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루계곡

여행 2019. 9. 11. 00:43

좌석 1, 2번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했다. 인도의 마날리에서 수도 델리까지는 12시간이 훨씬 넘게 걸릴 터였다. 우리는 심야버스를 탔다. 가장 좋은 좌석이라고 들었는데, 나와 친구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가는 내내 불편했다. 운전기사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였는데, 시크교도는 인도에서 잘사는 편에 속한다. 보통의 인도인들에 비하면 체격이 좋다. 그의 넓은 등판을 계속 볼 수 있는 건 좋았다.
버스가 시내에서 벗어나면서 해가 졌다. 밝은 건 달빛과 차들의 헤드라이트뿐이었다. 고속도로 비슷한 곳으로 진입했는데 난간이 없었다. 난간이 없는 도로에서 떨어지면 낭떠러지였다. 아래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꿀루계곡이라 불린다고 했다. 그 풍경을 보자마자 바로 압도당했다.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었다. 새롭거나 색다르게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많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강은 바닥이 없고 물안개는 거미줄보다 촘촘했다. 그 사이 무엇이 걸려들었을지 모른다. 공포를 느꼈다. 당장 피하고 싶은 공포감은 아니었다.
1차선보다 조금 더 넓은 도로는 맞은편에서 차라도 다가오면 낭떠러지 반대편에 바짝 붙은 채 기다려야 했다. 꺾어지는 길이 나타나면 마주 달려오는 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익숙한 듯했다. 숱하게 핸들이 여러 바퀴 돌아가고 또 한 번 꺾어지는 길이 나타났을 때 환한 빛에 드러난 건 검은 허공이 아닌 소들의 얼굴이었다. 앞다리를 꺾은 채 웅크리고들 앉아 우리를 보고 있었다. 빛에 눈부시지 않을까, 아니 소들은 빛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버스의 헤드라이트에 소의 얼굴이 오래 밝았다가 다시 검어지던 순간, 나는 문득 내 죽음을 생각했다. 나는 델리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과 예감 비슷한 것이 들자 나는 곧 죽게 될 것이었다. 이제 나는 스스로를 괜찮다고 성심껏 달래기 시작했다. 사람은 죽는다. 짧지만 죽음을 예감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살던 곳에서 멀리 와 죽는 게 억울하지도 두렵지도 않다, 괜찮다. 수많은 일본 여행자들이 마약을 찾아 이 깊은 계곡까지 들어왔다가 죽거나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들은 모험심이 강한 걸까, 삶을 함부로 대한 걸까. 낭떠러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소들은 차가 피할 거라고 믿는 걸까 더는 물러설 데가 없는 걸까. 어쨌거나 괜찮다. 이 도로 위에서 내가 죽더라도. 슬펐다.
나는 꿀루계곡의 물안개와 달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겨 있어서 얼핏 운전자의 등판이 보였을 때에야 내 죽음을 상상하길 그만둘 수 있었다. 버스는 넓고 낡은 휴게소에 내렸다. 나와 동행은 오줌을 시원하게 싸고 마른 볶음밥을 나눠 먹었다. 불편해서 밤새 못 잘 것 같던 1, 2번 좌석에도 적응해 이후 우리는 내내 잤다. 다시 깼을 때는 마른 공기와 매연 냄새가 진동하는 도시 델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기 직전이었다.  (2016. 8)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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