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권리에 대한 자료를 뒤적이다가.

환자권리 침해 사례가 되는 언론기사 제목이다

'어쩔거나, 말기 암 환자 같은 우리 대학
외교부는 말기 암 환자 인가
'미국인들은 에이즈보다 더 나쁜 병에 걸렸다
민노당의 정파주의는 한국 정치의 '암적 존재'


사실 아무렇지 않게 암적 존재라는 말을 관용어처럼 썼는데, 좀 더 민감해져야겠다.
환자는 '환자인 상태'로서 긍정하며 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은 거겠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많아서인지 나 역시 환자문제에 예민하다. 특히 만성질환자들의 고통. 자신의 병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기도 힘들 뿐더러 고혈압 약이 효과가 안나타나니까 이 약 저 약 다 복용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대학병원 한번 가면 몇 시간 대기는 기본이고 갈 때마다 다른 의사가 앉아 있어서 매번 자신의 증상을 설명해야 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동네병원은 미덥지 않아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면서 환자의 피로는 높아지고 박탈감까지 생기니 원. 그런 상황들을 보고 듣고 해서인지 생각만해도 현기증이 생겨 난 그냥 병이 생겨도 안고 살아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니까 떠오르는 이야기 하나, 몇 년 전에 고미숙샘 강의에서 들은 건데
황우석이 한창 줄기세포로 추앙받고 있을 때 한 티비프로그램에 휠체어 탄 장애인과 함께 나왔단다. 그는 장애인 분을 바라보며 '벌떡 일어설 수 있도록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게 해주겠다' 고 했다나 여튼 그랬단다. 그 말이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희망적'이었을까. 하지만 정말 불편한 말이다. 그 말은 곧 몸이 불편한 장애인의 현 존재를 비하하고 부정하는 것이니까. 벌떡 일어서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이게 정상이라는 상태가 만들어지는 방식이지 않을까.

'땡땡'이 되기 위한 상태로서 현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미완된 존재가 아니라 현 상태의 자기 정체성을 긍정하며 살 수 있기.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장애를 가진 태아를 낙태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한 장애인이 이렇게 답한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장애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자극 받은 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현실은 현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할 상태에 대해서 지금-여기에서 말하는 걸 주저하진 않을 거다.
(하긴 요즘 난 미리 꽁무니를 빼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졌다.)


'차이를 인정하자' 라는 생각. 다양성 존중이란 가치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지침이 됐다.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 '차이' 는 언제든지 위계화의 수단이 될 잠재성과 함께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의식있는 사람들조차 '차이는 차이로' 라는 생각을 지키는데에 부단한 용쓰기가 필요하다. '차이'라는 인식조차 사라지는 날이 오면 좋겠지. 차이를 권력으로 만드는 것들이 자꾸 폭로되고 거기에 배신감을 느끼는 부단한 자기 부정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차이'를 발견하는데서 오는 창의성은 지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건가.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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