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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03 도살장 앞에서
  2. 2024.01.17 2023년 2월~4월 인도에서
  3. 2024.01.16 단편들1 제작 일지 1
  4. 2023.12.30 일하는 모습
  5. 2023.01.24 제작일지
  6. 2023.01.24 첫 영화 제작기 1
  7. 2021.08.12 세노테
  8. 2021.02.09 꿈+
  9. 2020.12.06 경계
  10. 2020.10.12 덕분에

도살장 앞에서

일상 2024. 3. 3. 18:44

나는 카메라를 그만 내린다. 그리고 고향집에서 챙겨온 내 오래된 옷을 가방에서 꺼내 트럭 위로 올라간다. 여전히 가뿐 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이는, 많이 고통스러운지 몸을 뒤틀며 몸부림치는, 눈앞의 이 어린 돼지를 옷으로 감싼 뒤 뒤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태어나 6개월이면 죽임 당하는 돼지의 크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주 아기는 아닌, 다행히도 내 품에는 꼭 맞는 이 돼지를 도살장의 계류장으로부터 도피시킨다. 도망친 곳은 도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의 작은 화단. 흙 위에 그를 눕힌다. 돼지를 치료해야만 한다. 살릴 수 있을까. 받아 줄 동물병원이 있을까. 이런 구조는 돼지의 고통을 연장시키기만 하는 게 아닐까. 이제 어째야 하나.

아, 여기서 상상이 더 이어지지 않는다. 상상해. 예상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2분째 내 폰에는 죽어가는, 아니 아직 죽지 않은 어린 돼지의 모습이 녹화되고 있다. “돼지 아직 살아 있어요” 나는 트럭 위를 올려다 보며 말한다. “죽었어”. 잘못 들은 걸까 의심하는 사이 트럭 위와 계류장을 오가던 장화들은 사라지고 없다. 살아 있는데, 그것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왜 죽었다고 말하는 걸까. 전쟁터 같다. 죽은 시체와 아직 살아 꿈틀대는 몸들이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어 있는 곳. 사실 보고 있는 이 순간 심한 동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런 장면은 이미지로 접할 때 마음이 더 괴롭지 정작 현장에서 보고 있을 때는 사진과 영상으로 볼 때 만큼 괴롭지는 않더라. 그래서 반대로 이미지의 힘이 강력하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 보고 있는 이 돼지의 고통이 내 몸에 영원히 각인될 거라는 건 알겠다. 죄책감, 무력감과 함께.

자루 안에 돼지들이 담겨 있었다. 어떤 돼지는 하체가 밖으로 나와 있었고, 몸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아직 죽지 않았다. 아니, 아직 살아 있다. 그 위로 자루에 담기지 않은 검은 돼지가 눈을 뜨고 있었다. 돼지의 눈은, 돼지의 눈은, 돼지의 눈은… 친구의 말대로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눈” 같다. 온몸이 젖어 있다. 양돈장에서부터 이미 죽어 가는 어린 돼지들을 아무렇게나 담아서 도살장에 보낸 걸까. 아니면 이곳에 와서 무슨 일을 당한 걸까. 여기까지 이동시간도 길었을 텐데 이 상태로 계속 버텨야 했던 걸까.

죽은 돼지의 등에서 엉덩이로 내려가는 동그란 곡선이, 트럭 난간에 얹어진 돼지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마치 곤하게 자고 있는 내 반려동물의 모습과 같았다. 그 이미지가 겹쳐지자 일순간 마음이 찌르듯 아팠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비슷해서 더 연민을 느끼는 내 감정은, 인간의 심리는 되도록 존중하지 않으려 한다. 접촉면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도.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이 돼지의 몸은 인간의 몸과 다를 게 없지 않냐고. 너무 비슷하다고. 이 몸들에서 엄청난 괴로움이 발생하고 있다.

다시 이곳에 왔을 때 그 사이 돼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소독을 위해 계류장의 입구마다 수시로 물을 분사하고 있었다. 물의 압력에 밀린 걸까. 몸부림치다가 떨어져버린 걸까. 아까 눈을 뜨고 있던 그 돼지일까. 트럭 기사와 직원들이 없는 틈을 타 빠르게 다가가본다. 눈에서 피가 흐른다. 아직 살아서 몸을 떨고 있다. 하필 땅에 물이 고인 자리에 돼지의 코가 닿아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 안 되겠다. 몸을 밀어서 옆으로 옮겨주자. 옮겨주자. 옮겨주어야 한다… 차마 손으로 못 하겠으면 발로라도 해주자. 그런데 지금 코에 물이 닿는 고통을 없앤다고 이 돼지에게 어떤 도움이 되나. 차라리 빨리 죽는 게 그로서는 고통을 그만 멈추는 길 아닌가. 그런데 대체 이 도살장이라는 곳은 뭐하는 곳인가. 동물을 죽이는 곳. 그래, 죽이는 곳. 죽이는 게 왜 이렇게 쉬울까. 왜 이 동물들의 목숨값은 이리도 하찮은가.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은 예외 상황도 아니잖아. 매분 매초 벌어지고 있는 축산업의 현실인데. 인간이 만들고 묵인하는 시스템인데. 지난 한 달 간 국내에서만 2백 만 명의 돼지를 도살했다. 내가 본 돼지와 같은 도태된 동물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도살장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익숙한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왔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벽 너머로 거대한 학살이 벌어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에 조금 현기증이 났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너무 무겁고, 동물들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 가볍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야 눈물이 푹푹 났다. 몇 년 전 생각이 났다. 다른 지역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늦은 밤에 사람들과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괴기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었는데 그건 발정 소리는 아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고양이를 무서워해서 우리는 빠르게 그 거리를 지나갔다. 마음이 계속 쓰였던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그곳에 다시 갔다. 골목 한 쪽에 누더기가 된 고양이가 웅크린 채로 있었다. 밤새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쳐다보자 울었다. 몰골이 너무 참혹해서 나는 오히려 물러났다. 골목 반대편에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사진 한 장만 찍고 돌아갔다. 구조를 해서 치료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오늘도 중요한 촬영을 해야 하고 그렇다고 지역의 캣맘들에게 연락할 여력도 안 되고 등등... 결국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서 울었다. 촬영도 잘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그 고양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가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로 아픈 고양이들을 더 지나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자루에 담겨 뒤엉켜 있던 돼지들은 작은 포크레인에 실려 육가공 공장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집에 가려다 못 가고 또 다시 들렀을 때 그걸 보았다. 돼지들이 실린 포크레인 버킷 위로 팔락거리는 귀가 보였다. 슬프게도, 바람에 흔들리듯 살랑거리는 그 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삶 사는 동안에도 좁은 시설에서 온갖 소음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귀.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로만 인간에게 소비되는 돼지의 몸이 한때 분명 살아있었고 살고 싶어했던 존재라는 것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살아있는 축산(피해)동물의 몸, 인간의 이익을 위해 무수히 죽임 당하는 그들의 몸이 더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

https://youtu.be/o83NLKNCIKM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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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에 자필로 쓴 여행 메모. 

-2월15일 밤11시 15분에 인천공항에서 이륙했다. 지금은 16일 자정이 조금 넘었다. 이번 여행은 전혀 예열하지 못하고 그저 약속 지키듯 떠난다. 소중한 존재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간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심적으로 차분해지기. 미술관과 박물관 많이 가기. 함피, 시킴, 케다르나스에 가기. 그리고 다시 맥간에 머물기. 사실 너무너무 가고 싶던 곳들이잖아. 

-새벽 5시경 싱가폴 공항에 도착했다. 허리가 아파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직까지도 떠나왔다는 실감이 안 나고 덤덤하다. 설렘이 없는 여행의 장점은? 

-어제 인천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바로 보이던 항공사에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 무슨 항공인가 보았더니 Turkish. 터키 항공. 긴 대기줄 옆에서는 사람들이 옷과 각종 물품을 박스에 싸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큰 지진이 난 터키에 더 이상 피해가 없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 것에 마음 한편 위로가 된다. 

-읽는다. 
“볼라뇨의 용기는 작가가 자기도 모르는 곳에 고개를 들이밀 줄 아는 것, 뒤샹의 무관심은 기성 미술계가 뭐라 하든 관심 없다, 나는 그냥 내가 하는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지돈)

-지금은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지난 16년도의 여행 이후 크게 달라진 건 내가 고양이와 산다는 것, 그리고 캣맘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매일매일 돌봄을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떨치고 여행을 왔다(물론 Y가 해주기에 가능하다).

-이번 여행은 일상처럼 이어진다. 떠나기 직전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아 여행 준비를 충분히 못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기대된다. 이번 여행에서는 구글지도의 덕을 많이 볼 것 같다. 모든 배낭여행자들이 사용한다는 그 흔한 구글지도도 안 보고 돌아다녔다. 그래서 손발이 고생했지.  

- 비행기는 땅에 닿지 않고 이동하는 운송수단이잖아. 하지만 불안정한 대기 때문에 덜컹거릴 때만은 중력 같은 걸 느껴. 이 생각을 하다가 잊고 있던 곤붕이가 생각났다. 한때 내가 속해 있던 공동체의 로고였던 곤붕이. 물살이이기도 하고, 새이기도 한 곤붕이.   

전설적인 큰 물고기인 鯤(곤)과 큰 새인 鵬(붕). 북극 바다에 사는 곤이 새로 변하여 붕이 되는데, 그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고 태풍이 불면 하늘 9만 리를 날아 올라 6개월만에 남극 바다로 간다 함.<장자莊子 내편 소요유內篇逍遙遊>
[네이버 지식백과] 곤붕 [鯤鵬]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승객 모두 착륙 준비를 마친 뒤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이제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면서도 끝없이 지연되는 시간이다. 가장 졸릴 때. 

-2/16~17. 뭄바이. 
어제는 17,000보, 오늘은 20,000보 넘게 걸었다. 구글지도를 사용할 수 있어서 끝내 목적지를 찾기는 한다만 찾는 과정에서 헤매는 건 여전하다. 7년 전 중국 여행에서 정말 많이 헤맸다. 그곳은 더 더웠고, 결국 목적지를 찾지 못 한 적이 많았다.

-도시 뭄바이에서는 낮동안 소들이 길가에 묶여 있다가 저녁이 되면 그 자리에 사라지고 없다. 어디로? 거기서도 묶어두나?

-사람이 대접 받는 만큼 동물도 그래야 한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걸 동물도 누려야 한다. 이게 동물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본 바람일 것이다. 

-천차만별인 인간들의 인식을 평균적으로나마 강제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게 법과 제도일 텐데, 세상 어느 국가 중에 '무엇에 대한 인식이 가장 높은 사람의 기준'에 맞춰 법을 만드는 곳이 있을까? 아니, 이건 파시즘의 문제와는 다르다고. 

-다라비 투어를 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빈민가 중 하나이고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 웬만해서는 이런 투어 잘 하지 않는데 거주민들이 만든 NGO라고 해서 도움이 될까 하여 신청해 보았다. 다라비에는 수많은 가계 기업이 있고, 거주자를 고용하는 비공식 경제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해도 일해도 가난한 곳. 

-동물들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고양이도.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이건 정말 큰 차이 같다. 

-이틀째 인도의 거리 음식만 먹었는데 속이 멀쩡하다. 더위에 하도 걸었더니 손이 좀 부었네. Y가 길냥이 급식소를 처음 챙기는 날인데 잘 완료하면 근심 하나 덜겠다. 

-뭄바이에는 나무가 많고 무척 높다. 이곳은 점점 더 더워지겠지. 길에 사는 동물들도 얼마나 더울까? 소는 왜 묶어 두는 걸까?

-엄청난 차, 매연, 소음. 숨 막힐 것 같아도 도시 사이사이에 녹지가 많다. 

- 아마도 퇴근 시간. 대도시의 거리에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다. 횡단보도도 없는, 8차선은 되는 넓은 도로 가운데에 분수대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곳이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다. 분수대의 동상 위에 한 남자가 물을 뿌리며 청소를 하고 있고 온 사방에 물빛이 퍼진다.   
 
-분수대 앞 난간에 노인이 걸터 앉아 있다. 개가 다가온다. 노인은 종이에 싼 무언가를 건네고 개는 그걸 받아 먹는다. 묵묵이 진득하게 먹는다. 크고 희고 검은 무늬를 가진 개. 밥이 사라지자 무게 잃은 종이가 날아가려는 찰나 노인이 그걸 붙잡아 가방에 넣는다. 개는 자기 앞에 놓인 우유까지 다 마시고는 뒤돌아 벤치 너머의 작은 풀밭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누워 있는 한 남자의 옆에 자리를 잡는다. 눈을 감은 남자는 손만 뻗어 개를 쓰다 듬는다. 둘은 바짝 붙어 있다. 이제 한 여자가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여자는 옆가방에서 작은 통을 꺼내 손바닥에 사료를 부어 노인에게 건넨다. 노인이 그걸 받아 바닥에 두자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먹기 시작한다. 아마 매일 반복됐을 듯한 익숙한 행동, 오래된 관계. 크고 희고 검은 무늬의 개가 있던 자리에 이번엔 갈색 개가 다가온다. 노인은 두 번째 종이 뭉치를 꺼낸다. 개가 밥을 먹는다. 이때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지나간다. 밥을 먹는 갈색 개를 발견하고 예쁘다고 환호한다. 이들 바로 뒤로 두 인도 아이들이 뒤따르며 말한다. “기브 미 머니~”, “기브 미 머니~” 약간의 정적 후 그들 뒤에 대고 노인이 소리친다. “돈 기브 머니!”.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감는다. 일순간 빛나던 회색빛 눈동자. 노인은 혼탁한 눈을 다시 감았다 천천히 뜨며 갈색 개 앞에 우유 그릇을 건넨다. 

-2/19 일. 뭄바이에서 함피로 왔다. 버스로 17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함피 TRISHUL 레스토랑에서 바나나 포리지를 먹고 있다. 방금 짜이도 시켰다. 『달걀과 닭』을 마저 읽으며 이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좀 더 보내려 한다. 그리고 숙소로 가 낮잠을 자고 볕이 좀 순해지면 바위산을 보러가야지. 여행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 

-여행지에서도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편히 머물 수 있는 숙소, 식당, 카페가 있어야 한다. 마음 둘 데 없이 부유한 상태에서는 오히려 무엇도 즐기기 어렵다.  

-동물운동을 하는 지인이 피고로 기소된 동물보호법 관련 재판 결과를 읽다가 “수단은 목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익숙한 문장에 멈춘다. 수단은 목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라... 법의 심판을 받더라도 운동에 있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그 목적에 대해 치열하게 점검하고 성찰해야 할 테고. 어쨌거나 법의 처벌을 감수하고도 운동하는 게 활동가들이고, 난 여전히 거기에 끌린다.  

-정해진 날짜에 생리를 한다. 첫 배낭여행 때는 첫달에 생리를 안했었다. 7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왔는데도 몸이 인도를 익숙하게 느끼나 봐. 

-어제 사원 안을 걷다가 오래 전 여행에서 썼던 문장이 생각났다. "하루하루 행복하고 싶어서". 

-2/21 화. 함피에서 비탈라 사원으로 가는 길이 너무 좋다. 한적해. 눈앞의 보이는 뷰의 구도가 완벽해. 보이는 곳 어디에 프레임을 만들어도 훌륭해. 그렇게 보고 싶던 큰 돌들 맘껏 본다. 아, 유구하다. 장구하다. 

-벤야민의 글을 읽다가 ‘동물원’ 얘기가 많이 나와서 기본소득당의 어스링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기억이 났다. 동물권 활동으로 동물원에 갔는데 마음 한켠은 놀러가는 것마냥 살짝 설레서 부끄러웠다. 같이 걸었던 사람들이 동물들의 처지에 대해 한탄, 한숨, 경악 등을 멈추지 않아서 ‘난 저 정도는 아닌데...’ 생각했지. 그들의 반응이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서 주변 보기에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내가 너무 바꼈네?!.

-어제 비루팍사원에서 인간들의 머리에 코를 갖다대며 은총을 내리는 ‘제스처’를 하던 코끼리를 보며 이건 일종의 학대가 아닌가 싶었고 난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이런 내가 불편하겠지. 어제 알게 된 인도인 제리에게 elephant is hard, maybe.라고 말했더니 그는 “음... 그럴 수도 있지만 그의 눈은 행복해보였다”고 말하더라. 아무래도 그런 답은 좀 이상하지만. 

-2/23 목. 함피에서 마지막 날. 
비탈라 사원으로 가는 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 새소리, 새소리, 새소리... 아무도 없다. 인간은 없다. 등 뒤로 먼 사원에서 경전을 외는 소리만이 들린다. 다양한 새소리. 살아 있는 나무, 흙, 돌, 바람, 공기. 이 장소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듣기보다 서둘러 사진과 영상만 남기려 하게 되네. 떠나려니 아쉬운 곳. 함피.

-2/26 일. 힘들게 콜카타행 기차표를 구해 가는 중이다. 30시간 넘게 걸릴 것이다. 내 자리에 두 노인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나는 몸이 구겨진 채 가고 있다. 굳이 비켜달라 하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내앞에서 인도인들끼리 말싸움을 한다. 한 인도 남자가 나를 위하려는지 노인들에게 화를 냈다. 돈 주고 자리를 산 외국인을 존중해야 한다?  뭐 그런 것 같다. 노인에게 화를 내는 남자에게 또 다른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뭐라 했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그런 걸까. 남자 노인은 화를 내고 여자 노인은 모른 척 한다.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 논쟁하는 것 같다. 아니, 싸우나? 힌디어라 못 알아듣지만 지금 어떤 분위기인지 알겠고, 말의 뉘앙스만으로도 내용마저 대충 알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난 멀뚱히 그들을 쳐다보다 문득 동물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개, 고양이처럼 인간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는 동물들의 입장 말이다. 그들이 인간 사이에 있으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정도는 파악하겠구나 싶다. 그렇다면 가축이라 불리는 동물은? 인간 사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감의 기회는 차단된 채 그냥 당하기만 하는 동물들 말이다. 서로의 감정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돼지, 닭, 소, 염소 등과 같은 가축은 인간과의 관계맺음 자체가 없잖아. 이들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뭘까? 밥 주는 사람, 죽이는 사람, 이렇게만 존재할 텐데.

-그러니까 콜카타행 기차를 타기 전 세쿤데라바드에서의 일이다. YMCA 숙소에 이틀을 묵었는데, 첫 날 새벽에 잠을 자다가 복도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와 개들이 짖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반쯤 잠든 상태로 그 소리에 집중하던 나는 ‘이제 도와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말소리가 들리겠지’ 하고 기다렸다.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하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무의식의 상태로 소리에 집중했던 여파가 잠에서 깬 아침까지 계속됐고, 아마도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환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이틀째 콜카타로 가는 기차표 구하려고 reservation complex이라는 곳에 왔다. 외국인 전용 창구는 없다고 한다. 한참 줄을 섰다 매표원을 만나면 대답은 노 티켓, 노 티켓, 노 티켓.... 분명 이런 방식이 아니라 덜 고생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도, 나는 노력해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미련함. 이 미련함을 의식하고도 내버려두는 내 게으름. 혹은 짓궂음.

-열어두기. 나를 더욱 더. 

-2/28 화. 세쿤데라바드에서 콜카타로 넘어오지 못할 줄 알았다. 어찌저찌 표를 구했고(어떻게든 해낸다!) 지금은 콜카타다. 도시만 오면 많이 걷는다. 2주째 정말 많이 걷고 있다. 하루 2만보 정도. 

-책 읽고 글을 쓰게 1주 이상 안착할 곳이 생겨야 할텐데. 그러고 보니 콜카타에는 모기가 없네. 내일은 시킴으로 떠난다. 

-거쳐온 도시에 대한 감상을 잊기 전에 메모. 
뭄바이: 시끄럽고 더럽긴 해도 품격 있다/ 함피: 절대 개발될 일 없을 것 같아/ 호스펫: 굉장히 번화한/ 하이데라바드: 강하게 각인되는 느낌은 없다/ 세쿤데라바드: 이슬람 도시라 특유의 느낌이 있을 줄 알았는데 경기도의 발전해가는 도시 같았다. 도시 뒷골목의 노는 젊은이들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네. 시끄러운 와중에 조용한 곳들이 좋았다. 교회나 골목들/ 콜카타: 많은 게 뒤섞여 있는데 뒤죽박죽은 아니고 질서가 있다.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데 공중의 그 모습이 부각되기보다 땅 위의 혼란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소리’에 집중. 이곳의 냄새는 이미 익숙하다. 

-“유년시절에 대한 글을 마치면서 벤야민은 이제 꼽추 난쟁이는 그의 일을 끝마쳤다고 적는다. 왜 벤야민은 자신의 유년시절 기록의 주체를 꼽추 난쟁이라는 상징적 인물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에서는 망각 속에서 사물이 취하는 왜곡된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망각된 과거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 혹은 낯섦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3/1 수. 친구 s를 만남. 우리는 약속 장소를 서로 다른 곳으로 생각해 한 번 어긋났다. 친구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뒤늦게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 왔는데 높고 높은 계단을 올라와 나를 부르는 그 친구를 돌아봤을 때, 아아 몹시 반가움. 우리는 시킴으로 갈 표를 사기 위해 뉴잘패구리역에 들렀다가 콜카타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오늘 s와 많이 걷고 쉴 때마다 이런저런 대화를 했는데 그중 내 마음에 남은 건 “경마장의 말이 몹시 추운 날 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얘기다. s는 경마장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 경마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에게 경마장은 일종의 학대 현장이다. 나는 과도한 육식 보다 놀이나 유흥으로 동물을 이용하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경마도 결국 도박에 말이 이용되는 건데 ‘소싸움처럼 싸움을 시키지는 않아서’, ‘원래 말은 뛰는 거니까’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덜 잔인하게 느끼는 걸까?  

-s는 수박을 좋아한다. 좌판에 썰어두고 파는 수박을 사먹다가 접시 아래로 너댓 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리가 불쌍한 표정을 짓자 주인은 ‘어쩌라고’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여러 조각을 다시 얹어 준다. 

-3/5 일. 어제 시킴으로 넘어 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고 싶던 지역이다. 수도인 갱톡에서 근교로 나가면 히말라야를 볼 수 있을 텐데 날이 흐려서 나간다고 해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난 도시에서 바로 히말라야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아침이니 밖으로 나가 봐야지. 새벽 6시 좀 넘어 일어나서 한국에서 하던 동물 단체 활동을 체크했다. 여행 왔다고 해서 동물에 관한 일을 잠시 중단할 수가 없네. 내가 관여돼 있고 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 싶으면 계속 신경 쓰고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응? 왜 이렇게 생각했지? 운동에 있어서 나 개인의 힘을 너무 믿는 걸 경계했던 걸까)

-여기 와서 영화 생각은 거의 안 하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하고 싶던 일은 현재 작업 중인 영화에 삽입될 글을 쓰는 거였는데. 맥간에서 오래 머물며 쓸까 싶다. 

-동료 감독의 부고를 들었다. 충격이고 슬프다. 친구랑 통화하다 조금 울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같은 창작자로서 친밀감을 느끼던 감독.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고양이 없는 일상. 

-오늘은 쏘공호수에 다녀왔다. 중국과 맞붙은 곳이다. “여기”라고 가이드가 내리라는 순간 주변 풍경에 당황스러웠다.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 도로가였기 때문이다. 인적 없는, 오직 히말라야 설산과 눈부신 빛깔의 호수가 기다릴 거라 상상했기에, 그래서 꽤 비싼 돈을 내고 여기까지 왔기에. 중국 국경에서 퍼밋을 까다롭게 검사해서 더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다. 다즐링에서부터 칸첸중가를 못 보고 있다. 날이 흐리기 때문이다. 날이 흐려서 히말라야를 보지 못한다. 히말라야는 높기 때문이다. 산이 높으면 구름에 가려지기 쉽다. 가리기 쉬운 것들은 보기 어렵다. 

-동물 운동을 하며 새삼 강렬하게 깨달은 것. 관여하기. 관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도는 새장에 새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가봐. 한국도 예전엔 많았던 것 같아. 어릴 적 엄마도 새를 키웠다. 새장에 있던 새들이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 새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여행을 다니더라도 일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 습하지 않은 숙소. 창문이 있는 숙소. 창문은 소중해...
둘.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카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문양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문양으로 영화 형식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의 눈이 공간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어느 한 점으로 중심을 찾아서 안정을 얻고자 하므로, 그 지루함과 불안정감을 없애기 위하여 공간을 메우려는 무늬가 나타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문양 검색해서 나온 정보. 


-3/7 화. 룸텍 사원에 다녀왔다. 기도하는 스님의 자세를 한참 보았다.
시킴에서 가장 가고 싶던 곳은 룸텍사원이었다. 기대하고 상상했다. 못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녀왔다. 발을 디뎠다. 보았다. 냄새를 맡았다. 촉감을 느겼다. 
기대하던 곳---------직접 그곳으로 가 마주한다. 나는 이 과정 자체를 즐긴다.  

-지금은 카페. 페북글 읽다가 옮긴다. 

“어쨌거나 뉴질랜드의 성매매법 개정안은 성노동자의 인권보호와 착취금지, 분야 내 개인의 보건 및 복지와 안전 증진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베이어의 의견에 어디까지 동의하건 그녀가 성매매 현장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염려하고 보살피고 개선하려 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이어의 그런 목표는 저도 공유하는 것이고요. 무수히 엇갈리는 의견 속에서도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함께 발을 디딘 공통의 토대를 확인하며 작별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긍심 속에서 평안하기를.”-신필규

특히 두 문장.
.무수히 엇갈리는 의견 속에서도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함께 발을 디딘 공통의 토대를 확인하며 작별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자긍심 속에서 평안하기를.


-이번 여행에서 나는 계속 비인간동물을 생각한다. 비인간동물을 본격적으로 염려하고 부터 인간사가 하찮게 느껴졌다.  인간사의 비극이 다소 시시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이 시시하다는 건 인간의 죽음보다 동물의 죽음이 더 슬펐다는 의미다. 그렇게 2년 넘게 보냈다. 지금은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무엇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 상태. 즉 모든 생각이 다 동물로 환원되는 상태에서 많이 벗어났다. 균형을 잡아간다는 건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인간동물에 많은 걸 의지하는 사회인데도 그들의 목숨은 인간에 비해 한없이 하찮다. 이런 시간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단해질 마음과 실천. 

-3/8 수. 시킴에서 실리구리로 왔다. 
여전한 건 세상 돌아가는 걸 알고 싶다는 마음.

-나는 인도에 왜 오지?

-3/10 금. 어제 바라나시로 왔다. 
기억에 대해, 기억이 드러나는 작용에 대해 생각 중. 몇 년 전부터 고양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최근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생 시절, 아이들 한 무리가 술렁이며 노란 고양이가 죽어 있다고, 저기 넘어가는 길에 고양이가 죽어있다고, 아주 큰일이 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 “고양이가 죽으면 꼬리 아홉달린 여우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고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난 이 이야기를 분명 학교에서나 하교 길에 ‘들었을 텐데’(직접 본 게 아니므로) 최근 이 기억이 떠오른 순간에 보인 이미지는 높은 곳에서 그 고양이가 죽어 있는 장소를 내려다 보는 풀샷이었다. 단층의 건물 위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고양이가 죽어 있는 곳을 나는 내려다 보고 있다. 고양이는 작은 무덤처럼 누워 있고, 다시 그 무엇으로도 태어날 것 같지 않다. 지금의 내가 그 자리에 서서 내려다본다. 이 장면은 30년 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상상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까, 그동안 무의식이 조금씩 완성해둔 걸까.    

-내가 동물에 관심이 생기고 과거 관련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평소 각인돼 있던 사건도 아니다. 신기하다. 기억의 작용이란. 얼마 전에는 어릴 적 차를 타고 가다가 운전석에 있던 이모가 창문을 열며 침을 탁 뱉고는 방금 죽은 고양이를 봤다며 재수 붙은 걸 떼내야 한다고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미신이 있었다. 아마 그때 난 동물이 가엾다는 생각은 안 했겠지?

-벤야민의 매력. 사람들이 왜 벤야민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겠다. 10년 만에 다시 읽는 벤야민의 글이 완전 새롭게 다가온다. 

-앞으로 10년간은 동물 공부, 다큐와 예술에 대한 더 치열한 공부. 이 두 가지를 계속 열심히 하기.

-“‘읽기’는 상당히 복잡한 심리적 인지 과정입니다”
내 다음 작업이 읽기의 형식이어야 하는 이유. 

-3/12 일. 계속 바라나시. 
(예전에 내가 일기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여행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느낌. 

“강이나 숲, 길도 내게는 살아 있는 고유한 존재들이었습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운명의 섭리, 혹은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인해 어쩌다 실감하는 상호 간의 연결성과 긴밀한 영향 관계. 나는 평생 이러한 것들에 매료되었습니다.”

“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자연에 뿌리를 두고, 맥락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쉬운 새로운 이야기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지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시 읽고 있던 『다정한 서술자』에서 옮겨둔 듯하다)


-3/14 화. 오늘 바라나시를 떠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기 좋았던 얼굴은 다즐링의 바이크 렌탑샵 여자 주인. 푸지에를 닮은 얼굴. 청자켓. 순한 얼굴. 웃을 때의 모습.

-바라나시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고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각자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공유하고 나는 다시 혼자 떠나기. 

-바라나시에서 현지의 다친 개들을 챙기는 한국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개박사님이라 불렸다. 여행지에서는 쉽지 않을 개입일 텐데 존경스러움. 

-바라나시에 작은 매점들이 많이 사라졌다. 정부에서 길을 넓히려고 상인들을 쫓아냈단다. 보상도 없는데, 상인들은 항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데모하면 경찰이 어떤 다른 이유를 걸어서라도 수감시킨다고. 민주주의 국가 맞나?

-special라씨를 먹고 일찍 잠들었다. 자다가 깼을 때 나는 왼쪽으로 모로 누워 있었는데 눈앞의 테이블 위 생수통에 비치는 무언가들이 마치 가까이 있는 듯 아주 크게 보이고, 아래층 리셉션의 소리도 크게 들리고, 등뒤에서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감각의 교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리는 경험. 이 재미. 

-졸리다. 오전부터... 문득... 식용견과 반려견은 다르다는 말, 그 논리가 화가 나네. 구분 짓고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들에 저항하리. 

-3/15 수. 아그라로 왔다. 다시 혼자. 
인도인들의 얼굴을 관찰한다. 부모와 닮은 아이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자녀 얼굴 한 번, 부모 얼굴 한 번 본다. 

-아까 타지마할에서 잠깐 졸다가 맥간을 생각했다. 맥간을 계속 생각했던 건... 사실 따져보면 특별한 기억이나 사건이 있던 것도 아닌데 맥간에 갔던 여행 이후 돌아오자마자 꿈을 꿨기 때문이다. 꿈에 나는 맥간에 다시 갔다. ‘아, 다시 여기 와서 너무 좋다’ 하며 눈앞의 땅을 밟은 순간 꿈에서 깼다. 꿈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이곳을 그리워 한다는 걸.   

-바라나시에서의 기억. 동물권에 대한 내 실천을 얘기하며 “난 비건이지만 내 반려동물의 음식으로 육식 사료를 먹인다. 이런 현실이다. 이런 모순을 안고 간다”라고 말하니 개박사님은 그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 그걸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증법적 사고처럼 말이다. 그런데, 해소한다는 건 뭐지? 내 사고에 한정된 노력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현실에서 더 나은 실천을 위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건가? 

-가수 도마 생각. 여느 인디밴드처럼 좋아하던 도마의 죽음이 아주 슬픈 것도 아니었는데 잔잔한 채로 오래 지속되고 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잊지 않는’ 상태인가? 도마 인스타 계정의 바라나시 사진과 '나를 위로해주던 풍경' 두 가지. 

-3/17 금. 
어제 아침에 눈을 떴는데 기분 나쁜 체기가 있었고 하루 내내 몸이 힘들었다. 겨우 일어나 델리 가는 버스표를 사고 아그라포트도 보고 왔다. 아그라포트, 멋있긴 하더라. 아그라에서는 숙소 루프탑에서 아침마다 짜이와 포리지 먹는 낙이 있었다. 옥상에서 맞는 아침의 바람도 참 좋았고. 

-소리. 동물 소리. 

-3/19 일. 10년만의 맥간. 설산으로 맞아주어 고마워. 

-새벽에 다람샬라에 도착해서 합승지프를 타고 맥간으로 왔다. 짐이 많은 스님들과 합승했는데 오는 길 내내 옆자리 스님의 향내가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향. 향의 내. 향 자체. 은은한 향. 몸에 배인 향의 내. 

-최근 들어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글을 꼼꼼히 읽자. 덜 읽어서 주요 정보를 놓치거나 대충 읽어서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티벳불교를 좋아하는데 티벳불교에서는 육식을 금지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 모든 게 완벽(?)하기를 바랄 수 없다.(완벽하다는 표현도 내 중심적인 사고일 거라는 경계를 한다) 이런 길을 걸어왔으면 이런 쪽으로 가야 하는데... 하는 것도 나만의 생각일까? 인권 운동 하는 사람들이 왜 동물권에는 관심을 안 갖지? 같은 것. 일단 이것 하나는 주의하자. 덩어리로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그 안의 무수한 차이가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기. 

-인도에서 거리 개들에 대한 먹이 급여 기사들 재밌다. 한국 가면 계속 찾아봐야겠다. 

-동물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착취 당하면 안된다(는 지향성)
지금은 이 거리가 너무 먼 것을 지적하고 좁혀가야 하지 않을까.  

-내 유서에 추가할 것: 장례식 음식에 육식은 뺄 것. 꼭 필요하지 않으니까. 

-3/20 월. 사원 주위의 코라를 반대로 걷다가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맞닥뜨렸다. 그 중 사원 입구에서 연주를 하며 구걸하던 가족도 있었다. 그들이 나와 가까워지는 찰나 남자의 품에 있던 세네 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장우산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는데, 이내 나는 떨어진 게 아니라 남자의 품에서 내팽개쳐졌다는 걸 알아 챘다. 아이가 주저 앉은 채로 울자 남자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 손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아이는 더 울었다. 아마 부모겠지, 아이를 때린 남자와 여자가 나를 스쳐지나갔고 여자 아이는 바닥의 장우산을 집어 들고 놓칠새라 뒤따라갔다. 스치는 순간 보았던, 무심한 혹은 무심한 척하는 갓난 아기를 든 여자의 표정. 해질녘이었고, 난 이 장면 때문에 하루의 모든 기분을 망쳤다. 이때의 내 감정은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는 분노가 아니었다. 내 안식처인 여행지에서도 가정 폭력을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짜증남. 이내 여자 아이와 여자 어른에 대한 걱정에, 빈곤의 문제와도 떼어낼 수 없는 그들의 상황에 슬픔이 밀려 왔다.  

-3/24 금. 아직 맥간.

-3/25 토. 밤새 계속 비.
어제 꿈에 여행 직전까지 장애인 활동 보조를 했던 사람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근육장애인인 H가 엎드려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타나 “아니 애를 아직도 안뒤집었냐”며 H의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과 몸이 오래 눌려 있어서 시커매져 있었다. 꿈에서도 내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코라를 돌고 있는데 어제 길가의 야채 가게 앞에서 만난 에스토니아인이 아는 척을 했다. 결론은 즐거웠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도 이 정도로 통하다니...하는 경험을 했다. 나를 잘 알아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나저나 이 친구는 어제 야채 가게 앞에서 왜 나에게 아는 척을 했지? 아는 사이도 아닌데.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 편하다. 물론 여기가 이국땅이라 그렇겠지만. 

-맥간에서 작은 개 하나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흔히 요크셔테리어로 불리는 개. 개는 원래 털이 빠져야 하는데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교배된 이 개는 인간이 잘라주지 않으면 털이 계속 자랐다. 하지만 이 개는 입질을 했다. 털은 계속 자라고 엉키고, 그 무거운 털을 달고 걸어 다닌다. 눈 상태도 나쁘다. 인간의 손길이 전적으로 필요한 동물을 만들어냈다는 게 너무 절망스럽다.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가능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실로 그렇게 하는 것인가”

-동물 운동 단체 대표의 강의를 듣다가, “사람한테 2천만 원 쓸 거 동물한테는 1백만 원이면 된다. 동물한테 돈을 좀 쓰자” 명쾌하다. 공리주의의 쓸모. 

-트리운드에 어느 한국인과 같이 올랐다. 30대 후반 남자이고 제주도에서 감정평가사를 한다고 했다. 본인 소유의 2층 집과 월세 받는 낡은 아파트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건축을 전공해서 건축 얘기를 하면 즐거워 보였다. 그래, 부동산과 건축은 다른데 말이지. 그는 15년 전 네팔 히말라야 14박 15일 트레킹을 하다 동행한 네 명 중 한 명이 10일째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서 이틀을 돌아가며 업고 다녔다고 한다. 같이 간 포터 중 나이 있는 포터는 죽은 시신을 절대 안 만진다며 가차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고.

-맥간은 춥다. 그래도 지낼만 하다.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침낭 속에 넣고 자면 밤새 버틸만 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데서 느끼는 행복감. 전기가 끊기면 물을 데울 수 없다. 그나마 낮동안 데워진 물이 페트병을 하나를 채울 정도는 되길 바라며 귀가한다.   

-에스토니아인과의 대화.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는 처음에 붓다를 sympathetic했다고 말했다. 동정, 연민햇다고? 그게 아니라 좋아하다, 호감을 느꼈다, 겠지? 그런데 붓다를 연민했다는 거 재밌다. 붓다도 연민 받을 수 있어. 

-3/27 월. 맥간 9일째. 테라스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좋아. 오늘이 가장 맑다. 맑다는 건 구름이 없다는 의미. 구름이 없는 걸 보고 사람들은 하늘이 맑다고 말한다. 

-심오하다. 물이 깊다. 겉의 물결이 일더라도 그 안에 있는 진짜 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내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 옮긴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   

-3/29 수.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블레싱을 받는다고 표현하더라. 신청한 지 하루만에. 복이다. 복이로소이다. 달라이 라마 존자님과 마주 앉았는데 함박 웃음이 터졌다. 그를 만날 때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나 보다. 정성스러운 외국인들은 티벳 전통 복장을 하고 왔다. 난 그저 편지 쓸 생각이나... 그것도 반입 금지라 전하지 못 했다. 까닥? 그거라도 하나 사왔어야 했다. 편지에는 무슨 티베트 문화 존중하겠다, 프리 티벳 이래놓고... 사실 달라이 라마 만나는 것보다 더 좋았던 건 두 한국인 여성을 만난 것이다. 그 중 한 분과의 깊은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날 것. 

-달라이 라마에게 블레싱을 받기 전날, 뭐라도 준비해야 하나 싶어서 엽서에 편지를 썼다. 당일인 오늘은 아침 7시까지 사찰로 갔다. 다들 까닥은 필수로 챙겨 왔고, 전날 만난 한국인은 티벳 전통 복장까지 정성스럽게 차려 입고 왔더라. 그때부터 나의 바보 같은 성격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미리 잘 준비하지는 않으면서 무리 안에서 내가 튈까봐, 틀렸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이 마음. 달라이 라마의 거처가 있는 마당에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거의 2시간을 기다렸다. 먼저 티벳인들이 축복을 받고 그다음에 외국인인 우리에게 기회가 올 때까지 나는 그 영광스러운 상황을 즐기지 못하고 여기 올 때 최소한이라도 챙겼어야 하는 까닥을 계속 생각했다. 나처럼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은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없었다... 집단 안에서 튀는 것. 규범을 지키지 못했을 때(그걸 원하면서도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 마음 어딘가 조여오고 초조해지는 걸 느끼고, 또 한편 그러고 있는 나를 반성했다. 그럼 애초에 잘 챙기든가... 아니면 당당하든가! 이런 내 자신이 참 재밌군. 정작 달라이 라마 앞에 섰을 땐 불안했던 마음 까맣게 잊고 빤히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달라이 라마가 손으로 머리를 만져주는 걸 블레싱이라고 해서 다들 고개부터 숙이던데... 철없다. 철없도다. 

-블레싱을 함께 기다렸던 p라는 한국인이 권유해서 오늘 새벽 사원에서 108배 하고 집단 독경을 보기로 했다. 막상 이른 새벽에 일어나 가는 게 쉽진 않았지만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사원으로 가서 함께 108배를 하고 사원 안에 앉아 함께 스님들 독경을 듣고 카푸치노를 마시며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념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걸 보니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하는 분이다. 힌두-불교-요가가 다 이어져 있다는 걸 배웠다. 그 배움의 계기가 된 아픈 개인사까지 들었다. 공감했고, 위로 받았다. 

-한국에 가면 티벳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봐야겠다. 아직 명상은 그리 끌리지 않는다. 순간 호기심은 들지만. 

-오늘 비가 많이 오네... 어제 보았던 어린 소는 내내 배고프겠다. 소들만 챙겨주는 사람이 있을까? 없는 것 같아 슬프다. 하지만 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야. 매이지 말자. 너무 가엾어 말자. 가방에 바나나랑 남은 개 간식을 다 주고 가야지. 이번 여행은 마음에 걸리는 동물들이 많네ㅜㅜ 맥간에서 한쪽 눈이 실명되고 털이 길고 엉킨 개랑 새벽에 개밥도 못 얻어먹고 내가 바나나를 주자 6개를 몽땅 받아 먹던 배에 털이 길게 내려온 어린 소. 

-영희, 노랭이, 서준이, 그리고... 잊지 말자. 

-4/6 목. 여행이 끝났다. 사진기에서 다시 소리가 난다. 찰칵찰칵. 인도에서는 폰카를 찍을 때마다 소리가 나지 않아서 좋았다. 그 소리가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겼는지 알지만서도, 어쨌든 막 찍는대서 느끼는 자유로움이 너무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물갈이도 하지 않고 아그라에서 체기로 하루 기력 없고 토한 것 빼고는 그냥 일상처럼 잘 다녀왔다. 


*이제부터는 구글 문서에 적힌 여행 메모.

-2.17
여행지에서의 첫 잠. 새벽 6시 45분인데 누운 채 깨어있다. 들어본 적 없는 새소리가 들린다.

-2.18
동물도 인간이 받는 대우만큼, 자원을 배분받고 다양한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다. 국가로 치면 인도는 어떤가?

-뭄바이에서 함피로 이동 중. 일상의 단절이 아닌 연속인 것 같은 이번 여행.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메마른 건지 내가 변한 건지, 현실에서 여러 바쁜 일들로 충분히 여행을 기다릴 만큼의 마음가짐이 안 된 건지, 서서히 달아오르는 건지. 설렘도, 두려움도 전 같지 않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떤가.


-2.19
처음 며칠은 모기 때문에 새벽 늦게서야 겨우 잠들었고, 어제부터 17시간을 버스에서 쭈구려 불편하게 잤으니 난 지금 엄청 피곤해야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 밥도 길거리 음식으로만 먹어서 부실할 텐데 배고픈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어떤 거지? 하지만 이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졸음이 쏟아진다.

-2.20
지금 머무는 함피의 kalyan 게스트 하우스의 베드룸은 무척 깨끗하지만 창문으로 멋진 뷰를 볼 수 없다. 이게 아쉬워. 뷰를 중시한다. 이 이유를 새삼 알겠어. 왜 사람들에게 창문 밖 뷰가 중요한가를. 밖을 볼 수 있다는 게 왜 중요한가를.

-2.23
해가 빨리 떨어진다

-2.24
50대 한국 여성인 Y님과의 길고 깊은 대화. "고정된 내가 있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지켜본다. 나라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음악과 같다. 계속 변하는 것이다" 등등. 
그와 대화를 하며 새삼 깨달은 건 나는 자족하며 사는 인간은 못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좀 더 나아지는 데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로 소통이 원활하지 못 하다. 뭐라고 하는지 대부분은 모르겠다. 흘려들어도 될 게 있지만 잘 알아들어야 일을 진척시킬 수 있는 일도 있다. 어떻게든 들리는 것만 이해하고 더듬더듬 일을 헤쳐 나간다.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 느낌? 나쁘진 않다.

-함피에서 만난 제리가 은근 생각난다. 하나의 장면 때문인데, 돌산 한가운데 함께 오래 앉아 있을 때 그는 갑자기 자기 발이 지저분해 보이는지 가방에서 흰 양말을 꺼내 신었다. 그의 움직이는 발, 손 매무새, 표정. 그는 나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의식하면서도 아주 솔직했다. 온 진심을 다해 나를 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집착으로 변하기 전에 도망쳤다.   

-2.25
사라 정 박물관에서. 문양을 만들듯 형식을 창조해보기. 

-이슬람교가 강한 지역은 여성들끼리 잘 돕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쿤데라바드에서. 시끄러운 도로변, 아파 보이는 개들, 지독한 매연만큼은 힘들었지만 시끄러운 곳을 뒤로 하고 조용한 곳을 찾았을 때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기쁨. 교회와 세바스찬 거리. 참을 수 없게 시끄럽고, 믿고 싶을 만큼 고요한, 세쿤데라바드.

-반드시 샛길로 들어가라.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한 곳으로 밀려들어갈 때의 기쁨. 아난드आनंद

-2.26
기차역에서 쥐 구경하기. 

-3.2
뉴잘패구리역으로 가는 기차 안. 이번 여행에서 꼭 가고 싶던 시킴에 가까워진다. 보고 싶던 곳에 가까이 거의 닿았을 때. 사진으로만 가고 싶어하던 마음이 실행으로 이어져 기어코 대면했을 때.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실망해도 괜찮아.

-3.4
실리구리에서. 바구니에 감금된 닭들. 구겨져 있는 닭들. 삐약삐약 소리가 나는 바구니로 손 하나가 들어가고 닭의 목덜미가 쥐어져 옮겨 진다. 칼이 목을 자르고 피가 푹 나오고, 뒤이어 침을 뱉는 소리. 지형의 모양 때문에 실리구리는 닭모가지라 불린다고. 나에겐 불편한 설명이다. 

-3.8
시킴을 떠나 다시 뉴잘패구리역. 이제 바라나시로 간다. 식당에서 릭샤를 타고 역으로 이동하는데 사거리에서 잠시 멈췄다. 내 오른쪽 시선에 한 남자가 무언가를 맞히는 시늉을 하는 게 보였다. 던질듯 말듯 하더니 땅 쪽을 향해 손을 빠르게 뻗었다. 무언가 던진 자리에 개가 자고 있었나 보다. 1, 2초 정도 흘렀나, 개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서더니 그 남자를 향해 짖었다. 화가 나서, 아프다고, 내가 들어본 적 없는 개의 비명소리로. 남자는 빠르게 뒤돌아 자신의 릭샤로 도망 갔다. 그를 향해 마치 서럽고 화나는 듯 고통의 소리를 지르는 개. 순간 화가 났지만 그 개가 도망가지 않고 인간을 향해 잡아먹을 듯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조금 감격스러웠다. 함부로 대하는 인간을 가만두지마. 항의해! 그 개의 모습과 소리가 안 잊히네.

-3.16
마투라 고고학 박물관. 작품 이름이 ‘적당한 있는 그대로의 설명’인 게 새삼 흥미롭네.
포도송이를 든 여자. 머리 없는 비슈누 상. 네 개의 얼굴 등. 매력적이야. 

-3.18
이번 여행에서는 덩어리였던 인도인들이 개별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많았다. (이제야?) 그리고 보다 안전하게 느낀다. 한 인도인이 해코지 해도 다른 인도인이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버스. 델리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승객들이 일어나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길래 왜인가 했는데, 와이퍼가 없다. 흐릿한 시야로 계속 달리는 버스... 두 직원은 안쪽 창문만 닦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꾸역꾸역 버스는 나아간다. 걱정스러운 건지 비가 신기한 건지 계속 일어서 있는 사람도 있다. 10여분 지나자 갑자기 하늘이 쨍쨍해졌다. 갑자기 신나는 음악이 들리고 뭐가 좋은지 따라 부르는 사람들, 심지어 옆 사람 무릎까지 두들기며 낄낄대고 노래 부른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계속 버스를 몰고 나아가는 힘, 뭘까? 그저 막무가내인 건지, 경험에 의한 건지.

-3.19
오늘 남걀사원에서 문득 생각한 것. 나와 영화의 관계는 평등한가? 혹시 종교처럼 신과 신자의 관계인가? 

-동물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부당하다고 느낀다구요.

-도덕성 높은 인간이라 비건 실천을 한다: 이 말이 마음에 안든다. 무언가 더 고양된 상태라서 그런 의식을 갖는다고 ‘치부’되기 때문에. 난 동물에 대한 인간의 고려가 당연한 상태가 되길 바라는 거지, 몹시 도덕적인 인간들의 취향이나 활동 같은 걸로 다루려는 게 싫다.

-인도에서는 운전자에게 길거리 동물을 치지 못하게 규제하는데 한국은? 왜 운전자에게 조심하라고는 하지 않나?

-이미지의 위계 없음, 평등함을 얘기하는 게 왜 공부가 덜 된 생각인지 공부하기.

-3.22
맥간에서 다람콧에 올라왔다가 비가 내리고 우박이 내려서 못 내려가고 있다. 티샵에서 짜이 마시고 매기라면도 먹고 오줌이 마려워서 투시타 명상센터로 와 시원하게 해결하고 지금은 천막 아래에 앉아 있다. 아, 춥다. 여긴 아무도 없나? 이 넓은 곳이 이토록 고요하다는 게 신기해.

-4.1
나의 카르마. 운명이자 업보. 

-한국인 wh의 이야기들. 스스로도 망상이라고 표현한 이야기들이 난 너무 흥미로웠고, 이 이야기들을 이따 밤에 친구에게 영상 통화로 들려줘야지 싶어 온 집중으로 다해 외우며 들었다.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높여주는 집중력. 영화 일도 그렇지. 

-4.3
Chamba에서 Jassur로 이동했다. 나란히 붙은 설산의 봉우리들이 멋졌다. 

-Jassur에서 강가의 천막촌을 향해 걸었다가 몹시 아파 하는 개를 봤다. 주변에 몇몇 청년과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천막촌의 주민들이 뭐라고 소리치고, 이내 한 남자가 포대를 갖고 왔다. 동행이 쉰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개의 상태를 본다고 귀를 한번 뒤집었는데 개는 꿱 소리를 지르더니 죽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쓰다듬어 주었고. 아프다고 아프다고 소리를 내던 개... 그런 건 처음 봤다. 쓰레기로 가득한 강가에서 뭘 잘못 주워 먹은 걸까. 그때 그 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포대 위로 올라갔다. 아... 대체 이게 뭔지 어떻게 알고 그 위로 올라가는 걸까… 두 남자가 들것처럼 포대를 양쪽에서 들고 개를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의 구석에다 두었다. 여기서 아끼며 돌보는 개 같았다. 은빛 목걸이도 하고 있었으니까. 어디 아픈 거냐고, 아니면 임신을 한 거냐고 했는데 힌디어로 해서 못 알아들었다. 그때 영어로 “우리는 이 개를 치료할 돈이 없다”는 한 청년의 말. 우리는 걸어가며 멀찍이서 포대 위의 개가 있는 곳을 보았다. 아픈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여웠다. 부디 그저 체한 거라서 크게 토하고 다시 회복하기를, 그게 아니면 크게 고통 겪지 않고 떠났기를. 아프다고 소리 지르던 모습, 목소리. 비틀거리며 일어나 스스로 포대 위로 올라가던 모습…

-우리는 그 장소에서 멀어졌고 강가 바위에 앉아 인도 담배를 나눠 피우며 천막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와 매를 한참 보았다. 내가 보는 것들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워 하던 검은 개의 몸. 은빛 목걸이를 달고 친구들과 맘껏 달렸을 검은 개의 행복했던 시간도 그 강가에 영원히 남아있겠지.



(끝)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단편들1 제작 일지

작업 2024. 1. 16. 13:24

*이 글은 『2017 독립영화 쇼케이스』에 수록된 글입니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Mom goes into her room>
[제작 일정]
촬영: 2014년 1월 30일 ~ 2월 2일(1회 차, 설) / 2014년 9월 7일 ~ 9일(2회 차, 추석)
편집: 2014년 10월 ~ 12월

[제작 노트]
-검정고시 공부를 하겠다는 엄마의 말에 가장 반기며 응원했던 나였지만 매일 전화로 궁금한 것들을 묻는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기가 쉽지 않았다. 매번 후회와 다짐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한 사람을 자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었다. 안방에서 등을 보이고 모로 누워 있던 모습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야간학교에 가는 모습. 어릴 적엔 그 등을 바라보고 따라 누워 있다 잠에 들곤 했다. 예순을 앞둔 엄마가 검정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하고부터는 교과서가 든 뚱뚱한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내 부모님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내 엄마도 학업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고 당연한 듯 아내, 엄마, 주부로 살았다. 엄마의 삶을 나로서는 쉽게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오래 같이 생활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의 몸과 마음이 힘들 때가 많았다는 걸 안다. 그런 엄마에게 ‘방’은 비로소 평온하게 쉬거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고, ‘가방’, 즉 공부는 그를 좀 더 자유로운 곳으로 가게 해주는 매개로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신다, 도 되고 어머니 가방에 들어가신다, 도 되는 지금의 제목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하지만 자아실현(?)하는 엄마를 담으려던 애초의 구상은 촬영에 들어가자 조금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내가 카메라를 통해 촬영대상을 바라본다면, 촬영대상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마찬가지로 바라본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는, 촬영대상인 엄마에게 철없는 딸이었다.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감은 금방 무너졌고,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인물만큼 모녀라는 관계가 중요해졌다. 촬영본을 보며 엄마의 공부와 나의 영화 만들기, 내가 엄마에게 교과서 공부를 돕는 일과 엄마가 내게 꽃의 이름과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행위들이 겹치고 이어졌다. 그 카메라 어떻게 작동하는 거냐고 넌지시 물어오는 엄마의 말과 방에서 공부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역시 우리 모녀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하고 편집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엄마의 캐릭터다. 배우고 싶어 하는 호기심, 이 사람이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는 당당한 자세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개인적으로도 많이 배웠다. ‘공부’라고 했을 때 그 공부는 단순히 제도권 안에서 배우는 공부만은 아니다. 꼭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알려줄 게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 내 오만함을 반성했다. 

-집에서 독립한 지 십 년이 지났다. 당시 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고향에 가는 건 일 년에 두 차례 명절이 전부였다. 촬영을 충분히 할 수가 없었지만 오히려 이런 조건을 구성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반복 안에서 계절과 명절에 따른 차이를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큰 차이는 의도하지 않은 데서 생겼다. 바로 카메라. 촬영 1회 차인 설에는 지인의 DSLR을 빌려서 촬영했는데, 2회 차 추석 때는 사정이 생겨 소형 캠코더를 가져갔다. 화질의 차이보다 중요한 건 기동성이었다. 만약 캠코더가 아니었다면, DSLR에 능숙하지 않은 내가 야외에서 자유롭게 촬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에게 쉽게 카메라를 넘기는 것도 촬영법을 잘 알려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이 변한 조건 안에서 의외의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편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현장의 사운드다. 촬영된 화면이 불안정하더라도 놓칠 수 없는 엄마의 말이나 대화가 담겼으면 그대로 살렸다. 안정된 화면에 사운드를 입히는 식으로 정교하게 다듬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카메라가 앵글을 잡는 순간이나 흔들리는 장면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그게 전반적인 정서를 형성하는 데 더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늙은 연꽃 The old lotus>
[제작 일정]
촬영: 2015년 10월 31일 ~ 11월 1일(1회 차, 1박 2일)
편집: 2015년 11월 ~ 12월
장소: 경북 예천군 동송리

[제작 노트]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를 편집하며 마지막까지 고민한 장면이 있다. 친할머니와 마주하는 장면이다. 긴장하지 않고 시작한(나쁘게도!) 가족을 담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고 혼자 식탁에 앉아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마침 거실로 나온 할머니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나는 홀린 듯 카메라 녹화 버튼을 눌렀다. 할머니에게 카메라는 낯선 물건이었다. “이게 뭐냐?”, “너 이걸로 무얼 하느냐?”고 물으시며 자신이 나오는 걸 보고 신기해하셨다. 카메라를 매개로 짧고 깊게 소통하는 느낌이었다. 평소 살갑게 지내던 관계는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뭉클했던 것 같다.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지만 정작 영화와의 관계는 느슨해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불현듯 솟아오른 이 장면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고, 덕분에 <늙은 연꽃>을 만들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를 보았는데 할머니 장면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니, ‘할머니가 나오는 장면’이라기보다 ‘할머니라는 사람’이. 언제부턴가 할머니와 할머니를 둘러싼 문제에 계속 신경 쓰여 했던 나 자신을 마주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할머니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욕망, 욕심에. 늦기 전에 할머니가 자신의 집에 사시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었다. 행여나 언제 요양원에 가시게 될지 몰랐다. 내 할머니는 흔히 치매라고 알려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되면서 남들보다 빠르게 기억을 잃고 계셨다. 어릴 적부터 보고 들은 내 할머니는 평생 고된 노동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린 사람, 좋은 걸 취할 줄 모르는 사람, 자신을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억척스럽게 산 그녀를 주변 사람들은 대단하게 생각했지만, 너무 자신을 위할 줄 모른다며 어리석다고도 했다. 할머니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특히 가방에 짐을 너무 많이 넣어 다니거나 구석에서 불편하게 자고 있을 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걸 알았다. 어린 마음에도 왠지 그런 시선이 싫었다.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사람에 대해 평가 내리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건 태초에 존재했거나 아무것에도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영역의 것이 아닌, 삶이 쌓이며 만들어낸 지금 현재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일을 하는 동작과 잠을 자는 특징, 걷는 모양과 목소리, 또 주름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등을 통해서 말이다. 작업을 하는 내내 마음 한편에는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치매, 라고 했을 때 풍기는 부정적인 분위기, 그 말이 너무 강해서 정작 ‘사람’ 자체는 사라지기 쉬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싶다.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치매 증상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기에 할머니가 사시는 경북 예천까지 자주 찾아갈 수 없었다. 이번에도 제약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보자고 생각했다. 주말 이틀간, 네 번의 끼니를 할머니와 함께 챙겨 먹으며 틈틈이 촬영했다. 여러 번 촬영을 하는 게 오히려 할머니께 폐를 끼치게 될까 봐 1회 차가 마지막 촬영이라고 생각하며 진행했다. 촬영에 있어서 원칙 하나는 세웠다. 지난 작업과 달리 카메라 뒤의 내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 인물만을 골똘히 들여다보자.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 원칙은 조금 무너진다. 당시 장만한 HD캠코더에 서라운딩(surrounding) 사운드라는 독특한 기능이 있었다. 할머니를 둘러싼 주변의 분위기를 잘 포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 기능을 사용했다. 카메라 뒤에서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까지 들어간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한 채. 하지만 촬영본을 보는데 의외로 이 느낌이 좋았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일하며 내는 소리와 내가 주방에서 내는 소리의 리듬이 묘하게 조화로웠다. 관객들이 당장은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를 알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화면 속 노인이 있는 공간에 다른 존재도 있다는 걸 은은하게 드러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하는 일을 도와드리며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되도록 꼭 쓸 것을 염두에 두고 찍었다. 유모차를 끌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좇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조금씩 휘어지며 위태롭게 나아가던 때,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짝 돌아보던 순간, 턱을 만나 덜컹거리고 여러 번 다시 밀어 턱을 넘던 작은 사건 등. 고집스럽더라도 내가 현장에서 느끼고 있는 이 호흡을 편집에서 꼭 살리자고 생각하며 찍었다. 편집은 손으로 잡초를 뜯는 모습을 가장 중요하게 두고 시간 순으로 나열했다. 인서트 컷이라도 촬영한 순서대로만 이어 붙이자는 최소 원칙을 갖고 작업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전체 톤과 이질적인 것을 알면서도 넣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자꾸 마음이 기울었다. 여전히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영화 안에서 어떻게든 우리의 관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치사해진다고 생각했다. 

-인물을 재현하는 문제로 유독 고민이 많았다. 나는 비록 그녀의 생활을 통해 존엄을 보여주고 싶었다지만 모습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누추해 보일 수 있겠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시골의 낡은 집에 살며, 좋은 것들은 자꾸 물리고 가진 대로 지내는 것이 편한 노인의 모습은 사실 남루해 보일지 모른다. 과연 내가 인물을 존중하고 있는가. 기본으로 돌아가서, 내가 그녀를 제대로 재현하고 있는가. 편집하는 와중에 확신 없는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어차피 남루하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쌓아 온 삶의 한 단면이며, 내가 이런 모습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득력을 높여 나갈지가 이 작업이 내게 남긴 질문이다. 이 작업을 하던 당시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작업들을 많이 찾아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절실히 공감한 말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실의 전부인 사람들을 사진으로 어떻게 풀어낼지 정말 막막하지요. 험한 산을 들었다 놨던 기운을 보여 주고 싶은데, 얼굴이 드러나면 남루하거나 너무 목가적으로 비춰질까 봐 그건 싫고 뭘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한금선, 『우리가 사랑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다만 나는 사진이 아닌 영상으로 인물을 표현하기로 결정했고, 최대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호흡을 찾고자 했다. 잘된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완성된 걸 본 할머니는 한마디만 하셨다. “귀신같다.” 이 말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할머니의 성함이 ‘박노연’이다. 노나라 ‘노’에 연꽃 ‘연’ 자를 써서 ‘노연’(魯蓮). 아주 오랫동안 불릴 일이 없었을 그 이름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제목으로 옮겼다. 늙은 연꽃(老蓮). 할머니를 찍으면서 흔히 부정적으로 쓰이곤 하는 ‘늙었다’는 말이 굉장한 정직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박노연. 낮고 긴 걸음 뒤에 연꽃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기억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콘크리트의 불안 Anxiety of Concrete>
[제작 일정]
촬영: 2016년 1월 ~ 2017년 1월
편집: 2016년 9월 ~ 2017년 1월
장소: 서울 성북구 정릉동

[제작 노트]
-스카이아파트는 1969년에 지어진, 아파트 단지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건 십 년 전 한 인권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하면서였다. 그 당시에도 건물 상태가 나빠서 주민들이 걷다가 콘크리트 조각을 맞곤 했다. 재난위험등급시설 중에서 가장 높은 E등급을 받은 건물이다. 십년 만에 우연히 스카이아파트 기사를 접했다. 사진 속 모양으로 단번에 그 아파트라는 걸 알아보았다. 이 위험한 건물이 아직 헐리지 않은 것에 순간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이상하게 콘크리트의 물질성에 자꾸 마음이 갔다.

-그즈음 유년시절에 살던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스카이아파트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의 아파트였다. 지금처럼 고층 아파트는 없던, 소규모 단지의 아파트들만 곳곳에 건설되던 시기였다. 재개발된다는 소식만 무성하다가 이십 년 넘게 방치된 채로 낡아만 가는 중이었다. 놀이터는 풀로 뒤덮여 놀 수가 없게 되었고, 주민들이 앉아 놀던 벤치도 뜯겨 나갔다. 어릴 때 자주 보던 대추나무만은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만큼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 존재로. 이 작은 아파트에서 온 힘을 내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자꾸 아른거렸다. 

-촬영 초기에는 지금은 희귀한 형태가 된 스카이아파트의 모양과 집안의 구조 등을 주로 찍었다. 동의를 구해 한 주민분의 집 내부와 생활하는 모습을 찍기도 했다. 공간 자체에 집중해서 촬영하긴 했지만 내내 ‘나는 이 공간에서 무엇을 보고 있나.’를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있었다. 유년시절 이와 비슷한 공간에서 뛰어놀던 내 모습이었다. 오래전에 쓴 글이 하나 있었다. 불현듯 어릴 적 젖니가 흔들릴 때의 감각이 떠올라 써내려간 문학적 형식의 글이었다. 콘크리트라고 했을 때 느껴지는 그 딴딴함. 그 딴딴한 물질이 느낄지도 모를 불안함과 유년시절에 내적, 외적으로 느낀 불안함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를 매개로 이 공간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면들을 모두 아우르고 싶었다. 

-많은 기억을 품은 한 아파트가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위험한 건물은 허물어져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젖니가 빠져야 더 튼튼한 이가 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스카이아파트라는 건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보기에는 흉물스러운 건물이지만 낡은 물질성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카이아파트를 마주하고 건물 뒤로 늘어진 북한산 능선을 한눈에 보고 있으면서 나는 지금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업 초반에 아파트 현관에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좌측에서 우측까지 고개를 둘려 주변을 바라보던 순간이 있었다. 이 시선, 이 시선을 카메라에 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건물 그 자체를 많이 보여주되 아파트를 둘러싼 주변 풍경 역시 잘 담고 싶었다. 거의 360도에 육박하는 카메라 패닝에 능숙하지 않았다. 혼자 끙끙대며 숱한 실패를 거듭하며 촬영했고 결과물 역시 미숙한 부분이 많다. 건물 내부를 찍으면서 주목한 건 콘크리트에 새겨진 아이들의 낙서다. 곳곳에 남은 아이들의 낙서에서 슬픔과 기쁨, 화남과 서글픔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내레이션과의 느슨한 연관성을 이어주고자 했다. 요즘의 고층 아파트 단지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풍경이라 더 귀하게 다가왔다. 오프닝 장면은 촬영 내내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릉동 곳곳이 재개발되면서 고층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 풍경들의 변두리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스카이아파트를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내려가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부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국민대학교의 14층짜리인 북악관 옥상에서 촬영했다. 마지막 장면 역시 젖니가 빠지는 내레이션과 이어지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철거가 언제 진행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장면을 촬영한 후 완성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촬영의 중후반부에 스카이아파트를 헐고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기분이었다. 서울시와 주민들 간에 협의가 성사되어 주민들이 이주한 후 철거 공사에 들어갔다. 북한산 자락이 보이는 건물의 마지막 시간을 보고 싶어 촬영의 막바지엔 거의 매일 공사장을 찾았다.  

-한편으로 스카이아파트에 대한 조사를 꾸준히 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아파트의 기원과 변모 과정 등에 관해 기록해둔 자료들이 건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스카이아파트와 주민들의 모습을 기록한 ‘굿바이 스카이아파트’ 전시도 마찬가지다. 기록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스카이아파트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 당시 건설개발 붐이 일던 때에 급히 지어져 부실공사 의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스카이아파트뿐만 아니라 당시 지어진 건물들의 수명이 짧은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아파트 관련 책을 많이 찾아본 것이 직업을 지속하는 힘이 됐다. 특히 아파트 키드에 관한 이야기인 『확률가족』과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을 재밌게 읽었다.  

-이 작업은 특히 촬영 윤리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스카이아파트는 낡은 모습 때문에 영화나 사진의 소재로 많이 쓰였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주민분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카메라의 존재 자체를 싫어했다. 낡은 공간이 쉽게 가난의 풍경으로 이어지거나, 구경거리로 여겨지는 것에 불쾌해했다. 당연했다.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할 때도 있었지만 사실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재를 그저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 이 공간에 이렇게 끌린다면 표현의 소재로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은가. <늙은 연꽃>을 만들 때는 인물 그 자체를 좀 더 정확하게 재현해보려고 했다면, 이 작업에서는 다른 두 소재를 어떻게 잘 연결시킬 수 있을지가 중요했다. 다만 하나가 어느 하나에 이용되는 느낌만은 피하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감을 갖고 작업할 수 있도록 나만의 윤리가 필요함을 크게 느낀 작업이었다. 앞으로도 신중하고 집요하게 계속 가져갈 고민이다. 

▶<콘크리트의 불안> 관람 링크  OKULO: <콘크리트의 불안>(장윤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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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모습

작업 2023. 12. 30. 22:28

 

 

1. 2019년 8월 29일에 촬영한 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혁신파크분회 청소노동자 김명숙 님의 일하는 모습입니다. https://youtu.be/BLFnkV2euBs?si=lu6v1gM6vsPTY-eM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는 기본적인 청소를 끝마쳐야 해요.” 새벽 4시 30분에 출근하는 그의 발걸음은 빠르고 곧다. 어두운 건물이 층마다 밝아지며, 그의 노동도 시작된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비닐봉투를 묶고 새 봉투로 갈고, 바닥을 쓸고 닦고, 화장실을 물청소하고 변기를 닦고, 긴 복도를 쓸고 닦는다. 팔목과 팔뚝과 발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의 왼쪽 신발의 뒤축이 유독 닳았다. 어느새 하루 동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와 수백 번의 오간 흔적이 깨끗이 지워진다. 테이블과 의자들도 단정하게 제자리로 돌아가 있다. 검은 하늘이 푸르러지다 아침의 빛에 사물들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 그의 오전 노동이 끝났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한다. 그는 짬을 내 노동조합 업무를 봐야 한다며 특유의 재빠르고 곧은 몸을 움직이며 사무실로 이동했다. 

 

2. 2019년 8월 12일에 촬영한 서울일반노동조합 동국대시설관리분회 청소노동자 문종심 님의 일하는 모습입니다. https://youtu.be/1gS09pacm0U?si=JLt2Tv6afYJWt8Y7


3. 2019년 9월 4일에 촬영한 금천구환경분회 청소노동자 최상열&이찬형 님의 일하는 모습입니다. https://youtu.be/fxo_qW2vEP0?si=tA53GGdSW99XAP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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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일지

작업 2023. 1. 24. 11:26

<깃발, 창공, 파티> 제작일지
 
1. 시작은 이전 작업인 <공사의 희로애락>에서였다. 주인공인 아버지와 함께 차로 구미공단을 지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길게 늘어선 공장들을 지나가며 “KEC… 코오롱… 내가 이 건물 안에서도 일 많이 했다.” 라는 말을 했고, 나는 그걸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KEC와 코오롱은 구미의 랜드마크인 수출기념탑을 지나자마자 볼 수 있는 공단의 가장 오래된 공장들이다. 의류회사 코오롱은 익숙했지만 KEC는 낯설었다. KEC? 나는 촬영분의 녹취를 풀다 말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홈페이지에는 “세계 최우량 반도체 전문회사”라고 쓰여 있었다. KEC는 1969년 구미공단에 제1호로 입주한 공장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KEC 회장에게 10만 평의 공장 부지를 거의 무상으로 주다시피 했다고 한다. 2010년 노조가 공장을 점거하는 큰 파업을 해서 구미 전체가 떠들썩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가장 최근의 기사는 남녀 임금차별에 관한 거였다. 노조가 이 문제를 고쳐달라고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고 했다. 검색하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KEC 검색에서 시작한 나는 어느새 KEC노조로 관심을 옮겨가며 정신없이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일단 자료들을 컴퓨터 하드 한 켠에 정리해두었다.
 
2. <공사의 희로애락>은 산업화 시대를 치열하게 지나온 한 남성 노동자이자, 가장이자, 내 아버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산업화 세대 하면 흔히 남성 노동자부터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아래에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남자는 가장이니까”, “여자의 바깥일은 용돈벌이, 반찬값.”과 같은 가부장적인 인식이 결국 남녀 임금차별로 이어진다. 이전 작업에서는 다루지 못했던 이 문제에 관해 공부로든 작업으로든 관심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우연히 알게 된 KEC노조에 관심이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KEC노조는 내부의 성차별에 대해 막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조직이었다.
 
3. 그즈음 나는 『기나긴 승리』라는 책을 읽었다. 이야기는 미국의 대기업 굿이어에서 여성 관리자인 릴리 레드베터가 누군가로부터 받은 쪽지로부터 시작된다. 쪽지에는 남성 관리자와 여성 관리자의 임금 격차가 적혀 있었는데 릴리에겐 실로 놀라운 ‘정보’였다. 충격을 받은 그는 고민 끝에 회사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그리고 성차별 문제를 대법원까지 가져가면서 미국에서 크게 화제가 됐고, 이후 그의 이름을 딴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한 여성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고 어떻게 싸워 변화를 이끌어냈는가에 관한 이 책은 내게 무척 감동이었다. ‘한 여성이 싸우는 이야기가 이토록 재밌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KEC의 여성 노동자, 정확히는 노조의 여성 조합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막연히 차별받는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데이터를 알기 전까지는 그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들의 싸움도 시작됐다.
 
4. 작업의 동력이 된 또 다른 경험이 있다. 2017년 초겨울, 나는 물류센터에서 두 달간 일했다. 몸이 몹시 고됐다. 나는 소비자가 주문한 물건을 찾아오는 피킹(picking), 그리고 문제가 없는지 검수하고 포장(packing)하는 업무를 했다. 이 업무에는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이 배치됐다. 사람이 자주 바뀌었다.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겨울에 나는 동창에 걸리며 일을 했고, 손가락에 염증이 걸릴 정도로 일이 많았다. 구직 공고를 봤을 당시에는 단기간 꽤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이렇게 일하고 이것밖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보다 화나는 건 말 그대로 사람이 ‘소모품’ 취급을 받아서였다. 노동환경이 열악했다. 하루 종일 서서 반복 업무를 하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럼 저 언니는 내가 화장실 가는 걸로도 눈치 주지 않을 텐데, 서로를 감시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을 텐데, 서로 좀 더 따뜻하게 대할 수 있을 텐데, 무엇보다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람들. 나는 평소 노조를 지지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좀 절실했다. 그런데도 난 행동은커녕 불만 하나 말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공간과 일에 익숙해지니 분노도 조금 누그러졌다. 나를 탓하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개인이 혼자 문제제기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릴리 레드베터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으니까. 그 이후로 집단의 힘인 노동조합을 자주 생각했다.
 
5. 이전 작업에서 해소되지 않은 질문과 구체적인 내 경험이 만나면서 나는 KEC노조를 직접 만나고 싶어졌다.(정확한 명칭은 ‘KEC노조’가 아닌 ‘KEC지회’다. 정식 명칭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구미지부 KEC지회’) 나는 인터넷에서 노조의 리더인 지회장님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했다. 그는 지회 설립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여성 지회장이었다. KEC지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내 의사를 간략히 설명을 드렸다. 일단 만나기로 했다. 다행히도 “관심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6.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광화문의 집회 현장이었다. 수많은 깃발 사이에서 ‘KEC지회’라 쓰인 깃발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헤매고 있는데 노조에서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그날 이후 KEC지회와 가까워지기까지의 시간은 곧 내가 ‘KEC지회’라 쓰인 깃발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했다.
 
7. 첫 만남의 자리에 다큐의 주요 인물이 될 교육국장님과 수석부지회장님이 함께했다. 배 국장님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소속이었고, 이 수석부지회장님은 지회의 여성 간부였다. 그들은 지인을 통해 접근한 것도, 집회에서 자주 보던 얼굴도 아닌 나를 조금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날은 일종의 면접 같은 자리였다. 나보다 그들이 궁금한 게 더 많았다. 내 어떤 관심사들이 모여 KEC지회를 촬영하고 싶게 됐는지를 잘 설명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이미 라포(rapport)가 형성된 주변 사람을 주로 촬영했다.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이 낯선 사람들과 차근차근 라포를 형성해나갈 시간이 두렵고 설렜다.
 
8. 감사하게도 우리는 함께하게 됐다. 다시 ‘현장’이 생겼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찾아갈, 늘 관찰하고 탐구해야 할 나의 현장. 작업을 시작한 2018년 3월, 나는 “KEC지회의 여성 간부와 남녀 임금차별을 다루겠다.” 정도의 계획만 갖고 있었다. 또 하나, 이전 작업이 촬영 대상과의 교감이 중요했다면 이번에는 카메라가 우리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해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방법은 ‘바뀔 수 있다.’ 그래도 이렇게 스스로 작은 목표 하나를 세워보는 게 작업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9. KEC지회를 만나고서야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KEC 안에 세 개의 노동조합이(나!) 있다는 거다. 기사로만 접했을 때는 전혀 알 수 없던 정보였다. 1987년에 설립된 KEC지회는 오래 단일노조였다가 2010년 파업 이후 소수노조가 된다. 사측이 개입해서 만든 한국노총 산하인 KEC노동조합으로 많은 조합원들이 이탈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업노조인(상급단체가 없다) KEC기업노동조합도 생겼다. 복수노조의 원래 취지는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지만 노조가 세 개인 회사는 과연 노동자들에게 유리할까?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게 아닌가? 실제로 사측이 특정 노조를 무력화하는 데 복수노조를 악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소수노조의 조합원들은 ‘임금 및 단체협상 과정(임단협)’에서 교섭권과 투표권이 없다.
 
10. KEC지회는 2010년 파업 이후 처음으로 임단협에 참가한다. 소수노조가 임단협에서 투표권을 가지려면 ‘교섭창구단일화’를 거쳐야 한다. KEC지회의 경우 그건 복수노조 체제를 인정하는 게 돼서 그동안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수노조로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고민 끝에 8년 만에 처음으로 교섭창구단일화를 거쳐 임단협에 참가하기로 한다. KEC지회가 가장 주요하게 내세운 2018년의 요구는 ‘단일호봉제 쟁취’였다. J와 S로 나뉜 KEC의 등급제를 없애자는 거다. 회사는 이 등급제를 이용해 남녀를, KEC지회를 차별했다.
 
11. 외부에서 보면 KEC라는 회사가 유독 차별이 심하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더디더라도 내부의 변화는 중요하다. 나는 이런 문제제기를 시작한 KEC지회라는 조직 자체와 여성 간부들을 집중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12. 촬영하는 동안 조직생활과 개인의 자유에 대해 자주 떠올렸다.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해 조직도 개인도 건강하게 오래가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내가 겪은 공동체와 조직생활이 종종 떠올랐다. 이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한 조직을 통해서 말이다.
 
13. 많은 KEC지회 조합원들이 KEC노동조합으로 떠난 주요 이유에 노조 간 차별이 있다. KEC지회 소속의 조합원들은 거의 진급이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더 있다. KEC지회에 있으면 투쟁과 연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좋은 게 좋은 거다, 적당히 타협하자와 같은 태도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어렵다. 그래서 계속 싸워야 하고, 잘 싸우려면 뭉쳐야 한다. 그게 민주노조가 추구하는 바이고, 간부는 조합원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3교대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노조활동까지 열심히 하기가 버겁다. 누구나 주말에는 쉬고 싶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래서 민주노조를 이끌어가는 간부나 조합원들은 좀 더 노력할 수밖에 없다.
 
14. 촬영하면서 알게 된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는 자연스레 ‘민주노조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됐다. 내가 KEC지회를 1년 반여의 시간 동안 지켜보며 느낀 건 이 조직은 단지 내 조합원이나 회사의 노동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항상 전체 노동자와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조합원들을 교육시키고 고민을 나누었다. 이게 ‘민주노조 사수’를 외치는, 민주노조이고자 늘 노력하는 KEC지회의 모습이었다. 이런 지점들이 자꾸 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노조 말고 민주노조.
 
15. 미디어로 주로 접하게 되는 파업과 거리 투쟁은 노조 활동 중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이다. 협의하고 합의하는 교섭의 과정이 결렬됐을 때, 상대적으로 약자인 노동자들이 쓰지 않을 수밖에 없는 수단인 것이다. 나는 KEC지회의 파업이나 거리에서의 투쟁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지길 기다릴 수도 없었다. 기다리게 되지도 않았다. 나는 노조의 일상적인 활동에 좀 더 집중해보고 싶었다. 노동조합의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 장면들을 담아보고 싶었다.
 
16. 제작일지를 정리하는 지금에 와서야 나름 정리가 되지만 촬영을 시작할 당시에는 많은 용어들이 낯설었다. ‘미옥 수석~’이라고 할 때 수석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이 작업은 내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처음 노조에 가입한 입문자로서의 경험이기도 했다. 나 역시 노조에 대해서는 늘 파업과 거리 투쟁과 같은 이미지로만 각인돼 있었다. 그것 외의 이미지를 담는 것으로도 새로운 노조 다큐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17. 당시 클라우디아 바레장 감독의 <아마-산>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무척 재밌게 보았다. 일본의 해녀를 다룬 일종의 관찰 다큐멘터리였다. 인류학적인 접근의 다큐멘터리 대부분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며 그 시선이 건조한 편이다. 이 영화는 카메라와 대상 간에 거리가 있으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관찰 형식을 띤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있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이나 왕빙 감독의 다큐에서도 느껴왔던 거지만 ‘그냥 계속 보여주는데, 나는 계속 보는데 그냥 보는 걸로도 왜 계속 보게 되지? 계속 보고 싶지? 하염없이 보면 볼 것 같은 이 상태는 뭐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타일에 대한 고민, 지금 내가 흥미로워하는 형식, 그리고 촬영 현장을 오가며 내가 느끼는 것들을 서서히 조율해가며 이번 작업의 형식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18. 구미와 서울을 오가며 촬영했다. 한 회차에 3일 정도 머물며 한 달에 평균 2~3번 정도 오갔다. 구미에 갈 때마다 ‘신사무실’이라는 곳에서 숙식했다. KEC지회의 배려 덕분이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공간을 중요시하게 됐는데 그건 신사무실의 영향이 크다. ‘신사무실’은 ‘지회사무실’과 더불어 지회가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지회사무실은 공장 안에 있고, 신사무실은 공장 밖에 있다. 지회는 상급단체나 외부인의 출입에 제약이 있는 지회사무실과 별개로 좀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신사무실을 아사히비정규직지회와 함께 사용한다는 게 좋았다.(KEC지회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다) 구미에는 ‘아사히 비정규직지회’라고 구미공단 최초의 비정규직 노조가 있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가 만들어질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노조가 KEC지회였다. 이들은 주로 함께 움직인다. 나는 한 화면에 두 노조가 자연스레 섞여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19. 신사무실에서 내가 사계절을 보내며 느낀 감각, 이 공간이 내게 줬던 느낌, 그런 것들.
 
20. 공간은 <깃발, 창공, 파티>에서 인물만큼 중요한 요소, 아니 주인공이었다. 나는 시간적으로는 ‘2018년 KEC의 임단협 과정’, 공간적으로는 KEC지회의 주요 동선인 ‘지회사무실-신사무실-광장’을 작품의 주요한 축으로 삼았다. 이 공간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조직의 ‘운동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또 반복은 일상성을 드러내기에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21. 내가 볼 수 있는 노조 활동은 주로 회의와 교육이었다. 노조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그 외에 ‘그림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공장 내 선전전과 같은, 움직임이 많은 활동은 촬영할 수 없었다. 외부인인 나는 지회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게 금지됐다. 촬영에 있어서는 다소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제약 상황이 오히려 하나의 스타일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구미에 갈 때마다 정규 업무시간에는 지회사무실, 저녁 6시 이후에는 주로 신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딱히 사건이란 건 없었다.(물론 무엇을 사건으로 볼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지만, 충돌이나 갈등과 같은 상황이 없었다는 의미다) 나는 공간에 조합원들이 드나드는 걸 지켜보거나 뒷짐 지고 창문이나 문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
 
22. 사무실에서는 달마다 생일파티가 열렸다. 작은 케이크라도 사서 꼭 초를 켜고 소원을 빌고 불을 껐다. 생일파티를 할 때만은 유독 생일을 맞은 그 개인이 도드라져 보였다.
 
23. 촬영하는 동안 자주 보고 들은 것들이 지금의 제목을 만들었다. 노조 하면 쉽게 떠올리는 그 깃발, 그리고 KEC지회의 몸짓패 이름인 창공, 마지막으로 매달 조합원들의 생일에 열리는 파티. 그래서 <깃발, 창공, 파티>. 내용만으로 충분히 무거워서 제목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제목이길 바랐다. KEC지회는 기획적인 노조파괴를 당하고 손배가압류까지 받은 조직이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는 만큼 잘 웃는다. 이 노조에 맴도는 생기, 밝은 기운을 잘 드러내고 싶었다.
 
24. 언젠가 노트에 오려붙인 기사가 있다. 가끔 들여다보고 힘이 되던 글.
“(중략) 그것이 바로 명랑함이다. 싸우면서 명랑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픈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나는 건강함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조성택, 󰡔경향신문)
 
25. 지회의 총무부장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회사와 노조 중 어디에 더 소속감을 느끼세요?” 이분법적으로 답하기 어려울 걸 알면서도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그는 “글쎄…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닌데, 2010년도 이전 같으면 회사라고 할 텐데 이제는 노조인 것 같네. 그전에는 회사를 위해 충성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거든.” 하고 답했다. 나는 ‘노동자’로서가 아닌 ‘조합원’으로서의 사람들을 담고 싶었다. ‘회사가 있으니 노조도 있다. 조합원이기 이전에 노동자다.’라는 전제가 깔린 다큐가 아니길 바랐다. 노동보다 노조활동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노조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어쨌거나 이건 노동에 관한 다큐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노동조합의 노동에 관한 이야기일 수는 있겠다.
 
26. <깃발, 창공, 파티>에는 노동에 관한 인물들의 철학은 있지만 정작 노동하는 이미지는 없다. 내가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노동하는 장면이 중요하진 않다. 물론 필요하다면 푸티지를 사용하거나 다른 방식의 재현을 할 수는 있었다. 왠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왠지’ 하는 내 감각을 그냥 믿어버리는 편이다) 물론 연출자의 게으름일 수 있다. 어쨌거나 나는 한계상황에서 쉽게 포기하며, 혹은 그걸 기회로 스타일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27. 나는 저널리즘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성차별적인 임금 문제 자체를 다루려는 건 아니다. 그건 좋은 기사들이 충분히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KEC지회를 어떻게 영화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계속되던 고민.
 
28.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하룬 파로키의 전시를 보러간 적이 있다. 그는 노동과 노동자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전시 도록을 보다가 내가 주요하게 가져갈 아이디어를 얻었다. 각종 영화들에서 노동자들이 공장 문을 나서는 장면을 편집한 비디오 설치물 <110년간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소개글을 일부 옮기면,
 
“(중략) … 우리는 이를 다큐멘터리와 산업영화, 프로파간다 영화들에서 발견하는데, 음악과 단어들을 배경으로 흔히 쓰는 이미지는 ‘피착취자들’, ‘산업 프롤레타리아들’, ‘주먹이 된 노동자들’, 혹은 ‘대중 사회’와 같은 문자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공동체의 외양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서둘러 문을 지나자마자, 그들은 개인으로 흩어지는데, 대부분의 서사 영화들이 다루는 것은 노동자들의 바로 이러한 존재 양태이다.”(하룬 파로키)
 
이걸 읽고 나는 즉각적으로 내 작업은 ‘공장 문을 나선 뒤에도 노동자가 개인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외양을, 아니 다른 공동체의 형태를 유지하는 장면들을 포착하고 싶’어 한다는 걸 발견했다.
 
29. 그래서 KEC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이미지는 꼭 찍고 싶었다. 하지만 3교대 근무인데다가 노동자들은 끼리끼리 띄엄띄엄 퇴근해서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를 담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촬영하는 모습이 사측에 노출되는 걸 항상 조심해야 했기에 공장 주변에서 무리하게 작업할 수가 없었다. 사측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KEC지회에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계속 염두에 두었다.
 
30. KEC지회의 남녀 성비는 비슷하다. 연령대는 20대 후반 ~ 60대 초반까지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젊은 노동자들의 유입이 거의 없어서 평균 연령대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나이든 사람 중에는 남성이 훨씬 많다. 노조 설립 30년 만에야 여성지회장이 나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회사뿐 아니라 노조 자체도 남성중심이다. 하지만 이제 이 조직은 지금 변화하고 있다. 조직 차원에서 2018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을 챙겼다. 회사나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변하려고 노력한다. 나이 많은 남성 조합원들은 그 변화에 동참한다. 촬영을 할수록 나는 이 점이 참 좋았다. 사소하지만 이런 모습들을 담고 싶었다. 여성 간부의 교육에 묵묵히 경청하는 나이든 남성 조합원들의 얼굴, 여성의 날에 함께 무언가를 하는 모습 등…. 이런 변화와 별개로 작업을 하면서 생긴 의문은 있다. 최초의 여성지회장은 이 조직이 가장 침체기일 때 선출됐다. 왜 항상 여성 리더는 위기의 순간에 등장하는가. 이 문제의식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지회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만큼은 조합원들의 지지로 선출된 이 젊은 여성지회장이 민주적이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조직 내에서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더 중요하게 보고자 했다.
 
31. 나의 관심은 여성노동자에서 조직과 공동체, 그리고 민주노조로 이어졌다. 사실 이건 다 이어진 문제들이다.
 
32. KEC지회를 촬영하고부터 내가 기사에서 눈을 밝히며 찾게 되는 단어는 ‘민주노총’이었다. 그리고 복수노조 체제의 사업장인 경우 민주노총 산하의 노조는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유념해서 보았다. 꽤 많은 사업장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대응이 달랐다. 집배원 과로사가 문제가 되던 때 우체국 노조의 파업이 그랬고, 지금도 계속되는 있는 톨게이트 노조도 그랬다. 민주노총을 바로 민주노조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분명 민주노총 산하의 노조들이 덜 타협하고, 더 노동자의 입장을 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민주노총에 대한 혐오는 심하다.
 
33. 촬영하는 동안 틈틈이 KEC나 KEC지회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러다 문득 ‘KEC 임단협’ 으로 검색했는데 재밌는 결과가 나왔다. “KEC지회 임단협 7년 연속 무파업 평화적 타결”, “KEC지회 임단협 6년 연속 무파업 평화적 타결”, “KEC지회 임단협 5년 연속 평화적 무파업 타결”… KEC지회가 소수노조가 된 2010년 이후의 기사들이었다. 이 기사에 KEC지회는 없었다. 기사의 제목을 보고 바로 의문이 들었다. 무파업은 과연 좋은 걸까? 저들이 말하는 ‘평화’란 대체 뭐지? 그리고 궁금했다. 2018년 임단협에 관해서는 어떤 기사가 나올까? 8년째 무파업 평화적 타결이 될까, KEC지회라는 변수로 인해 새로운 결과가 나올까. 사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극적인 사건을 바라며 작업하고 싶지도 않았다.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결과를 다룬 저 기사는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승리하지 않으면 소수자들의 역사는 지워지기 쉽다.
 
34. 지회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 싸우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흔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 말이 날카롭게 내 마음에 각인된 건, 경험해본 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35. KEC노동조합에서 KEC지회로 소속을 바꾼 여성 대의원이 있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차별받을 텐데 KEC지회로 어떻게 넘어올 생각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 왈, “일하다 다친 적이 있는데 관리자가 조퇴를 안 시켜줬다. 주변에서 아무 반응도 없을 때 대신 싸워준 언니들이 있었다. 그게 KEC지회 사람들이었다. 고맙고 멋졌다”. 물류센터에서 일할 때가 생각났다. 싸울 줄 아는 사람들, 싸우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 나중에 이 이야기를 꼭 인터뷰로 담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너무 중요한 경험이지만,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이미 많이 나오지 않았느냐고. 나의 감동과는 별개로 영화의 방법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36. 필요하면 인터뷰를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관찰 다큐에 관심이 생긴 만큼 인터뷰를 넣지 않고도 밀고 나갈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이미 내 촬영분에는 회의와 교육, 문자로 말이 넘치고 있었다. 추가로 인터뷰는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37. 관찰 다큐에 계속 관심을 두던 와중 한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소다 가즈히로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작품을 보게 됐다. 재밌어서 볼 수 있는 작품은 모조리 찾아봤다. “그냥 보여주는 건데 왜 이렇게 재밌지?”, “대체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 거지?” 이 작업을 하는 내내 계속되는 질문이다.
 
38. 서울과 구미를 한 번 오가는 데 6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동하는 시간이 좋다. 갇혀 있는 시간이 오히려 자유롭다. 내가 선택한 작업이지만 매번 촬영장에 도착하기까지는 마음이 버겁다. 버스 안에의 시간은 서울과 구미에서의 내 시차를 좁혀주었다. 작업 모드로 전환시켜주었다. 구미에 거주지를 두고 집중적으로 촬영할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여건도 있었고 무엇보다 오가는 일 자체를 내가 즐겼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또 가까워지는 거리감에서 긴장을 느끼며 촬영대상을 대하는 나만의 거리감을 찾으려고 했다.
 
39. 구성에 대한 구상을 시작한다. KEC지회를 점점 알아가는 흐름으로 이어붙이고 싶다. 현재의 시간이 흐르면서도 과거에 대해 점점 알아가는 구성이 될 것이다. 점점 이 조직에 친밀해지는 기분이면 좋겠다. 잠시만이라도 노동조합을 함께 체험한다는 감각을 주고 싶다.
 
40. 2018년의 마지막 달,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을 들었다. 사회적으로 추모 분위기가 계속 됐고 나도 내내 우울했다. 그의 고향이 구미라고 했다. 몇 시민단체와 KEC지회,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중심으로 구미역에 작은 분향소를 차렸다. 역의 한 켠에서는 성탄절 트리가 반짝이고 캐럴이 들렸다. 나는 멀리서 이 모든 풍경을 촬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갔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멀리서 쳐다보거나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오래 머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그래도 이 작은 분향소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빨리 잊지 않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날은 평소 발언을 잘 안 하던 총무부장님이 마이크를 오래 쥐고 있었다. 조금씩 더듬거리며 느리게 말을 이어나갔다.
 
41. KEC의 2018년 임단협 교섭은 생각보다 길어져서 해를 넘겨도 끝나지 않았다. 소수노조 KEC지회가 끼어들면서 순조롭지 못한 탓이다. 그러던 1월 말 갑작스럽게 잠정합의안이 나오고 투표일이 결정됐다. 나는 급히 구미로 갔다. 투표 직전 조합원들에게 잠정합의안을 설명하는 장면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며칠 머무르며 8년 만에 하는 투표의 설렘, 사람들의 마음가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보다 중요한 성과들 같은 걸 담으려고 했다. 언제나 과정,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싸웠느냐 하는 과정, 그리고 작은 성과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42. 2019년 초부터 촬영본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촬영본을 돌려보는 일에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찍은 것들을 열심히 보는 게 편집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촬영본을 보며 느낀 건 카메라가 불현듯 줌(zoom)하는 순간이 많다는 거다. 중요하다고 느낀 순간에 줌 버튼을 눌렀다는 건 알겠는데 촬영하던 순간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행동이다. 어떤 줌은 마음에 들고 어떤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43.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무엇이 될까. 촬영도 언제고 끝날 것이다. 지회사무실이나 신사무실에서의 장면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다. 영화가 끝나도 현실에서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러다 곧 3・8 여성의 날이 다가온다는 걸 알았고 구미로 갔다. 촬영분이 마음에 들었다. 지회사무실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문을 사이에 두고, 혹은 창문 너머로 찍었다. 이후에도 촬영은 6월 정도까지 틈틈이 계속 했다.
 
44. 2019년 4월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편집을 시작했다. 일단 간단한 원칙 하나를 세웠다. 컷은 (전 작업보다는) 짧게, 시퀀스는 길게.
 
45. 여성조합원들과 어울리고 촬영하는 동안 종종 내 청소년 시절을 떠올렸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갈 즈음이면 인문계로 갈 학생과 실업계로 갈 학생으로 나뉜다. 딱히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아서, 대학에 갈 생각은 없어서 혹은 집안 형편 때문에 일찍 취직을 해야 해서 등,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실업계를 선택한 여학생들이 떠올랐다. 실업계로 가는 여학생들은 실습을 위해 빨리 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한 반에서 수업을 들었던 몇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KEC에 다니는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대적으로 일찍 사회에 뛰어든 여성들이다. 이직을 하지 않았다면 연차가 15년은 되는 프로들이고. 나는 그들이 오래 헤어졌다 다시 만난 친구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로가 겪은 경험은 다르지만, 그래서 서로에게 줄 것이 있는 그런 관계.
 
46. 편집하는 동안 입장, 당파성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예전에 옮겨둔 문장을 자주 꺼내본다. 당사자와 당사자성은 다르고, 지배 세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히 당사자성이라는 말. 노동자가 당사자라면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당사자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물론 당파성은 약자의 사실(facts)이나 과학이 아니라 부분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백인을 포함해 앎의 의지를 지닌 모든 이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다. 볼드윈은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나 보편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흑인(사회적 약자)에 대한 통념은 거의 대부분 실제가 아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당사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당사자도 있다. 그래서 투명한, 인지 가능한 ‘당사자’와 사회적 실천으로서 ‘당사자성’은 다른 개념이다. 지배 세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히, 당사자성이다.” (정희진, 지성과 당파성 -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다큐매거진 DOCKING)
 
47. 나는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관찰하고 촬영하며 내 나름대로 각 인물의 역할과 성격을 가늠했다. 주요 인물이 아닌 잠깐 등장하는 인물에도 그 사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컷을 담고 선택하려고 했다. 가령 모든 뒷정리와 사무실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총무부장님이나, 주로 타인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도 한 번씩 발언을 하면 누구보다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법규부장님의 모습처럼. 기본적인 원칙으로는 최대한 여성조합원들의 얼굴을 많이 노출시키고 그들에게 더 많은 발언권을 주려고 했다.
 
48. 편집본에 “안녕”, “수고했어”, “고마워” 같은 일상적인 말이면서 서로에 대한 예의가 되는 말을 많이 넣으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누는 이런 사소한 말들이 관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KEC지회를 관찰하며 새삼 느끼기도 했고.
 
49. 편집본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장면은 산책을 한 뒤 돌아가는 차 안에서의 대화다. 바빠서 극장에도 못 갔다느니 카메라에 찍히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영화를 봐야 한다느니 같은 대화를 나누다가 잠시의 침묵 뒤 배태선 교육국장님이 이런 말을 한다. “리얼하다. 사는 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구미의 밤 풍경. 어쩌면 흔할지도 모를 이 말이 내게 강렬했던 건 나는 그 감각을 잘 모르겠어서다. 사는 게 리얼하다는 건 뭘까? 재현, 표현방법 같은 걸 고민하며 살아서인지 나는 항상 삶과 거리를 두고 있는 기분이다. 그건 저항하며 사는 사람이 더 잘 느낄 수 있는 삶에 대한 감각일까.
 
50. 사람들의 능동적이고 당당한 말과 태도를 일부러 더 드러내고자 했다.
 
51. 영상 편집을 할 때 리듬을 잘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하지는 못해도 늘 염두에 두고 있다. 컷들이 모여 시퀀스가 되고 시퀀스들이 모여 하나의 영화가 된다. 출렁출렁 한 편 전체에 리듬감이 잘 만들어지면 좋겠다. 편집하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내 마음에 들 때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의 생각으로 넘어가진 않는다. 내 마음이 드는 순간을 믿어보려고 한다. 열심히 노력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다 문득 이 컷에 뒤잇는 다음 컷을 커서로 쭈-욱 들어서 앞 컷의 아무 데나 툭 하고 놓아본다. 그러고 돌아가서 재생을 하면 기가 막히게 내 마음에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이 지점에서 두 컷이 붙었을까. 나는 몹시 만족스러워한다.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필연이기에 나는 그저 행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재밌다. 물론 아주 드물게 시도한다. 영상의 마지막에 ‘인터내셔널가’가 시작되는 부분이 그랬다.
 
52. 최종 편집본을 들고 구미로 갔다. 조합원들에게 영상을 처음 보여주는 자리였다. 3시간이라고 하니 다들 그건 아닌 것 같다던 원성… 물론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나온 불만이었지만. 시사를 하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긴장을 해서 오래 앉아 있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지회장님, 수석부지회장님, 국장님과 식사를 하며 다큐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꼭 빼야 할 장면들이 있었다. 여성조합원들이 담배 피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지방이라서….” 의도적으로 더 배치했던 장면들이라 아까웠지만 삭제했다. 아쉬워서 그에 관한 글을 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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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유리문은 한번 밀릴 때마다 오래 제자리를 잡지 못한다. 사무실 바깥에서 들리는 사내방송 음악소리가 들렸다 말았다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노조 조합원들이 사용하는 이 사무실은 1987년에 만들어진 뒤로 책상도, 사물함도, 문짝도, 심지어 식물들 역시 한 번도 바뀌거나 죽은 일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살아온 것 같다. 생기는 덜하지만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다. 시간대별로 다른 빛깔의 볕이 사무실에 들고 나간다. 볕이 전혀 들지 않는 공간도 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원탁이 있는 작은 홀을 지나 문턱 하나를 넘으면 정면에 문이 하나 보인다. 누군가 저 안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냥 창고로 쓰는 곳이리라 생각하고 말, 벽 같은 문. 나무로 된 문짝에 달린 둥근 손잡이를 돌리면 벽지가 누런 두 평 남짓한 방이 있다. 창문 대신 환풍기가 하나 달린 공간에 볕이 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이 방의 벽지가 노란 건 담배 연기 때문이다. 방에 놓인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오랫동안 지회장의 사무실로 쓰이던 이 방이 여성 노동자들의 흡연실이 된 건 2010년 파업 이후다. 파업하는 몇 달 동안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같은 천막에서 생활하고 서로의 면면들을 다 보게 되면서 가장 눈에 띈 건 담배 피우는 여자들이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 중엔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담배를 피우게 됐고, 함께 생활하는 몇 달 사이 자연스레 어울려 피우기 시작했다. 경진아 너도 담배 피웠냐, 선희 너도 피우는 구나, 하면서. 파업 후 조합원들이 다시 회사로 복귀하자 담배 피우는 여자들은 파업 이전처럼 조용히 광장에서 사라졌다. 아직도 사내 흡연구역에는 남자들뿐이다. 노조는 지회장이 쓰던 방을 담배 피우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내어주었다. 이들은 애써 노력하기보다 아직은 편한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기 원한다. 오히려 자유로운 건 회사 밖이고, 집회 현장 같은 곳들이다. 흡연자들은 쉬는 시간이 되면 다급하게 낡은 유리문을 지나 문턱을 넘어 창고처럼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 끼리끼리 담배를 피운다. 노조에 비흡연자가 늘면서 최근 문틈으로 담배 냄새가 새어나온다는 항의를 받았지만, 흡연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당당하다. “아니 우리만큼 노조 사무실에 자주 오지도 않는 것들이 왜 우리 탓을 하고 그래!”, “우리가 여기서 담배 안 피우면 노조 사무실에 매일 오겠다고 각서 써. 그럼 내가 여기서 담배를 안 피우지.” 웃지도 않고 말하는, 어쩐지 간절한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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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첫 시퀀스에서 최초의 여성지회장인 이종희가 등장하는 이 다큐는 황 부지회장이 발언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제작을 끝내고 소식 하나를 들었다. 새로운 지회장으로 황미진이 선출됐다고. “윤미 동지의 영화가 예언한 게 아니냐”는 배국장님의 즐거운 농담. 신기하고 기뻤다. 무엇보다 여성이 계속 대표의 자리를 이어나간다는 사실이 좋았다. 당당한 태도, 밝은 모습을 잊지 않으려는 행동들, 표정들, 따뜻한 분위기… 이런 조직의 분위기에는 오랜 시간 더 많이 억압받았던 여성노동자이자 여성조합원들의 연대의 힘이 분명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54. 조직과 공동체의 힘에 대해 쉽게 냉소하지 않을 것. 작업을 떠나 개인적으로 이번 작업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2020.1월 작성)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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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영화 제작기

작업 2023. 1. 24. 11:10

첫 영화 제작기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처음에는 오직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다. 그 마음도 막연한데다 계속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이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태, 그 정도였다. 마침 그 시기에 지인이 “다큐멘터리 찍어볼래?”라고 물었다. 솔깃했다. “병역거부를 하려는 친구가 있는데 파티를 한대.” 기자회견이 아닌 파티를 하는 병역거부자의 모습을 나로서는 잘 상상할 수 없었다. 반전(反戰)과 평화에 대해 발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으며 축하를 나눈다고? 병역거부를 지지하던 나에게도 낯선 방식이었다. 그래서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촬영은 물론 기획안과 구성안도 제대로 써본 경험이 없었다. 친구는 자신의 작은 캠코더를 빌려주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6밀리 테이프가 들어가는 카메라였다. 한손에 꼭 맞게 들어왔다. 일단 인물의 이야기를 잘 듣고 충실히 찍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20대 이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으니 나는 다큐멘터리도 잘 맞을 거야!’ 이 정도의 자신감은 있었다. 그때 나는 왜 다큐멘터리, 그것도 영화로서의 다큐멘터리에 끌렸을까? 십 년 전이라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 시절 자주 생각했던 건 반복에 관해서다. 하루하루를 살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는데,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잔상을 남겨두고 싶다, 처음은 살고 두 번째에는 내 방식으로 반복해보고 싶다,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글보다는 이미지가 끝내 설명하기 힘든 걸 드러내기에 더 좋은 매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 그게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건 첫 다큐멘터리를 하고 난 뒤에야 배웠다.

내 첫 다큐멘터리 주인공의 이름은 현민이다. 그는 성을 뺀 현민으로 불리고 쓰이기를 원했다. 나는 카메라를 든 2009년 11월부터 그가 감옥에 가기까지의 4개월을 담기로 했다. 충실히 과정을 담고 인물의 말을 잘 듣다 보면 다큐멘터리를 완성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민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믿음은 조금씩 허물어졌다. “왜 병역거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뚜렷한 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다고 느꼈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현민은 "반전과 평화를 지지하는 건 맞지만 그런 언어를 쓰기에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은 대단한 용기가 있어서 병역거부를 하는 게 아니라 20대 내내 병역 문제로 끙끙대며 악몽에 시달린 찌질한 청년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이걸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고 말이다. 파티에서 그는 10장짜리 소견서를 낭독한다. 무려 10장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긴장이 돼서 한숨도 못 자고 왔다던 현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20대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병역 문제에 관해 마음 아주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서 쓴 글을 읽어주었다. 그는 사적이고 내밀한 문제 안에서 헤매고 방황하며 자신의 고통이 권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겨우겨우 이끌어내는데, 그렇다고 그곳이 종착점 같지는 않았다. 그의 언어는 솔직한데 모호했다. 소견서 낭독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일부는 여전히 궁금해 했다. “그래도 왜 병역거부를 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쩐지 군대 환송회 같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의 반응에 나는 조급해져 또다시 그에게 묻고 만다. “그러니까 왜 병역거부를 하나요? 왜 감옥을 선택했나요?”

“나는 내 식의 언어를 만들고 싶었던 건데 근데 그게 기존의 운동의 언어나 정치적 언어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근데 나는 이것도 다른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현민)

이제와 돌아보니 당시의 내 고민이 무척 낡아 보인다. 뚜렷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혹은 거부하고 싶은 현민의 고민은 그 이전의 병역거부자들도 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굳이 드러내지 않았거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병역거부자마저도 강한 영웅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반감, 자신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건 곧 고정된 남성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현민이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는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 것도 그 고민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아니 내가 했던, “왜 병역거부를 하느냐.”와 같은 늘상 병역거부자들에게 던져진 질문들과 싸웠어야 했다. 현민의 새로움에 끌렸듯 나는 그의 언어에 맞는 영화 형식을 더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파티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병역거부를 했지만 이후의 과정은 철저히 정해진 법적 절차를 따라야 했다. 현민은 경찰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하고 1년 6개월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나온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소심하게 줌을 당겨 그림자처럼 검게 앉아 흐느끼는 그의 어깨를 담았다. 사람들이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보통 병역거부자들은 법정에서 바로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이동했다는데, 다행인 건지 현민은 일주일 후에 수감된다고 했다. 수감되기 전날 그를 광화문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법정에서도 판사로부터 “조서와 최후 진술서를 다 읽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식의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그게 좋았다며, 일단 판사가 자신의 글을 꼼꼼히 봐주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자신의 언어가 법망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고, 어쩐지 카메라로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평온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 인물의 힘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씩 그의 마음과 의지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수감됐다. 촬영하고 싶어도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이후 나는 촬영본을 몇 번 모니터링하고 인터뷰 녹취를 풀어두고는 작업을 중단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는 생각에 자책했다. 일단 충실히 과정을 기록한다는 계획은 흔들리는 카메라, 엉망인 구도, 줄곧 이상한 곳을 향하는 내 시선으로 인해 좌절했고, 현민의 말을 연출자로서 충분히 흡수하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된 거리감도 갖지 못한 채 비슷한 질문에서 계속 맴맴 돌았다는 점에서도 실망스러웠다.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걸 표현할 수 있는 매체로서 다큐멘터리 영화에 매력을 느꼈다지만 나는 현실에서 더 선명하고 확실한 걸 찾고 있었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취직을 했고, 방송국에서 비정규직으로 2년을 일했다.

그 후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작업을 덮어둔 지도 2년 만이었다. 다행히 그 공백의 시간은 나와 이 작업과의 거리감을 만들었다. 촬영할 당시의 나와 편집하는 내가 분리됐다. 부족한 촬영이지만 거친 그대로 살리자고 마음먹었다. 방송국에서 정형화된 편집 기술에 익숙해진 나는 오히려 틀이 없고 마구 찍힌 듯한 내 촬영본 영상에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공백기가 이 작업을 여유롭게 보도록 도운 건 분명하다. 이제 나는 촬영본에서 좀 다른 것들을 찾기 시작한다. 돌아보면 파티하는 날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그의 긴장된 목소리, 연신 땀이 배어나는 손을 바지에 닦는 모습이다. 거칠지만 그런 이미지들이 찍혀 있었다. 나머지 장면들에서도 현민의 비언어적인 특성을 발견하려고 했다. 주저하는 표정, 여러 번 고쳐 말하는 특성, 무언가를 건네줄 때 몸의 모양이나 중요한 일이 있는 날 그의 걸음걸이 같은 것들. 그의 말에서도 애써 메시지를 찾아내려 하기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말 사이의 여백과 그가 자주 쓰던 ‘그냥, 조금’과 같은 미세한 말들이 주는 느낌을 잘 살리려고 했다. 그런 디테일들이 에둘러 인물의 마음을 잘 드러내줄 거라 믿었다. 제대로 찍지 못했다고 자책했던, 현민이 울던 장면도 내가 끝내 다가가지 않아서 좋았다. 이 과정은 내가 연출자로서 무엇에 더 끌리는지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목이 정해졌다. 군대에 가기 싫은 마음도, 군대에 안 가고 싶은 마음도 아닌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주저하고 조심스럽게 부정을 유예하면서 더 단단하게 부정하는 느낌, 그런 느낌을 주길 바랐다. 더디지만 나는 결국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단 한 번 현민이 강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응원과 걱정, 질책을 받고 있었다. 누군가 물었다. 앞으로 계속 대한민국에서 살 텐데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당면한 문제를 피하지 않을 노력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는 답한다. “나한테는 공부와 글쓰기는 노력하고 싶은 영역이다. 나는 장애인 운동으로 학위논문을 썼지만 중증장애인과 눈을 마주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이 낯섦과 이물감을 극복하는 건 2,3년으로 안 될 것 같다. 힘든 일이지만 이건 극복하고 싶다. 그런데 군대는 아니다.” 상대가 다시 묻는다. 중증장애인과의 소통 문제와 군대에 가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 않느냐고. 순간 현민은 얼굴을 붉힌다.

“그러니까 군대는 제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요. 거기서는 제가 극복해야 할 어떤 요소도 없는 것 같다고요.”
이 당시 바스트숏으로 잡힌 현민의 목소리와 표정이 담긴 한 컷이 내 마음 어딘가에 잔상보다 더 강한 무엇으로 남았다. 극복하지 않기. 더 나은 연출자가 되기 위해 내가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극복하고 싶지 않은 걸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그게 연출자로서 나만의 고유한 무엇일 거다. 그 한 컷이 그 다짐을 늘 상기시킨다.

현민은 출소 후 몇 년이 지나 『감옥의 몽상』이라는 책을 냈다. “수형생활의 흩어진 감각, 감정, 기억들”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경험과 고민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삶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 그의 사적이고 내밀한 언어가 실은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를 새삼 깨달으며, 내가 그런 지점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연출자였다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그 아쉬움이 작업의 동력이기도 하다.

그저 좋은 소재라며 안일하게 접근했던 나에게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큐멘터리 만들기가 얼마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지를, 그리고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걸 내가 어떻게 끌어안을지를, 무엇보다 힘이 들어도 내가 다큐멘터리를 계속 잘해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해준 각별한 첫 작업이다.
(2019. 9월 작성. Purzoom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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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테

영화가아니었다면 2021. 8. 12. 12:21

  오다 카오리 감독의 영화 <세노테>에는 몇 가지 죽음이 나온다. 마야 문명이 생성된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천연샘 ‘세노테’. 이 샘들은 한때 이 일대의 유일한 수원이자, 이 세상과 내세를 연결하는 종교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16세기까지는 세노테에 사는 신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바치기도 했단다. 신을 위해 제물로 희생된 사람들, 어느 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재운 뒤 세노테에 뛰어들었다는 여자, 헤엄치기 위해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는 아이들... 영화는 죽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리고 영화에는 보이는 죽음도 있다. 축제 현장에서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뱅글뱅글 돌아가는 닭, 막 죽어 배가 갈린 돼지, 투우장을 배회하는 소, 여러 투우사들이 소를 결박하기 시작하고, 그 소가 죽어가며 흘렸을 바닥의 흥건한 피. 세노테의 주변에서 인간의 얼굴과 삶과 문화를, 세노테의 안에서 산란하는 빛과 솟아오르는 물과 유영하는 물살이들을, 그리고 이 둘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목소리를 들려주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의식을 보여준다. 아마도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한, 누군가 해골을 정성스럽게 닦고, 인간들의 죽음이다. 나는 이 영화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내 평소의 고민이 겹쳐지며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동물들의 죽음은 위로받지 못할까.
동물의 죽음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영화가 있다. 신경은 쓰이지만 연출자가 고려하지 않았기에 외면해도 괜찮겠다 싶은 영화도 있다. 하지만 영화 <세노테>에는 죽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죽은 자들을 위하는 의식을 보여줄 때에도 인간들의 모습과 행위에만 붙들리지 않으려는 시선과 마음이 분명 있다. 나는 알듯 말듯한 채로, 죽은 동물들과 인간과 동물의 삶과 자연 만물과 이 모두를 바라보는 연출자의 태도를 오래 곱씹어 본다. 어떤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 그것은 삶과 죽음을 잇는다는 장소, 이미지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 모호한 시제 등이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인 듯한 영화의 형식이 그저 스타일에만 머물지 않고 자연 만물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인간이기에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구심력과 그럼에도 인간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심력이 공존하는 영화, 정확히는 그런 논픽션 영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카메라가 세노테에서 잠수하고 있는 관광객들을 멀찍이서 오래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죽은 존재들로 만들어진 무엇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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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일상 2021. 2. 9. 20:47


1-23. 새벽에 잠깐 깼다 다시 잠들자 나는 고래의 배 아래에 있었다. 아주 느릿하고 꼼꼼하게 그의 배를 살피며 꼬리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고 더는 숨을 참을 수 없어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직 완전히 스치지도 못했는데. 고래를 가까이서 바라보면 숨 막힐 듯 벅차고 황홀하다. 이것도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1-24. 소변이 마려워서 공중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문을 여는 칸마다 변기에 똥이 차 있었고, 마지막 칸의 문까지 닫아야 했을 때 느낀 희미한 절망감. 왜 그냥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을까 싶은 현실에서의 의아함. 꿈에서는 왜 우회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할까.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고 다시 뚜껑을 들어 올려 맑아진 물을 확인하는 방법 같은 것.

1-25. 잠에 들기 전 그날 저녁에 보았던 최시형 감독의 영화 <영시young poem>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장면들이 떠오르자마자 반쯤 희미한 정신으로 '아 나 이 영화 옛날에 봤던 거네' 하고 생각했다. 아닌데. 오늘 처음 본 영화였는데. 보자마자 멀어지는 영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이미지들, 마치 내 것처럼, 아련하게. 멋지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1-26. 숱한 꿈을 꾸었지만 복기하고 간직하는 데 실패한 아침. 방 밖에서 고양이 소리가 틈입하는 순간 스산히 날아갔다, 라고 쓰는 순간 고양이 꿈을 꿨다는 게 떠올랐다. 우리 집에 지하실이 있다는 걸 알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아주 커다란 상자가 보였고 안에 있는 건 누군가 갖다 버린 개들이었다. 상자를 완전히 열기도 전에 그 개들이 나에게 안길까 두려우면서도 어떻게든 내가 책임져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내가 개들을 버린 자를 잡겠다고 처벌하겠다고 생각하며 눈 쌓인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아니 그보다는 일단 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데 더 에너지를 쓰자'는 말소리가 들렸고 나는 계속해서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 경찰을 만나러 갔지만 당신은 자격이 없다는 답변, 아니 용기가 없다고 했던가? 다시 돌아온 지하실에는 모든 개들이 사라졌고 난 안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아픈데 빈 상자에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갔을 때 소복하게 모여 나를 올려다보는 고양이들. 바깥으로 뛰쳐나간 개들이 남겨두고 갔다고 했다.

1-27. 목욕탕에 여자들이 모여 앉아 있고 그 위로 세찬 물이 쏟아진다. 그들 중 한 여자가 힘겹게 일어서더니 다른 이들의 어깨를 주물러주기 시작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섬세한 손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모두에게 안마를 끝낸 여자가 이제 내 쪽으로 걸어온다. 걸어나온다. 젖은 얼굴로, 자신은 연극하는 사람이라며 방금 전까지 내가 보았던 한 컷의 긴 장면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집중해서 듣느라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꿈속에서의 보기. 꿈속에서의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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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일상 2020. 12. 6. 23:42

문득 떠오른 15년 전의 기억. 런던의 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 횡단보도 앞에서 서성이던 우리들. 나는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서 방향 잃은 사람처럼 자꾸 두리번거리며 일행들과 외따로 서있다. 그저 도로 건너편의 화려한 풍경을 더 잘 보고 싶었던 걸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속눈썹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커다란 2층 버스는 내 머리가 뒤로 빠지자마자 지나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바로 들었던 생각, 살았구나. 죽음의 기운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던 그때, 내 몸을 인도 쪽으로 당긴 선배가 있다. 그 선배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네. 같이 걷다 넘어지길래 내가 웃으며 왜 자꾸 넘어져요 하니까 내 다리가 길어서 그래 하며 웃던 사람. 죽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지나요, 선배? 땅보다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어떤 중력으로부터도 가벼워지나요, 영혼도? 

 

 

내가 잊지 못하는 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내가 놀라지 않게 잡아끌던 그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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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일상 2020. 10. 12. 00:42

덕분에 마음 밑바닥에 늘 사랑이 찰박인다. 가끔은 내가 가진지도 몰랐던 사랑의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몸 안에 쏟아진다. 손끝 발끝에 불빛이 반짝이고, 덕분에 마음껏 사랑을 쓰며 살아야지. 사랑의 힘으로 싸워야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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