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시안)

여행 2016. 8. 15. 13:33

해가 내 눈높이만큼 내려왔을 때에 시안역으로 들어왔는데 긴 줄의 검색대를 통과하고 돌아보니 그새 주위가 어둑했다. 중국에서 기차를 타는 건 처음이라 긴장됐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 기차는 열한 시에 출발한다. 바닥에까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복잡한 대합실에서 운좋게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자꾸 앞으로 고꾸라지는 큰 배낭을 두 다리로 힘주어 잡았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책을 읽을 것이다. 글은 한국어인데도 단 몇 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 읽었다. 설마 벌써 모국어가 낯선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 키득대는 사이 오른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떠나고 한 여자가 다가왔다. 나이 든 여자. 하지만 머리칼은 새까맣고 한갈래로 묶었다. 자세히 보니 붉은 머리끈을 하고 있었다. 약간은 더워보이는 빨간 잠바.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물었다. “쓰 디엔?” 시간을 묻는 거라 짐작됐다. 나는 내 손목 시계를 보이며 아홉 시라고, 고작 몇 단어 아는 중국어로 답했다. 겨우 뱉은 그 말도 상대가 알아듣지 못해 책을 내려놓고 손가락 아홉 개를 펼쳐 보였다.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중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표시로 입술에 엑스자를 그어 보였다. 여자는 일어서더니 맞은 편에 앉아있는 공안에게로 향했다. 더워보이는 검은 바지를 입었고, 오른발에서 왼발로 내딛는 보폭이 짧았다. 두 다리의 거리는 멀어서, 분명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되는데도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공안에게 답을 들었는지 여자는 다시 자리로 왔다. 그리고 내게 자신있는 목소리로 “쓰 디엔!” 이라고 했다. 내 시계가 잘못된 걸까, 아니면 기차 출발 시각을 물었던 걸까. 난 답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는지 자신의 오른쪽에 앉은 여자에게 물었다. (대체 무엇을?) 애띤 얼굴의 상대는 짧게 답을 했고 여자는 자신의 표를 보였다. 상대는 귀찮은 듯 휴대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못믿겠는 표정을 한 여자는 다시 일어서더니 유모차를 잡고 있는 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다정한 표정으로 표를 들여다 보았고, 여자를 데리고 열차 정보가 있는 전광판으로 갔다. 남자의 아내와 아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뒤따랐다. 정확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꽤 길게 설명해주었다. 부디 그녀가 답을 얻었기를, 그래서 행여 기차를 놓치지 않기를. 그 사이 내 옆자리에는 늙은 남자가 차지했다. 대화를 끝낸 여자는 다시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짐, 잡동사니로 가득찬 노란 봉지를 들어보이며 무어라 말하자 앉아 있던 남자는 말없이 바로 떠났다. 주저앉듯이 자리에 앉은 여자는 노란 봉지에서 물통을 꺼내 몇 방울 되지 않은 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공안에게로 가서 표를 보였고 공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했고 여자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가 이내 일어서 다른 곳으로 갔다. 먼 곳에 보이는 그녀는 이제 쇠창살로 된 여러 개찰구 중 한 곳에 서서 그곳을 지키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궁금한 걸까. 그런데 왜 아무도 그녀에게 정확한 답을 주지 못하는 걸까.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것은 질문이 아닐까. 계속해서 대합실을 헤매는 그녀가 오래도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내 시야에서 그녀는 사라졌고 나는 다시 책을 읽었다. 출발 삼십분 전이 되자 내가 탈 기차의 탑승이 시작되었다. 쇠창살로 된 개찰구 앞에 짐을 잔뜩 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나는 행여 놓칠 새라 사람들 사이에 바짝 붙었다. 쇠창살의 문이 시끄럽게 열리고 이제 기차까지의 긴 행렬이 시작됐다. 행렬을 뒤따르다가 그녀를 보았다. 허리를 오른쪽으로 틀고 앉아 왼쪽 다리에 왼팔을 기대고 있었다. 왼손에 턱을 괸 채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벽 뿐이니 눈을 감고 있지 않다면 분명 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한 그 뒷모습이, 나는 아주 진지하다고 느꼈다. 개찰구를 지나 기차가 있는 플랫폼까지는 꽤 길었고, 터널 같은 길을 군데군데의 희미한 주황색 빛이 비춰주었다. 밝았다가 그림자지기를 반복하는 눈앞의 뒷모습들이 낯설면서도 나를 안심시켰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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