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행 2010. 5. 23. 23:42

 

 일주일 간의 영국 여행. 아주 일찍 아침을 시작해서 그런지 따뜻한 비행기 안의 공기에 잠시 졸았다. 그 꿈에서 선명한 글자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잊지 않으려고 말이다. 졸음에서 깨고선 한참이나 그 글귀들을 찾아 다녔다. 분명 뇌리 속에 박혀 있을 말들이지만 이미 희미해진 것들을 막연하고 서글프게 길어 올리는 일. 딱히 목적도 없이 난 늘 그런 것들을 좇아다닌다.

사실, 여행지에서보다 여행지를 가는 그 도중,을 더 즐긴다. 누군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열 몇 시간이 고역이라고 하지만 난 비행기 안에 있는 동안이 너무 좋다. 아마 그걸 '설레임'이라고 하나 보다. 김경주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 설레임을 쫓는 일이라고 하더라.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계속 유예하며 그 과정을 즐긴다는 거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떠 있는 시간 동안, 배 아래 그득 차 있던 기분, 기운 같은 것이 명치께까지 붕 떠오른다. 열시 간 후면 런던이다. 난 지금 런던으로 가는 도중이다.




 
 런던에서 느낀 여유로움. 도시라고 해서 다 같은 도시가 아니다. 아무데고 널브러져 광합성을 하던 사람들. 평일 오전인데 거리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지?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서울사람답다.

늘 뭔가 해야만 할 것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면 버스와 지하철이란 교통수단 안. 하지만 여행을 오면 바짝 긴장하던 근육이 풀리는지 몸이 흐물흐물해진다. 트라팔가 광장의 계단 한 구석에 앉아 한참 낮잠을 잤다.



선진국이 뭐 그리 대단하다며, 그 오만한 말을 믿진 않지만, 광장에 서 있는 조각상에 그래 이런 게 바로 선진국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팔이 없는 임신한 여성의 조각상이다. 쉽게 말해, 비정상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의 모습이다. 역사의 위인이나, 그래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서만 만든 조각상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을 시험하는 듯한 이런 조각상은 선진국이라 가능한지도 모른다. 엄청 대단한 사람들만을 찾지 말라고, 편한 걸 보기만을 바라지 말라고, 그리 말하는 듯했다. 전혀 보기 싫지 않았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좀 슬프기도 하고, 위엄없이 그냥 그 자리에 지긋이 앉아 있는 여인이 참 보기 좋았다.





 이 곳은 런던박물관입니다. 서너시간 런던을 돌아다니라 고단해진 내 발.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 다르다는 조각상이었다. 한 열 번을 뱅뱅 돌면서 관찰했다. 그러고보면 조각가들은 참 대단하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돌에서 그는 이런 모습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저마다의 세계가 다 아름답겠지만, 난 특히 예술가들의 세계를 사랑한다. 그들의 '보는 눈'이 존경스럽다. 작품이라 할 만한 것들을 만날 때의 이 '살 맛' 나는 기분.

박물관 상점에서 제본된 고흐의 그림 한 점을 샀다. 고흐의 의자.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내 방 벽에 붙여두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색감. 빈 의자가 주는 마음 편안함.



 아마 도시를 걷다 만난 어느 공원이었을 것이다. 짙푸른 나무 아래 드 넓은 잔디, 그 위에 쪼롬히 앉아 있는 의자들. 쉬어들 가시라고.

숙소를 나서 정처없이 터벅거리며 걷던 어느 날의 저녁, 감쪽같이 돌아갈 길이 사라졌고 거짓말 같이 비가 내렸다. 이 것이 바로 영국의 진짜 날씨인가. 멍하니 서서 비 오는 풍경과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시간.













런던을 떠나 리즈에 도착한 날, 혼자서 한나절 동안 동네를 걸었다. 런던과는 또 다른 느낌. 사람 냄새가 더 난다고 해야할까. 골목에 늘어진 집들과 길 위에서 장난치며 놀던 아이들. 아기자기하게 걸어 놓은 예쁜 빨래들. 집 안 부엌에서 저녁 준비로 덜그럭 거리는 소리엔 피식 웃음이 났다. 정말 사람 사는 곳이구나. 낯선 곳에서 느끼는 편안함. 할 수 있다면 그냥 이 곳에 어느 방 하나 얻어서 오래 살고 싶다. 뒷일 앞일 걱정하지 않고 말이다. 그렇다고 큰 기대하진 않아야겠지. 막상 살다보면 딱히 다를 것 없는 삶일테니까.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내가 서울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살듯이. 매일 일하고 밥 먹고 똥 누고 잠 자고 그러면서 그렇게.

쫓기듯 일정 소화하지 않아도 되었던 터라 아주 여유롭게 쉬었다. 고생하는 여행이 오래 기억나긴 하지만 이렇게 아무 잡념없이 쉴 수 있던 여행은 한번씩 문득 찾아와 지독하게 그립도록 한다. 하이드파크의 그 넓은 잔디, 도시 어디든 널려 있던 의자들. 리즈에서 보았던 지평선들. 유럽의 풍경은 향수병 나도록 하는 묘한 매력이 있나보다. 그리고 문득 물어본다. 왜 거기여야만 하는가. 왜 이 곳에선 안 되는걸까. 낯선 곳에서 시간을 잃어버린 경험 때문인 건가. 지금 이 곳에선 숫자로 환원된 이 시간들로부터 떨어질 수 없기에. 아마 그런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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