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라이프A SIMPLE LIFE/허안화 감독/유덕화, 엽덕한 주연

 
  영화를 보기 전 가장 궁금했던 건 이 문구에 관한 거였다. “그녀를 돌보는 로저는 자신에게 타오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깨닫게 된다.” 글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문장이었고 관계를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들도 이런 뉘앙스의 한 줄 요약을 할 수 있을 텐데, 왠지 이 영화 앞에서 유독 호기심이 났다. 드러내기 쉽지 않을 것이고 많은 영화들에서 그 표현 방식에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중한지를 깨닫는 걸 영화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그 디테일이 어떻게 드러날까, 그 순간들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감탄했던 건, 정확히 그런 순간들에서 코끝이 짠해졌다는 거다. 그리고 짠해지기 이전에, 그런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거다. 

영화제작자 로저,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 60년째 가정부로, 특히 로저를 아들처럼 키우다시피 한 노인 아타오. 로저의 집안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갔고 그는 홍콩에 남아 아타오와 함께 아파트에 산다. 아타오는 로저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챙기며 까다롭게 그를 돌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타오는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가 자청하여 노인요양병원으로 들어간다. 그러고 난 후 로저가 틈틈이 아타오를 돌보게 되면서 로저는 당연하던 아타오의 존재를 새삼 느낀다. (느낀다, 느끼도록 하는 영화의 무수한 디테일들-사소한 몸짓, 눈빛, 변화들-이 참 좋다) 그동안 로저는 아타오에게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냉랭하지도 않았다. 무관심한 것에 가까웠겠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그렇듯 말이다. 그러니까 둘은 가족이었다. 

영화는 인물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거나 극적으로 전개하는 방식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깨닫는 순간들은 잔잔하게 찾아오며 그 깨닫기까지의 자잘한 디테일들이, 사소한 것들에도 마음 쓰는 연출이, 단단하게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영화는 꼭 보여주어야 할 것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여분의 장면들이 정말 필요했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결국엔 그 여분의 장면들이 정서 즉 분위기를 만든다. 로저가 아타오의 소중함을 새삼, 문득, 그리고 진심,으로 느끼게 하는 정서, 감정보다는 정서를 만들어 내는 감독의 연출이 감탄스럽다. 흔히 일상을 닮은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 같다고도 하지만, 매 상황에서의 파르르한 정서적인 느낌 때문에, 그래서 연출의 힘이 느껴지기 때문에, 훨씬 더 영화적이다. (이 정서라는 것은 친밀할 수도 있고 낯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스크린 안과 밖의 공기를 다르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방식이 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꼭 알맞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요소도 갖고 있겠다) 

로저는 아타오와 떨어져서 쓸쓸해졌고 그런 이유로 아타오 역시 쓸쓸해졌다. 하지만 아타오의 쓸쓸함은 로저의 것과는 조금 달라서 그 쓸쓸함보다 좀 더 깊고 무거운 것이었다. 내가 죽음에 가까워져 간다는 인식, 거기에서 오는 쓸쓸함이었다. 일평생 누군가들을 돌보여 헌신했던 그녀는, 열심히 살았기에 스스로를 아꼈고 사람을 사랑했기에 밝았다. 병 앞에서 조금씩 무너지면서 그래서 많이 슬퍼하면서도 잘 웃고 남을 배려하고 소녀 같은 그녀가 참 좋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 앞에서 품위를 유지한다. 로저도 그런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기에 곧 떠나갈 아타오가 많이 슬펐을 거다. 로저도 제 최선의 예의를 갖춰 아타오의 품위를 지켜준다. 죽기 얼마 전 휠체어에 앉아 몸을 못 가누는 아타오가 구운 거위 볶음면이 먹고 싶다고 하자 로저는 별 반응도 않고 돌아서서 쓰레기를 버리러 걸어간다. 그러는 그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바라본다. 로저가 전혀 티를 내지 않지만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는 눈물이 났을 거라고. 

감정에 북받친 로저가 아타오의 품에 안겨 울지도, 죽어가는 아타오가 결국 무너지며 외롭다고 외치지도, 그러지 않아서 그래서 참 좋았던 영화. 사람과 사람 간의 친밀함, 친밀한 만큼의 거리, 인간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그만큼의 거리.

*가장 좋았던 장면은, 밤거리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 그리고 로저가 아타오의 손을 잡아 뒷짐을 질 때, 그 다정함.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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