고는 다시 고개를 떨군다.


 

9.
어린 나는 항상 나만의 아지트를 꿈꿨다. 혼자 살고 싶었고, 어떻게든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 떠올렸던 것이 철로 만든 사각형의 집이다. 비가 와도 끄떡없고 원하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나의 작은 집. 천장은 내 머리 크기 하나 정도 더 높고 너비는 누울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그리고 삼단짜리 나무 진열대를 만들어서 내가 앉은 오른편에 둔다. 첫 칸에는 만화 위인전을, 짐이 많으면 안 되니 <퀴리부인>, <나이팅게일>, <세종대왕> 정도만 두도록 하자. 그리고 오십 번은 더 읽었을 <수지는 멋쟁이>와 <작은 아씨들>도 챙긴다. 두 번째 칸에는 조리하지 않아도 되는 먹을 거리를 둔다. 통조림이나 과자, 빵, 음료수 등이다. 과자를 먹으며 책을 읽는 것이 내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내가 앉은 왼편에는 아기 인형 재롱이와 곰인형, 개인형을 둔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적당한 크기로 창문을 만든다. 아빠의 장비를 빌려 철을 사각형으로 잘라내고 문구점에서 아크릴판을 사와 오초본드로 덮는다. 그럼 밖을 볼 수 있겠지. 필요하면 커튼을 달아 남에게 나를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중요한 건 머리 맡의 마이마이. 평소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들을 녹음해 둔 테입들을 들을 거다. 촛불도 잔뜩 챙겨야 한다. 어두워지면 불을 켜야 하니까. 가끔 비가 오면 천장을 보고 누워 빗물이 철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혼자 있을 공간이어야 하고 몸을 구기지만 않을 정도면 된다. 이 철통집을 들고 어디든지 돌아다니고 그리고 혼자 있으면 좋겠다.  

 

 

10.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지하철 환승 통로. 백발에 털코트를 단정하게 차려 입은 노인이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는다. 키가 크고 바바리 코트를 입은 남자는 몸을 숙여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노인은 뭐라고 말을 하더니 울상이 된 표정을 짓는다.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노인의 표정이 밝아진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 급하게 이동한다.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로 조금 걷더니 발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으로 간다. 다른 노인들에 섞여 엘리베이터를 타 문 앞에 자리잡고는 B2, B1, 1, 2 숫자가 바뀌는 것을 뚫어지게 올려다 본다. 문이 열리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을 향한다. 작은 편의점 안을 서성거리며 몇 바퀴를 돈다. 팥빵을 집어 든다. 직원에게 만 원을 준다. 구천원의 거스름돈을 받아 주머니에 돈을 넣고는 점원을 빤히 바라본다. 얼굴이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의 아가씨다. 노인은 자상하게 웃어 보인다.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는다. 담배를 피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묻는다. “상일동이 어디오.” 남자는 지하철이 빠를 거라고 답한다. “난 버스를 타고 싶은데.” 남자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때 노인의 발 밑으로 비둘기가 다가와 부리로 바닥을 찧는다. 노인이 천천히 무릎을 접어 쪼그려 앉는다. 그리고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러면서 바라 본 비둘기의 눈에는 눈꼽이 잔뜩 꼈다. 노인은 빵봉지에서 빵을 꺼내 잘게 찢는다. 손바닥에 얹자 비둘기가 다가와 먹는다. 그리고 노인의 무릎으로 팔뚝으로 그리고 어깨로 올라 자리를 잡는다. 노인이 휘청거리며 일어서려 한다. 하지만 현기증이 나는지 다리가 꺾이고 바닥에 넘어진다. 비둘기가 놀라 날아간다. 젊은 남자가 다가와 부축한다. 그때 눈 앞에 버스 한 대가 온다. 남자의 팔을 뿌리치고 노인은 절룩거리며 그 버스로 다가간다. “이 버스는 종점이 어디지?” 기사가 상일동이라고 답한다. 낑낑대며 버스에 올라선 노인이 좌석에 앉는다. 기사는 요금을 내라고 한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기사에게 다가가 천원을 준다. 버스에는 세 명의 승객이 있다. 나란히 앉은 둘과 이어폰을 낀 채로 노인을 주시하는 교복입은 여학생. 노인은 다시 좌석으로 향하고 막 출발한 버스에 내팽겨치듯이 자리에 앉는다. 노인이 중얼거린다. “내 친구가 상일동에 살아. 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거야.” 계속 중얼거리던 노인의 얼굴에 햇살과 졸음이 번지고 이내 고개를 떨군다. 더 이상 누구도 이 버스를 타지 않는다. 버스의 움직임에 맞춰 노인의 숙인 고개는 힘없이 출렁거린다. 그 앞에서 바라보던 비둘기가 노인의 머리를 찧는다. 노인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비둘기가 말한다. “자는 모양이 그게 뭔가. 나이값 좀 하게.” 비둘기는 콩 한 쪽을 노인의 무릎에 두고 간다. 햇빛 가득한 곳에 자리잡은 콩은 뿌리를 내려 노인의 무릎뼈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서서히 자라기 시작한다. 버스 천장을 뚫고 하늘을 향해 높이 높이 자란다. 버스 기사는 차를 세우고 콩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커플도 손을 잡고 콩나무를 탄다. 교복 입은 학생이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가방을 벗고 뒤따라 오른다. 노인이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대체 상일동에는 언제 도착하는 건가!” 비둘기가 콩나무를 타고 내려온다. 비둘기의 눈썹이 새하얗다. 노인은 눈꼽 낀 비둘기의 눈을 오래도록 쳐다본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