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설거지하는 습관이 들었다. 원룸인 내 작은 집에서 방 쪽의 불은 끄고 부엌의 불만 켜두면 마치 캄캄한 무대에 조명 핀 하나만 켜둔 것 같다. 탁, 탁 하는 스위치 바꾸는 소리에 요란하게 돌아가던 냉장고도 소리를 꾹 참고, 고요함이 집 안 전체에 깔린다. 앞치마의 끈을 야무지게 묶고 고무장갑을 손가락 끝이 닿도록 당겨 올린다. 경건한 의식처럼 다루게 되는 이 시간이 나는 좋다. 예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접시와 그릇의 무늬도 이 시간만은 눈에 잘 들어온다. 설거지를 하다말고 그것들을 오래 쳐다보기도 한다. 값이 비싸 오래 사먹지 않던 계란을 사서 저녁식사로 후라이를 세 개나 해먹었다. 덕분에 오래 쓰지 않던 프라이팬과 뒤집개를 꺼내 썼다. 수세미를 프라이팬 바닥에 대자 검은 칠이 벗겨져 나왔다. 뒤집개의 끄트머리에 엉겨 붙은 계란 찌꺼기는 그새 굳어버려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수세미를 뒤집개에 대고 힘주어 문질렀다. 버둥거리는 뒤집개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싱크대에 뒤집개와 수세미와 주먹이 시끄럽게 부딪쳤다. 마침내 엉겨 붙은 것들이 시원하게 떨어져 나가고 몸에 힘이 풀리는 순간 손에 까끌거리는 감촉을 느꼈다. 뒤집개의 손잡이에는 징그러운 흠집이 있었다. 여린 피부에 칼로 죽죽 그은 듯한 상처였다. 갈색인 손잡이에 회색의 재질이 흉측하게 노출돼 있었다. 그 창백한 색을 바라보는데 순간 어릴 적 칼로 내 손을 푹 찔렀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자려고 누웠는데 또 사과를 먹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자꾸 과일이 먹고 싶은 게 부끄러웠다. 먹어도 계속 먹고 싶은데 그렇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 모두 잠든 컴컴한 집안에서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갔다. 구석에서 과일이 담긴 오봉을 찾았지만 과도는 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식칼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과일 껍질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끝까지 깎는 건 나만의 주문을 거는 일이었다. 해내고 나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믿음. 어느새 나는 부끄러운 것도 잊고 과일을 깎는 행위에 집중하던 찰나 칼이 미끄러졌는지 왼손이 적절하지 못한 곳에 있었는지 그만 검지에 칼이 푹 들어오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아마 신경까지 끊어졌으므로, 이상하게 자꾸만 상처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선명한 느낌은 그저 내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피의 궤적이었다. 나는 손가락 굵기보다 두껍게 휴지를 감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깎아둔 사과껍질처럼 자꾸만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싶었다. 뒤집개의 흠집은 칼자국이 아닌 화상 자국 같았다.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지진 것처럼 세 줄의 상처가 툭 벌어져 있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생긴 상처일까. 이제는 아물어 희미한 선만 남은 손가락의 상처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 사물의 상처는 고쳐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내 상처 봐라, 하고 히죽 웃으며 놀래킨 걸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상처의 표정을, 나는 흐르는 물에 갖다 대고는 오래 쳐다보았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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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런

여행 2020. 8. 29. 01:01

2016년의 여행 사진 들춰보는 새벽.
중국 샤허에서 퉁런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한 노인이 앉았다. 노인은 한 번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본 적이 없는지 안전벨트 매는 법을 몰랐다.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손짓으로 부탁했다. 나보다 많이 작던 몸집, 한 쪽 다리를 대신하던 지팡이. 퉁런에 도착해서는 동행과 함께 가는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우산도 없이 걷던 뒷모습들. 그때 나는 우산이 있었던가? 티벳불교의 가장 큰 사원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퉁런이었는데 머무는 동안 한 명의 여행자도 볼 수 없었다. 자주 비가 왔고, 완전히 혼자인 느낌이 좋아서 하염없이 걸었다. 혼자 잠드는 건 무서웠다.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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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복합물류 B동 3F

일상 2020. 6. 27. 01:50

서울복합물류 B3F

 

컨베이어 벨트를 지나가는 박스가 찢길 때마다

손목 약한 사람들은 먼지를 먹었다

 

먼지가 먼지를 먹을 때마다

사람들은 매번 이발하는 걸 잊었다

 

그들은 산발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컨베이어 벨트 아래로 뛰어 든다

 

그래도 꿈에서 깨지 못하고

여전히 박스의 무게는 가늠할 수 없다

 

손목이 꺾일 때마다 손 안에 새소리가 고였다

바코드가 찍히자 먼지를 털며 달아나는 송장번호 10183478832800번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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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미미

일상 2020. 5. 31. 22:36

장난감 낚싯대를 눈 앞에서 흔들면 미미는 그걸 따라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며 쫓아다닌다. 반면 시시는 동요하지 않는 편이다. 일단 거리를 두고 물러서서는 목표물이 움직이는 걸 오래 지켜본 뒤 사냥 자세를 제대로 취해 달려든다. 실패하면? 시도한 적 없다는 듯 모른 척하며 돌아선다. 밥도 미미는 한 자리에 앉아 묵직하게 끝까지 먹는다면 시시는 꼭 두 번, 세 번에 걸쳐 나눠 먹는다. 먹으면서도 시시는 미미가 먹는 걸 계속 곁눈질한다. 용변을 볼 때 실수로라도 눈이 마주치면 시시는 바로 불평을 터뜨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오는 편이고, 미미는 쳐다보거나 말거나다. 자신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깐깐해 보이지만 한 번씩 똥꼬에 똥을 달고 나오는 건 시시다. 미미가 예민하게 구는 건 양치할 때, 발톱 깎을 때이고 시시는 그런 일들엔 요란하게 굴지 않는다. 미미는 가끔 사람처럼 몸을 한껏 늘여자는데 시시는 어릴 때 이후로 배를 드러내놓고 잔 적은 없다. 참 다른 둘. 엄마를 닮았을까 아빠를 닮았을까. 길에 살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 점점 서로를 닮아가기도 하겠지. 나를 닮은 것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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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자유에 있다> 왕빙의 신작 제목이다. 4시간 30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중국 정부로부터 반동 지식인으로 찍혀 고난을 겪고 지금은 미국으로 망명해서 25년째 살고 있는 가오 에르타이의 얼굴이 나온다. 영화의 대부분은 그의 인터뷰다. 두 가지 장면에서 나는 코끝이 찡해졌는데, 분명 좋은 감동이었다. 가오 에르타이가 반동으로 처음 찍힌 건 미(美)에 대한 논문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보고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추하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개인의 자유다. 새가 우는 건 객관적이지만 새가 우는 걸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건 주관적이라는 거다. 어쩌면 당연한 이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일에 대해 억압받으며 살진 않았다. 마음껏 아름다워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움은 개인의 자유에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유심론자가 되고 유심론자는 유물론에 반대되니 곧 반동으로 찍혀 갖은 노역과 해고와 추방을 반복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낄 자유와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더 소중히 지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오 에르타이가 공안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아주 글씨로 적어 신발 밑창과 낡은 옷의 튿어진 틈 사이에 넣어서 끝내 지켰다는 작은 쪽지들이 아름다웠다.

또 하나의 장면은 아니 이야기는, 그의 누나에 관한 것이다. 결국 그의 집안은 죄다 우익으로 찍혀서 재산을 몰수당하고 아버지는 노역을 살다 과로사했다. 누나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외지에서 그림을 배우던 가오 에르타이와 달리 누나는 고향에서 어머니와 계속 지냈다. 우익으로 찍힌 가족은 주민들이 부르면 광장으로 불려나가 공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누나는 비판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가는 차 안에서 누나는 잠이 들었고, 공안은 화를 내며 깨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누나는 금세 또 졸았단다. "누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마음에 담아두질 않고 누굴 원망하지도 않는다고." 구십이 넘은 누나는 여전히 고향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남동생이 망명을 떠나며 두고 갈 수밖에 없었던 병이 든 조카를 끝까지 돌보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무심하고 묵묵하게 끈질긴 한 인간을 아름답다고 느꼈다. 비록 내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딸의 죽음을 말한 후 안절부절 못하는 가오 에르타이가 약을 먹고 집안을 계속 서성이다 밖으로 나가고, 영화은 그가 정원의 나무를 손질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무엇을 잘라내고 싶은지 그는 계속해서 잘라내고 또 잘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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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 (중략) 직접 행동은 양가적입니다. 여전히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힘에 대한 증거처럼 보이는 직접 행동 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직접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비-직접 행동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치란 비-직접 행동과,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원거리 행동"action at a distance이라 부른 것과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체계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직접 행동을 취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역설은 직접 행동이 취해질 때만 체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직접 행동이 지닌 중요성의 상당 부분이 그것의 직접적인 효과 너머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직접 행동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청원이라는 양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대타자로서의 자본에 호소하는지 아니면 그러한 대타자의 부적절함을 증명해 주는지가 문제겠죠. 우리는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항 세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조디 딘: 당신은 왜 공산주의가 아니라 포스트자본주의라고 말합니까? 왜 당신은 적이 우리를 비난하는 방식에 신경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계속 비난할 겁니다. 왜 공산주의가 진보와 계몽의 편에 있다고, 공동의 자원과 책임을 향한 집합적인 접근만이 자본주의적 야만을 종식시킬 유일한 대안이라고 단언하지 않습니까?

마크 피셔: 우리를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태를 손쉽게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거둔 성공 중 하나는 비자본주의적인 것을 전체주의적인 것과 결합시켰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싫으면 북한에나 가서 살아라" 같은 논점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산주의'보다 '포스트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수한 용어들의 자기 복제적인 잠재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한 용어가 지닌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전파할 수 있는 그것의 힘입니다. 우리는 브랜드 컨설턴트나 광고업자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산주의' 같은 단어를 거부할 텐데, 이 단어가 뒤집어쓴 오명을 벗겨 내는 개념적 세탁 작업에 너무 많은 노력이 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우리는 이 용어를 위한 새로운 맥락을, 그것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적 성좌를 창출한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무거운 유산이 되어 버린 나쁜 연상들을 대동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와는 반대로 '포스트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비어 있으며, 나아가 그 내용을 채우라고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용어는 또한 원시주의의 유혹을 피해갑니다. 우리는 전자본주의적 농경 사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어떤 것, 자본주의가 구축하고 동시에 좌절시킨 모더니티 위에서 건설할 수 있는 어떤 것의 출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이 용어를 선호하는 또 다른 까닭은 그 용어가 우리의 승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자본주의가 무엇일지 묻는 일은 우리가 승리했을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 저, 박진철 역, 리시올 출판사
p157-159, 부록.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될 여유가 없다: 마크 피셔와 조디 딘의 대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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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고양이

일상 2020. 1. 19. 19:58

"어떤 대상을 불쌍한 존재로 보면 여러분들은 뭘 하겠어요? 길고양이가 불쌍하니 어떻게든 구조하고, 입양 보내고, 집고양이처럼 다들 편하게 사는 쪽에 에너지를 쏟고 몰두하게 되실 거예요. 또는 길고양이를 아주 천덕꾸러기, 민원만 일으키는 그런 존재로만 본다면 어떤 접근을 하겠어요? 민원 해결하기에 급급한 대상으로 보고, 그 이상의 해결책을 찾는 방향으로는 발전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오랜 기간 저희 관악길고양이보호협회와 관악구에서는 많은 고민을 해왔어요. 이 길고양이를 어떤 존재로 볼 것이고 길고양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야 되는지. 가장 핵심적인 건 이거였던 것 같아요. 길고양이는 영역 동물이에요. 영역 동물이라는 건 무슨 얘기냐면요,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그 땅에 주민들이 다 이사를 가도, 캣맘이 한 명도 없어도, 공무원이 구의원이 다 바뀌고 모든 게 다 사라져도 거기서 살아간다는 뜻이에요. 우리보다 더 원주민이에요. 없어지지 않아요. 주민은 이사 갈 수 있고 환경을 바꿀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길고양이들은 그곳을 영역으로 삼고 원주민처럼 사는 아이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적어도 고양이는 민원유발자도 아니고 천덕꾸러기도 아닌,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 그냥 우리보다 더 앞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죠. 뒤늦게 들어와서 인간 위주와 편의대로 환경을 만들어놓고 고양이들이 살지 못하게 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겠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얘기 있잖아요, 공존. 또 요즘 우리가 많이 듣는 말 있잖아요. 길고양이는 길에 사는 우리의 작은 이웃이라고. 작은 이웃으로 보고 길고양이와 함께 살고자 모색하는 길은 주민이 다 떠나고 캣맘이 하나도 없어도 이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삶의 환경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관악길보협 서유진 대표의 발언 중, 2020년 1월 8일 서대문구 동물정책 토론회에서)

+관악길고양이보호협회(관악길보협) https://cafe.naver.com/gwanakani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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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고양이를 보면 반갑다. 매일 채워두는 사료를 한그릇 싹싹 비운 걸 확인할 때마다 보람되고 안심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지배하는 건 가엾고 불쌍하다는 마음이다. 아픈 고양이를, 죽은 고양이를 볼까봐 두렵다. 이미 겪은 슬픈 일들을 잊지 않는 걸로도 마음이 버거울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친 고양이를 구조하는 일로는, 나 혼자 전전긍긍하며 동네에서 몰래 밥주는 걸로는, 이 상황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사실 이건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건의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될 테고. 이 과정을 관악길보협이 앞서 해나가고 있다. 많은 도움을 받는다.    
고양이 덕분에 나는 주위를, 동네를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좋은 시민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고마운 고양이들. 그런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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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에서

일상 2019. 11. 3. 17:51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한 아이가 달려간다. 통통한 여자 아이. 구르는 발소리가 묵직하다. 휠체어를 미는 노인이 뒤따른다. 서두르지만 좀처럼 빨리 나아가진 못한다. 횡단보도의 끝에 다다르자 아이는 좌측으로 계속 내달리고 노인은 오른쪽 길로 꺾는다. 내가 가는 길은 노인 쪽이다. 휠체어에는 다른 노인이 있다. 그의 머리칼은 정수리부터 둥그렇게 세고 있다. 이마에만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 기운이 없는지 어깨는 약간 앞으로 기울어졌고, 양손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쥐고 있다. 힘주어 잡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 다시 반대로 달려온 여자 아이가 휠체어를 미는 노인의 등을 딱 때린다. 질책하는 목소리였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는 남자 노인. 휠체어 뒤에는 노란 유치원 가방이 걸려 있다. 아이는 걸음 속도를 조절하며 휠체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이내 여자 노인의 손을 잡는다. 걸어가는 셋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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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루계곡

여행 2019. 9. 11. 00:43

좌석 1, 2번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했다. 인도의 마날리에서 수도 델리까지는 12시간이 훨씬 넘게 걸릴 터였다. 우리는 심야버스를 탔다. 가장 좋은 좌석이라고 들었는데, 나와 친구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가는 내내 불편했다. 운전기사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였는데, 시크교도는 인도에서 잘사는 편에 속한다. 보통의 인도인들에 비하면 체격이 좋다. 그의 넓은 등판을 계속 볼 수 있는 건 좋았다.
버스가 시내에서 벗어나면서 해가 졌다. 밝은 건 달빛과 차들의 헤드라이트뿐이었다. 고속도로 비슷한 곳으로 진입했는데 난간이 없었다. 난간이 없는 도로에서 떨어지면 낭떠러지였다. 아래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꿀루계곡이라 불린다고 했다. 그 풍경을 보자마자 바로 압도당했다.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었다. 새롭거나 색다르게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많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강은 바닥이 없고 물안개는 거미줄보다 촘촘했다. 그 사이 무엇이 걸려들었을지 모른다. 공포를 느꼈다. 당장 피하고 싶은 공포감은 아니었다.
1차선보다 조금 더 넓은 도로는 맞은편에서 차라도 다가오면 낭떠러지 반대편에 바짝 붙은 채 기다려야 했다. 꺾어지는 길이 나타나면 마주 달려오는 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익숙한 듯했다. 숱하게 핸들이 여러 바퀴 돌아가고 또 한 번 꺾어지는 길이 나타났을 때 환한 빛에 드러난 건 검은 허공이 아닌 소들의 얼굴이었다. 앞다리를 꺾은 채 웅크리고들 앉아 우리를 보고 있었다. 빛에 눈부시지 않을까, 아니 소들은 빛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버스의 헤드라이트에 소의 얼굴이 오래 밝았다가 다시 검어지던 순간, 나는 문득 내 죽음을 생각했다. 나는 델리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과 예감 비슷한 것이 들자 나는 곧 죽게 될 것이었다. 이제 나는 스스로를 괜찮다고 성심껏 달래기 시작했다. 사람은 죽는다. 짧지만 죽음을 예감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살던 곳에서 멀리 와 죽는 게 억울하지도 두렵지도 않다, 괜찮다. 수많은 일본 여행자들이 마약을 찾아 이 깊은 계곡까지 들어왔다가 죽거나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들은 모험심이 강한 걸까, 삶을 함부로 대한 걸까. 낭떠러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소들은 차가 피할 거라고 믿는 걸까 더는 물러설 데가 없는 걸까. 어쨌거나 괜찮다. 이 도로 위에서 내가 죽더라도. 슬펐다.
나는 꿀루계곡의 물안개와 달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겨 있어서 얼핏 운전자의 등판이 보였을 때에야 내 죽음을 상상하길 그만둘 수 있었다. 버스는 넓고 낡은 휴게소에 내렸다. 나와 동행은 오줌을 시원하게 싸고 마른 볶음밥을 나눠 먹었다. 불편해서 밤새 못 잘 것 같던 1, 2번 좌석에도 적응해 이후 우리는 내내 잤다. 다시 깼을 때는 마른 공기와 매연 냄새가 진동하는 도시 델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기 직전이었다.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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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를 애지중지하셨을까.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소중해진다. 그분이 사랑한 나의 좋은 점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건 삶이 비루해지려는 고비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자꾸 사진을 찍어대듯이 사람이 한세상 살고 나서 남길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면 자꾸자꾸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손자가 고삐를 잡은 마상에 앉아서 이 힘든 여행이 훗날 손자에게 무엇이 되어 남을까 상상해보며 부디 사랑받은 기억이 되기를 빌었다.” (박완서, 『노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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