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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 '미지와 경계'를 과학하는 마음
                                   김소연 - 시인
   

오랜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벤자민 나무는 모든 잎들을 누렇게 떨구고 말라 죽어 있었다. 푸석하고 허옇게 변한 나무줄기를 만져보니, 몸속에 남아있던 최후의 수분까지 다 써버린 듯했다. 키우던 정이 있어 쉽게 버리진 못한 채, 한 달 남짓 바깥에 두고 그냥 지냈는데, 어느 날, 손톱 만한 싹이 옆구리를 비집고 나왔다. 찻잎처럼 작은 싹은 하루하루 쭉쭉 잎을 넓혔고 며칠 만에 무성해졌다. 윤기가 반들거리는 어린 잎을 바라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엔 구름의 방해가 없는 한, 하염없이 빛을 쬐어주는 태양이 있었다. 태양과 벤자민 나무 사이에 가느다란 직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내겐 보이지 않는.

증표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해 ‘그어져 있었다’라 표현하는 것은 가능할까. ‘보이지 않게 그어져 있다’는 건 불가능한 표현일까. 가능한 표현이냐 불가능한 표현이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가능한 표현이라 말할 수밖에는 없다. 죽은 나무에서 반짝거리는 어린 잎이 삐져 나와 있었으니까. 이건 저 태양이 내어주는 에너지에 이 나무가 연결돼 있다는 증표니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됐다'는 건, 죽은 나무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햇빛이라는 에너지가 저 먼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직진으로 달려왔다. 이 고속도로는 투명하고 환한 길이다. 오직 한 가지만을 실어나르는 특별한 길이다. 음식을 실어 나르는 컨베어 벨트처럼 햇빛이 지구까지 닿는 이것을, 내가 ‘길이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하면 이것은 상상된 표현에 불과할까.  

내 앞에 새 잎을 싹 틔운 작은 나무 한 그루를 통해서 나의 시선은 머나먼 태양까지 다다른다. 그럼으로써 나는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 무려 1억 5천만 킬로미터 짜리의 공간을 체감할 수 있다. 사물 하나의 변화를 통해서 공간에 대한 체감능력이 무한한 확장을 이루는 능력을 나는 ‘상상력’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지난 여름은 일본의 오키나와를 여행하며 보냈다. 오키나와는 푸른 이끼가 낀 돌계단과 돌담이 아름다운 섬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그 석회암은 산호의 시체이며, 바다 속에 살고 있던 산호숲이 지상에서 이렇게 바위가 된 것은 땅이 융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난 여름, 오랜 세기 전의 바다 속을 거닐었던 것이다. 티베트의 남초 호수가 짠물이라는 증표를 통해, 오랜 세기 전에는 거기가 바다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우뚝 선 히말라야 산맥을 통해서 우리는, 오랜 세기 전에는 서로 떨어져 있던 인도 판과 유라시아 판이 충돌한 적이 있었단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준 증표들은 우리에게 감히 염두도 나지 않을 억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용기를 발휘하게 한다. 시간을 거스르는 용기가 곧 상상력인 셈이다.

징표
지금 우리집 바깥에선 남천의 푸른 잎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잎 끝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남천을 통해서 나는 일교차가 커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저만치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남천은 자기 몫의 온도가 부족할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월동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선, 잎을 버릴 계획부터 세운다. 잎을 다 버려야 아주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건조하고 추운 겨울을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잎을 버리기 위해 나무는 잎자루에 떨켜를 만든다. 떨켜는 잎이 광합성을 해서 만든 탄수화물과 아미노산이 줄기를 통해 이동하는 것을 막는다. 그럴 때 나뭇잎에 축적된 오도가도 못하던 영양분들이 색소변화를 일으키고 낙엽으로 물드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빠짐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도종환, 「단풍드는 날」부분

동물들이 영양분을 비축해두는 습성으로 겨울나기를 하는 것과 비교하자면, 나무의 겨울나기는 비축의 반대방향으로 진행되는 습성이 있다. 비축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단풍을 징표로 내세워 나무는 세상에게 혹독한 시기에 대한 자기선언을 한다. 아름다운 단풍을 통해 우리는 한 계절의 절정을 경탄하지만, 실은 나무의 비장한 결심이 낳은 징표에 대해 경탄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단풍에 대한 예찬을 하고 있는 위의 시는 단지 나무를 의인화한 상상력의 힘에 의해 쓰여졌다 할 수 없다. 이건 분명히, 한 개체의 징표를 과학적으로 사유한 통찰의 결과물이 곧 상상력이라는 증표인 셈이다.


경계
시인의 상상력을 두고, 어떤 이들은 ‘엉뚱한 몽상가’라 칭하고 어떤 이들은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칭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예지능력이 뛰어난 ‘예언자’라고까지 칭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두가 부분적으로만 옳은 표현이라 생각하는 쪽이다.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 들을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이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다. 가시가능한 세계의 이쪽과 저쪽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모호성을, 언어로 호명해내는 작업이 상상력이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음악은 붙들려 있는 듯 싶다가 다시 떠나는 무엇이다. 지속되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줄. 달아나 버리는 것. 소멸되는 빛 속에 간직된 불안정한 동요.
-미셸 슈나이더,『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붙들려 있다’와 ‘떠나다’, ‘지속되다’와 ‘흘러가다’, ‘소멸되다’와 ‘간직되다’. 서로 상반되는 이 여섯 개의 낱말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떤 경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음악은 명명백백한 어떤 세계가 아닌, 경계의 세계에서 창조된다. 붙들렸는가 싶으면 떠나고, 지속되는가 싶으면 흘러가고, 소멸된 줄 알았던 것들이 간직돼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면서 종종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기쁘면서 애달프고, 허무하면서 뿌듯하다. 이 느낌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음악의 세계다. 음악을 들으며 우리 마음이 된통 애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주법은 진동의 미세한 입자를 시간 속에 끼워넣으며 악기의 경계와 세계의 경계를 건드릴 뿐인데 이 건드림, 이 건드림이 직조해내는 무늬, 진동의 미세한 입자들이 뿜어내는 숨과 그 숨의 웅숭그림이 천변만화해내는 세계.
-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뒷표지 글 

악기란, 악기의 몸과 악기 바깥의 세계 사이를 건드림으로써 연주된다. 주법이란, 진동이라는 미세한 입자를 시간 안에 끼워 넣음으로써 공간으로 퍼져나가게 하는 행위이다. 경계를 건드려서 무늬를 직조해내는 것이 음악인 셈이다. 경계에 도사린 무수한 숨결을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가 있다. 음악이 그 경계의 숨결을 무늬로 그려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감지 가능한 많은 세계들을 다 놓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 경계의 영역을 ‘문지방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아이가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손을 넣는 순간에서부터 양말 속 선물을 만지게 되는 순간의 그 사이. 먹장구름이 잔뜩 우리 머리맡에 운집해 있는 순간에서부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순간의 그 사이. 당신이 나에게 오기로 한 그 날로부터 당신이 나에게 도착하게 되는 어떤 날 사이……. 이 사이의 시간들을 우리는 ‘기다림’이라 표현하고 말지만, 기다림 안에는 설렘과 긴장과 예감과 떨림의 시간들이 농축돼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더없이 길고 긴 체험의 시간이다.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 위에서, 기대에 대한 희망와 절망의 교차점을 웜홀처럼 통과하면서, 우리는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그래서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의 시).”

징후
하나의 사건은 사건 이전과 이후의 사이에 반드시 ‘징후’를 탑재하고 있다. 징후를 잘 감지하면, 사건 이전에 이미 사건 이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흔히 직감이라고 부른다. 상상력이 지닌 사유의 영역을 감각적인 것으로 고스란히 치환한 상태.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아주 거대한 벌레로 변하여 깨어났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변신」의 첫 문장이다. 이것을 두고, 카프카의 상상력에 대해 경탄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과연 이것이 카프카가 상상해낸 이야기일까에 대해 의심을 하는 쪽이다. 카프카의 날카롭고 투시적인 시선은 인간의 행동양식에서 벌레를 관찰해냈다. 인간에 대한 메타포로서의 ‘벌레’가 아니라, 인간의 속성에 대한 가장 투시적인 관찰이 ‘벌레’라는 표현을 낳은 것이다. 마르께스도 이 구절을 두고 “난 이것이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 날 괴롭혔던 궁금증은 그게 어떤 부류의 벌레였을까 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주인공 잠자가 벌레로 변신해서 벌어지는 일가족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져놓음으로써, 카프카는 인간이 언젠가는 한낱 벌레 같은 존재로 추락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카프카는 이 사실을 경고하기 위한 욕망보다는, 인간의 징후를 극단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욕망에 충실했을 가능성이 크다. 벌레로 변한 잠자의 입장에 대해 오로지 기술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징후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기록하는 문학들은, 언제나 커다란 비판과 커다란 경고, 커다란 깨달음으로 저절로 진화한다. 작가의 몫은 징후의 기록이고, 교훈이나 깨달음은 작품이 독자에게 내던져져 저절로 겪는 진화의 몫이다.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다. 이 모호성은 이미 과학이 증명해낸 사실이다. 우리의 삶은 개체와 개체의 연결에 의해서 가능성을 얻는다. 이 모호성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수백 년 전에 이미 직관한 사실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이 통찰은 시인이 세상의 균열들을 응시하다 얻은 사실이다. 과학이 증명한 것과 인디언들이 직관한 것과 시인이 응시한 것은 모두 같은 것들이다. 예측가능한 세계와 예측불가능한 세계 사이에 놓인 경계를 밝혀내는 일. 이 경계가 밝혀지면 질수록 인간의 모호한 현재는 점점 더 명료한 것으로 떠오르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점점 더 대안적인 것이 된다.

“예술은 예측하고 또 뒤따릅니다. 예술의 이 모호성은 예술의 인간성과 나란히 걷습니다.(안또니오 네그리,『예술과 다중』)” 예술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증표를 찾아낸다. 공간을 확장하여 징표를 찾아낸다. 이 모든 상상력을 기호화하여 인간의 주어진 조건을 가늠한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과학하는 마음이라 표현하고 싶어진다. 물론 예술가의 상상력이 초과되거나 부족할 때는 실패한 작품이 된다. 이때의 실패는 작품의 실패이지, 예술가의 실패는 아니다. 예술가는 실패를 무릅씀으로써 또 다른 진화를 하기 때문이다. 과학도 그러하다. 나는 과학을 좋아하지만, ‘사실’을 알려주는 냉철함 때문이 아니라, 우선 ‘가설’을 세울 줄 아는 모험심 때문에 좋아한다. 

_출처 : 크로스로드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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