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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9.18 사물의 상처

  새벽에 설거지하는 습관이 들었다. 원룸인 내 작은 집에서 방 쪽의 불은 끄고 부엌의 불만 켜두면 마치 캄캄한 무대에 조명 핀 하나만 켜둔 것 같다. 탁, 탁 하는 스위치 바꾸는 소리에 요란하게 돌아가던 냉장고도 소리를 꾹 참고, 고요함이 집 안 전체에 깔린다. 앞치마의 끈을 야무지게 묶고 고무장갑을 손가락 끝이 닿도록 당겨 올린다. 경건한 의식처럼 다루게 되는 이 시간이 나는 좋다. 예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접시와 그릇의 무늬도 이 시간만은 눈에 잘 들어온다. 설거지를 하다말고 그것들을 오래 쳐다보기도 한다. 값이 비싸 오래 사먹지 않던 계란을 사서 저녁식사로 후라이를 세 개나 해먹었다. 덕분에 오래 쓰지 않던 프라이팬과 뒤집개를 꺼내 썼다. 수세미를 프라이팬 바닥에 대자 검은 칠이 벗겨져 나왔다. 뒤집개의 끄트머리에 엉겨 붙은 계란 찌꺼기는 그새 굳어버려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수세미를 뒤집개에 대고 힘주어 문질렀다. 버둥거리는 뒤집개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싱크대에 뒤집개와 수세미와 주먹이 시끄럽게 부딪쳤다. 마침내 엉겨 붙은 것들이 시원하게 떨어져 나가고 몸에 힘이 풀리는 순간 손에 까끌거리는 감촉을 느꼈다. 뒤집개의 손잡이에는 징그러운 흠집이 있었다. 여린 피부에 칼로 죽죽 그은 듯한 상처였다. 갈색인 손잡이에 회색의 재질이 흉측하게 노출돼 있었다. 그 창백한 색을 바라보는데 순간 어릴 적 칼로 내 손을 푹 찔렀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자려고 누웠는데 또 사과를 먹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자꾸 과일이 먹고 싶은 게 부끄러웠다. 먹어도 계속 먹고 싶은데 그렇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 모두 잠든 컴컴한 집안에서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갔다. 구석에서 과일이 담긴 오봉을 찾았지만 과도는 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식칼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과일 껍질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끝까지 깎는 건 나만의 주문을 거는 일이었다. 해내고 나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믿음. 어느새 나는 부끄러운 것도 잊고 과일을 깎는 행위에 집중하던 찰나 칼이 미끄러졌는지 왼손이 적절하지 못한 곳에 있었는지 그만 검지에 칼이 푹 들어오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아마 신경까지 끊어졌으므로, 이상하게 자꾸만 상처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선명한 느낌은 그저 내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피의 궤적이었다. 나는 손가락 굵기보다 두껍게 휴지를 감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깎아둔 사과껍질처럼 자꾸만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싶었다. 뒤집개의 흠집은 칼자국이 아닌 화상 자국 같았다.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지진 것처럼 세 줄의 상처가 툭 벌어져 있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생긴 상처일까. 이제는 아물어 희미한 선만 남은 손가락의 상처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 사물의 상처는 고쳐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내 상처 봐라, 하고 히죽 웃으며 놀래킨 걸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상처의 표정을, 나는 흐르는 물에 갖다 대고는 오래 쳐다보았다. (2017)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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