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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일상 2018. 12. 14. 01:12


어제는 노란뿔테였는데, 오늘은 테가 없는 안경을 끼고 있다. 남자는 최근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한 달 새 안경이 바뀐 건 세 번째다. 하나같이 얼굴에 맞지 않아 보인다. 내가 남자를 지켜본 지도 일 년이 지났다. 퇴근이 빠르면 8시, 늦으면 9시, 10시, 때로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그를 만난다. 아니 본다. 지하철 2호선에서 내려 발뒤꿈치들을 따라 계단을 오른 뒤 화장실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피해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개찰구를 통과하고, 그러고도 열 걸음 정도 더 걸으면 집으로 가는 방향의 출구가 나온다. 그 출구로 나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꺾기 직전, 뚜렷한 이목구비에 짙게 화장한 모델의 얼굴이 커다랗게 박힌 화장품 광고판 아래가 바로 남자의 자리다. 나는 오늘도 남자를 스쳐 지나간다. 스쳐 지나가면서 본다. 보는 걸 들키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고 싶다. 오늘은 어떤 안경을 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물론 옷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모양으로 앉아 있는지, 곁에 얼마나 많은 봉지를 늘어놓았는지, 머리카락이, 눈썹이 얼마나 자랐는지 구두코는 얼마나 닳았는지 나는 매일 그런 것들을 빠르게 탐색한다. 남자는 보통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거나 모로 누워 주위를 응시한다. 가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꼭 바닥에 볼을 대고 있는 채로다. 바닥의 서늘함이 좋거나 어쩌면 신발 굽 소리를 듣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남자는 검은 봉지에 얼굴을 박고 무언가를 먹고 있다. 얼굴에 맞지 않은 안경은 흘러내릴 것 같다. 그 위로 희끗하고 풍성한 눈썹이 꿈틀거린다. 봉지가 커졌다 줄어들 때마다 눈썹이 흩날린다. 남자의 몸에서 유일하게 생명력이 느껴지는 존재. 눈썹은 계속 자라고 언젠가 머리카락보다 더 길어질 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리며 남자의 주위를 지나간다. 오늘도 주위에는 봉지들이 늘어져 있다. 퇴근이 늦은 언젠가의 밤이었다. 한적한 역사 안을 한 남자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지 바닥을 노려보며 손으로 뭔가를 붙잡고, 붙잡고 하며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에 채이곤 하는 먼지와 머리카락 뭉치였다. 남자는 먼지를 붙잡아 봉지 안에 가두었다. 형형색색의 봉지들이 남자를 따라다녔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파카를 입은 사람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라고, 아니 슬프다고, 아니 그보다는 우울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내 발길을 돌려 출구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남자가 뒤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번화한 역 주변을 걸으며 남자는 봉지와 담배꽁초를 주웠다. 봉지는 야무지게 말아 주머니 깊숙이 넣었고 담배는 구석에 앉아 피웠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계속 응시했는데 거리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펼쳐져 있어서 그가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상품 매대 사이에서 남자가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남자는 컵라면을 집어 계산대로 가서는 지폐를 건넸다. 건넸다가 도로 가져가서는 손으로 여러 번 잘 펼쳐서 다시 건넸다. 점원이 동전을 거슬러줬고, 남자는 동전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고, 주머니 깊숙한 곳을 탐색하는 손을 따라 고개는 점점 바닥을 향했다. 계산대 앞을 막은 남자를 점원이 더 이상 못 참아줄 즈음 그가 다시 신중하게 꺼낸 손에는 한가득 동전이 있었다. 남자는 손바닥을 좌우로 몇 번 흔들어 동전을 정렬시킨 뒤 계산대 앞의 기부함에 동전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점점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툭 툭 동전이 동전들 위로 하나씩 떨어지는, 신속하게 낙하하는 소리만이 내 귀를 울렸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밖으로 나온 남자는 익숙하게 건물의 귀퉁이에 쪼그려 앉았다. 라면을 먹는 남자를 계속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 이후 퇴근할 때마다 남자를 본다. 남자는 며칠 자리를 비우기도 하는데 전보다는 깨끗해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한 달째 남자는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먼지를 줍느라 손끝이 까맣다. 이제 남자를 스쳐 출구로 올라가는 찰나, 무심코 남자의 자리에 발을 디뎠다. 선 채로 내려다보이는 남자는, 작다. 무척 작다. 누구에게도 위협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가까이 다가선 나를 남자가 올려다보려는 순간 나는 광고판의 모델로 눈길을 돌린다. 가지런한 눈썹 아래 크고 까만 눈동자 안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난 모델에게 시선을 유지한 채 빠르게 자리를 피한다. 나는 매일 그를 관찰하며 남자가 살아온 시간을 가늠해본다. 지금의 자리를 잡게 된 사연을 짐작해본다. 기부함으로 동전을 하나씩 떨어트리던 그 마음을 궁금해한다. 다만 궁금해하고 짐작해볼 뿐 나는 그저 포물선을 따라 남자 주위를 지나갈 뿐이다. 남자의 시선이 되어보고 싶지만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두렵다. 지금처럼 매일 남자를 스쳐 지나가겠지만 만나지는 않을 작정이다. 사람들의 발뒤꿈치를 따라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다. 바깥의 더운 열기가 전해지자 하루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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