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아니었다면'에 해당되는 글 80건

  1. 2012.03.13 말하는 건축가 2
  2. 2011.10.18 최악의 친구들
  3. 2011.05.09 토리노의 말
  4. 2011.02.25 혜화 생각 5
  5. 2010.10.08 전생을기억하는분미아저씨 3
  6. 2010.08.26 Foil Twitch Betty
  7. 2010.05.20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8. 2010.05.17 단편 다큐의 미덕 2
  9. 2010.05.06 왜 약속 안 지켜요. 2
  10. 2010.05.04 "부끄러워하지마 부끄러워하면 어두운 게 되는거야" 2

                                                       
                                                

말하는 건축가(감독/정재은)


1. 말이 많은 다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가 하는 말에 자꾸 귀기울이게 된다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가까이 가게 된다
내 앞에 앉은 한 남자는 몸을 점점 스크린 쪽으로 바짝 다가가던데, 스크린밖 그 광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보고 듣기에 충분한 상황임에도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들으려는 행동. 혹은 행위. (행위를 먼저 떠올렸다 행동으로 옮겨가고, 행동에서 다시 행위로, 마지막으로 행위에서 행동으로 이동해 본다)


2. "사람은 늙을수록 철학 공부를 해야 한다. 맑고 초롱한 눈빛으로 죽음을 정면을 마주할 수 있는 위엄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다."
하고 말하던, 건축가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던 카메라가 물러나 당신을 비춰주는 햇빛을 손으로 받치며 감탄하는 장면을 잡았을 때, 살짝 흔들리던 카메라.   


3.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있다.”
제대로 배운 의식 있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이유, 끌림이 당연하다면. 다들 그의 말에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정기용 건축가를 보면서 기자 리영희를 간간이 떠올렸다.


4. 카메라가 좀 흔들리고 포커스가 좀 덜 맞더라도 상황을 완벽하게 담지 않아도 얘기하려다 말고 또 말아도, 답답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영화의 리듬을 내가 탔느냐, 나와 잘 맞느냐 하는 것. 


5. 추리고 추린다면 이 컷은 꼭 없어도 될 것인데 굳이 왜 붙였을까 싶은 순간, 이 장면을 선택하고 싶었을 감독의 마음을 내가 느낄 때.


6. 장면과 컷 사이는 좀 거칠어도 시퀀스 사이와 거리는 예민하고 섬세했다.


7. 갈등이 일렁-거릴랑말랑하며 긴장을 좀 자아내는가 싶지만 끝까지 밀어 부치려는 연출의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집요함이 없다. 욕심이 없다. 역으로, 연출자의 집요함과 욕심이 필요하지 않다.

다큐란 무엇인가?


8. 다큐를 보면서 /보여주지 않은 것/을 계속 생각하는 것에 습관이 들었다.  

하지만 이 다큐를 보고도 최종본에 나오지 않은 촬영분이 궁금하지 않았던 건,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 욕심내는 것보다 소박하고 담백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살면서 느끼듯, 배우듯.


9. 제작일기를 몽땅 읽고 간 것이 다큐를 보는 데에 도움이 됐다. 누구는 방해됐겠다 할 지도 모르겠다. 영상 자체로 평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다큐에, 이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 


10. 건축가 정기용.
지식채널e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ommand=vod&client_id=jisike&menu_seq=1&enc_seq=3097662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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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친구들, 2009
감독/남궁선
출연/김수현,배혜미,김은미 



 작가들은 흔히 말한다.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나 이야기를 어떻게든 내 식으로 풀고 가고 싶었다”고. 
인 상 깊 은 것. 몸과 마음에 새겨져 온종일 그것에만 사로잡히거나 살면서 드문드문 그것 때문에 마음 쓰이는 것. 
그래서 풀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처음에는 저희 윗집에 살 던 남자애가 죽는 사건이 있었어요. 분신을 해서 집이 타고 그 어머니는 도망을 못 치다가 늦어서 뛰어내리고. 저는 자느라 몰랐어요. 아침에 자다가 뒤늦게 나왔더니 일은 다 끝난 상황이고 소화전에서 내려오는 물만 계속 흐르고 있더라고요. 그 자체가 되게 충격적이었죠. 그런데 그 계단에서 시체를 들고 내려오는 거예요. 계단에 저 혼자 있었거든요. 그 기억이 되게 강렬했었는데 지내다 보니까 어느 순간 그걸 까먹었더라고요. 이 영화는 졸업작품이다보니까 졸업작품을 준비해야할 시점에 그 생각들이 났어요. 저희가 10년 전 쯤에 고등학교 다닐 때 자살하는 애들도 되게 많았고, 그래서 계속 생각이 나니까 이걸 어떻게 한 번 풀고 지나가야 되겠다 해서 시작을 했어요.”
 

긴 답변이지만 옮겨 봤다. 결국 이 영화에서 보게 될 장면이니까.

계속 생각나는 걸 풀고 가고 싶었다는 감독, 이 기억에 붙들려 왜 그랬을까를 물어보고 사연을 상상해보고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 마음. 그 호기심은, 그 욕심은, 그 노력은, 결국 애정이지 않을까. 수많은 영화들에 어떤 진심이 있지만 느껴지는 정도에 차이가 있듯, 그래 이 영화는 애정의 진심이 많이 느껴지는 영화다.

어쨌거나 표현한다는 건 결국 어떻게 풀어내느냐다. '내식으로'말이다. 그리고 그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연출자의 취향과 재능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독특하고 센스 있고 영리하다. 결코 서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밀고 가는 영상과 나레이션이 재미와 감동을 더하는데다, 이야기가 갑자기 산으로 가는데 계속 빠져 들어가다 보면 다 연결된 이야기고- 깨고 보면 꿈, 이런 식이다. 이야기의 큰 맥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아기자기하게 뒤틀린 구조들이 참 재밌다. 장치가 많아 위험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감각을 믿는 듯한 연출자의 자신감과 결국 그 감각이 관객에게 충분히 어필하는 그 재능이, 부럽다. 



재밌는 캐릭터 셋이 등장한다. 갓 스무 살을 맞은 마인선, 노박, 그리고 춘기. 마인선의 1인칭 주인공 나레이션으로 풀어나가는 이 영화의 의도는 “21세기 서울 도심에서 친구를 잃기까지의 회고”다. 결코 악의는 없었지만, 한 사람에게 <최악의 친구들>이 되어버린 슬픈 이야기. 악의 없음을 증명하는 듯한 재밌는 에피소드에 시작은 희극이지만, 어쨌든 한 친구를 잃으면서 비극으로 끝나는 재밌고도 슬픈 이야기.

인선의 첫 섹스 상대였던 춘기가 조기유학을 떠난 이후 4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셋은 다시 만났다. 그저 우정 이야기는 아니다. 엄마를 미치게 한 세상과 자신을 미치게 하는 엄마와 가족과 세상과, 결국은 자기도 미친 것 같고, 대체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어디에도 마음 붙일 데 없이 지금 이곳은 낯설기만 하고, 그리하여 기대고 싶은 곳이 친구였건만 그 친구들의 애정은 각자의 욕망을 숨긴 애정이었으니 서로 뭐가 잘못된 지도 모른 채 상황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춘기는 말했다.
 

“집에 가기도 싫고 군대 가기도 싫고 미국에 가기도 싫고. 난 왜 이렇게 어딜 가 있어도 잘 못 와 있는 것 같을까. 동네가 너무 낯설어. 다들 뭘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애.”

영화는 이렇게 시작했다. "4년 만에 춘기와의 찬스를 다시 잡고 싶었다"고,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춘기는 죽었다. 찬스는 끝났다" 

춘기가 좋아 찬스를 만들려던 마인선은, 서로의 상처를 아릿하게 느꼈지만 결국 어긋내버린 노박도, 그저 춘기가 잘 되길 바랐던 엄마도, 춘기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사랑했다. 춘기가 좋아하던 그 한강뚝섬도 어떻게든 더 잘해보고 싶어 한강르네상스 운운하며다 뒤집는 거 아닌가. 아 그렇지만 엇나가는 애정. 맞지 않는 취향. 본인만 아는 본심. 언제나 품는 본심을 위한 속셈. 외로운 사람은 더욱 외로워지고.

이 모두를 감독은 연민하고 있다, 애정을 품고 있다, 감히. 이런 지점을 느끼는 곳에서 연출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이런 장면이 있다. '우리 엄마 미쳤다'고 하는 그 엄마, 춘기의 엄마, 비오는 날 인선은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일주일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 춘기를 걱정하며 귀티나 보이지만 쪄든 얼굴을 더욱 찌그러뜨린다. 그리고는 비오는 거리를 향해 우산을 펼치고는 또각또각 걸어간다. 그때 인선에 눈에 보이는 건 그녀의 신발 뒤꿈치, 끊어진 샌들의 끈. 삐틀거리는 샌들의 굽.. 춘기를 미치게 하는 그 엄마, 강남 한양아파트에 살며 자식걱정에 유별난 그 엄마의 신발 뒷굽은, 그랬다. 

 인선에게 춘기는 ‘4년만의 찬스’였다. 하지만 그녀는 춘기의 외로움을 알지 못 했고, 당연히 알 수도 없었다. 네 맘이 내 맘과 같지 않고, 우리는 조금씩 진심을 숨기며 타인에게 접근한다. 이 풍경이 한없이 낯설어지기 시작하면 외로움에 지고 마는 거다. 춘기도 그랬던 거 아닐까. 
춘기가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르는 그 장면에서, 덮히는 마인선의 독백
“춘기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장면이 다음으로 넘어가더라도 여전히 그 질문에 붙들려 춘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묻고 또 물어보는 나를 발견한다. 이때 나는 영화의 진심, 그리고 내 진심을 느낀다. (이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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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친구들 볼 수 있는 사이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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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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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벨라 타르, 아그네스 흐라니츠키

 

니체가 미쳐버리게 된 사연을 나레이션으로 깔리며 시작하는 영화. 채찍질 당하면서도 꿈쩍않는 말을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가 그 말의 목을 안고 몹시 울었다던 니체.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 한 마디를 남기곤 이후 죽기 전까지 침대에서만 생활했던 그. 

나레이션이 끝나면 블랙화면이 걷히고 흑백화면이 열린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없을 장면. 담고 있는 내용은 단순하지만 보여지는 것은 잠시 숨을 멈추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다, 깊고 낮게 깔리는 음악에, 육중한 말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달리고 그 위엔 지친듯 채찍질하는 노인이 있다.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이들을 집요하게 훑는다. 노인이 다다른 곳은 지독한 폭풍이 몰아 치는 황망한 들판, 그 위에 낡은 집. 그 곳에 노인과 딸, 그리고 말이 산다.   

옷을 입고, 입혀 주고, 옷을 치우고, 물을 긷고, 감자 두 알을 삶고, 감자 한 알을 먹고, 감자 껍질을 치우고. 잠에 들고 다시 일어나며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 이것은 아주 가난한 자들의 일상. 영화는 서른 개 남짓한 쇼트의 아주 긴 호흡으로 엿새 간의 그들을 담는다. 이들은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지만 창밖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언제부턴가 시작된 폭풍은 멈추질 않는다. 이들의 생활도 곧 순탄치 않아질 것이다. 마치 종말이 진행되고 있는 듯한 지구의 어느 곳. 사실 이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현재일 것 같지만 행색이 과거같기도 하며 결국엔 미래라 짐작해보게 된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지구의 종말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으므로.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현재가 아닌 현실. 

둘째 날,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아마 매일 아침 말을 끌고 나갔을 노인. 아마도 생계수단이자 이동수단이자 유일한 전 재산일 귀중한 말. 갑자기 말은 꿈쩍 않는다. 노인이 아무리 채찍질해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 않기 시작한다. 대체 왜. 알 수 없다. 하지만 노인은 곧 먹겠지 하면서 말을 재촉하거나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다. 아주 수동적으로 보인다.

다음 날, 또 다음날 물을 긷던 샘마저 마르고 폭풍은 더욱 심해진다. 노인은 그제야 급히 이곳을 떠나자고 말한다. 그들은 짐을 싼 후 말을 끌곤 급히 집을 떠난다. 황망한 들판을 지나 언덕을 막 넘어 이제 탈출에 성공할 것이라 짐작할 즈음, 부녀와 말은 그 언덕을 넘어 다시 집으로 되돌아 온다. 대체 왜. 알 수 없다. 카메라는 그들을 뒤따르지 않았다. 부녀와 함께 오래 살아온 듯 인물을 뒤따르거나 혹은 동선을 알고 미리 움직이거나 기다리곤 했던 카메라는 이때 집 앞에 서서 멀어져 가는 그들을 지켜보기만 한다. 언덕을 막 넘어 사라질 때쯤 곧바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집으로 되돌아 오는 그들. 이때, 기다렸다는 듯 여전히 집 앞에 있는 카메라라는 존재는 굉장히 섬뜻해진다. 이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리고 다시 태연히 그들의 일상을 쫓는다. 카메라는 유령 같다.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거기에 함께 있는 또 다른 존재. 

다시 돌아온 부녀와 말, 아니 어디도 갈 수 없었던 그들. 그날 밤엔 집안을 밝히던 등불마저 꺼져 버린다. 노인은 말한다. "이 어둠은 뭐지?"  다음 날, 폭풍은 멈췄다. 하지만 아침은 오지 않는다. 해가 뜨지 않는다. 껌껌한 집 안, 식탁 앞에서 노인과 딸은 삶지 않은 생감자를 씹어 먹는다. 노인은 말한다. "먹어, 먹어야만 해."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적극적으로 대처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모든 걸 체념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인간의 태도. 자연 재해든 사건이든 어떠한 일들 앞에서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인간. 그 미묘한 줄타기에서 느껴지는 서글픔과 무력함, 그리하여 떠밀릴 때까지 밀리다 끝간에서 행하는 몸짓이나 지친 몸에서 나오는 몇 안 되는 말들이 아주 존엄해지는 순간. 

이 영화가 주는 물질감은 아주 지독하다. 육중한 말의 몸, 세월의 흔적을 몸에 새긴 듯한 어덜더덜한 그 몸, 문을 열면 폭풍의 소리, 때릴듯 달려드는 바람, 그 바람에 치이면서 물을 길러 걸어가는 딸의 몸뚱이. 감자 껍질을 벗겨 내는 노인의 손길, 흡입하듯 감자를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내는 소리, 아주 일상적인 행동이지만 그 움직임은 굉장히 기이하다. 뻔하지만 새롭고 익숙하지만 낯설다. 이런 분위기와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를 어떤 감독이 집요하게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면 그의 연출력에 정말 감탄하게 된다. 이게 바로 거장의 힘이구나. 



암울한 분위기의 영화지만 나는 이 영화 때문에 우울해지지 않았다.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지도 않았고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살면서 아주 자주 이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떠올리는 것이 나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는 모르겠다. 더 자주 떠올리는 영화일수록 그저 보는 게 아니라 체험했다는 느낌에 가까운 영화다. 그런 게 또 내게 좋은 영화들이었다. 그래서 또 다시 뻔하지만 낯선 질문을 하게 된다. 대체 영화란 뭔가. 

생감자를 씹어 먹는 부녀의 모습에서 카메라는 제 멋대로 제 눈을 닫아 버렸지만, 폭풍도 멈춘 깜깜한 그곳에 부녀와 말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계속되는 물음. 니체는 왜, 저는 바보였다고 했을까. 그 풍경의 무엇이, 그 말의 대체 무엇이 그를 미쳐 버리게 한 것일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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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생각 _영화 <혜화,동>                                                     http://idag.tistory.com/261











  버려진 개들을 그냥 두지 못 해 집으로 데려오는 여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바닥 여기저기 밟히는 개똥을 치우느라, 달려드는 개들 밥 주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반복되는 자분한 일상, 텅- 비어 있는 여자의 얼굴. 그저 멍- 한 것이 아니라, 이미 무언가, 한차례 큰 파도가 지나가고 난 뒤의 고요한 얼굴, 그래서 한 번씩 짓는 웃음에 괜히 짠해진다.

혜화. 자음과 모음 끝에서 꽃들이 움틀 것 같은 이름, 혜화. 그녀의 이름은 혜화다. 5년 전, 열아홉 혜화는 애인 한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씩씩하고 밝던 혜화, 아직 열아홉, 앞 일이 깜깜한데도 사랑하는 한수와 함께 한다는 생각에 철없이 웃었다. 하지만 한수는 현실에 맞서지 못 했고 결국 도망쳤다. 버림받았다고 느낀 혜화는 상처, 받는다. 세상의 모든 슬픔이 제 것이 된 듯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내 몸에서 한 아이는 자라고 그러나 이 아이의 앞일은 장담하기 힘들고, 그래 그러고보니 나란 사람 데려다 키운 아이구나. 그럼 난 생모에게도 버림받은 건가,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나를 낳았을까. 혜화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하루를 못 넘기고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는 분노에, 자신 역시 겁이 나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 했다는, 그래서 제 아이가 죽어 버렸다는 죄책감이 뒤섞여 혼란의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또 그게 강한 그리움이 되었겠지. 뚜렷하지 않아 해소하기조차 어려운 감정이 혜화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5년이 흘렀다. 그 시간을 혜화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아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버려진 개들을 더욱 쫓아다니기도 했을 것같다. 그 사이 혜화가 살던 집은 철거가 됐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났을 것이고 너는 엄마가 되면 정말 잘할거야, 라는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철렁하기도 했겠지. 마음이 가는 사람이 생겼지만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한다 했을땐 어떤 울컥함이 치밀었는지, "왜 난 아니에요?" 라고 정색했다 금세 얼굴 풀어지며 장난스런 표정을 지을 땐, 5년 전 혜화의 캐릭터와 그 사이 어떤 시간을 살아낸 후의 혜화 느낌이 중첩되면서 보는 내가 철렁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는 생각, 아, 정말 혜화구나.

그건 그런 상황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와 정말 훌륭했기 때문일 것이다. 5년이란 시간을 살아낸 혜화를, 그녀를 연기한 배우 유다인이 그 시간을 다 겪은 듯 달라진 분위기와 얼굴을 만들어 내는 건 참 놀랍다. 왜 혜화를 연기하고 싶냐는 감독의 말에, ‘혜화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요’라는 배우 유다인의 대답 한마디가 추상적이지 않고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도 스크린에서의 결과물 때문일 것이다.  

영화 초반, 탈장된 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하얗고 꼬리가 노란 개. 혜화의 철거된 옛집을 어슬렁거리는 개 한 마리. 똥꼬에 소세지처럼 생긴 뻘건 장이 하나 튀어나온 채로, 자각증상이 없는 개인지라 제가 아픈지도 모르고 유유히 걸어 다니는 개 한 마리. 그 개를 치료해 주고 싶어 먹이로 유혹하고 덫을 놓아 보지만 아무래도 혜화는 그 개를 잡기가 힘들다.

그 개를 만난 즈음, 혜화는 한수와도 다시 만난다. 한수를 다시 보는 건 제 상처와 다시 마주하는 일이고 그렇다면 다시 분노와 죄책감과 그리움 같은 것들로 뒤엉킨 감정들이 다시 온 마음을 헤집어 놓을 텐데, 혜화는 다시,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혜화가 한수를 다신 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진 않다. 또 한수 역시 겪었을 고통과 상처가 혜화에겐 위로이기도 할 것이다. 한수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진 못 하더라도 내 안에만 갇혀 있던 상처를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치유는 시작되는 거니까. 사실, 버려진 개들에 대한 관심은 그저 제 상처의 투영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감독이 혜화라는 사람을, 또 탈장된 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린 이유가 있다고 한다. 다큐 조연출을 하던 무렵, 촬영 테잎 하나를 보았단다.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하면서 유기견을 데려다 집에서 기르는 여자였는데, 촬영 테잎 속 여자는 탈장된 개를 발견했다는 제보를 받곤 그 개를 잡으려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심지어 밤새 잠복까지 하며 개를 기다렸다. 그랬는데도 결국 마지막 포위망까지 피한 채 개가 달아나자 여자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PD는 여자보고 왜 우냐고 물었다. 그 여자는 ‘도와주려는 건데..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지 모르겠다며..도대체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며.’며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렸다 한다. 감독은 당시 그 영상을 보면서, 마음이 좀 짠해지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싸해지기도 했다고 말한다.

“한 겨울의 새벽, 어느 변두리 공터에 주차된 차 안에서, 버려진 똥개 한 마리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굵은 눈물 뚝뚝 흘리는... 이 여자분의 외로움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그 여자의 어떤 상처를 추측해 보았을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시나리오를, 영화를 만들게 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버려진 개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혜화의 행동, 그거 정말 절박하기에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단지 측은한 것들 앞에 머물고 서성이기만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일텐데, 버려진 개들을 찾아 나서고 기어코 제 손으로 보살피려 집으로 데려온다는 사실은, 그 마음이 얼마나 차올랐기에 그리할까 싶다. 또 그리하기 때문에 그 상처난 마음이 넘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여전히 표정은 담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혜화 역시, 똥개가 제 마음을 몰라준다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 여자처럼, 많이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참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아직 임신 중인 혜화, 부른 배로 마루에 앉아 손톱을 깎는다. 손톱의 매니큐어는 한수와의 추억이 담겨 있다. 혜화는 손톱깎이로 그 손톱을 하나씩 똑똑 끊어내다 손톱 깎는 걸 멈추고 끊어낸 가늘고 긴 손톱 하나를 집어 든다. 그리곤 제 손목에 갖다 댄다. 그러다 말 것 같은 행동은 기어코 제 손목에 상처를 낸다. 그때 어디선가 굴러 들어온 강아지 한 마리. 하얗고 꼬리가 노란 강아지. 집 마당에서 기르던 개 혜수를 더 잘 키울 수 있는 다른 집에다 팔아 버렸는데, 혜수 새끼 한 마리가 따라가질 못 하고 지금 혜화 눈 앞에 나타난 거다. 동그랗고 까만 눈으로 바닥을 비비닥 거리는데,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혜화는 컷의 말미에 조그맣게 속삭인다. 미안

날카로운 손톱에 긴장되던 마음이 '작고 뭉클한' 강아지가 마루로 굴러 들어오자 파르르 풀렸다가 그 끝에 조그맣게 들리는 혜화의 미안,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다시 뚝 떨어진다. 짜맞춰서 억지스럽기도 할 장면이지만 튀게 느껴지지 않은 건 이 씬 자체가 환상같기도 해서인 것 같다. 중요한 건 아주 '잘' 짜맞춰진 극적인 상황이라는 것.  

결국 혜화는 탈장된 개와 다시 만났고, 그 개는 그 날 마루로 굴러 들어왔던 하얗고 노란 강아지였다. 그러니까 혜수 딸. 지금은 마르고 지저분한 모습에 제가 아픈지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미련한 개. 우연히 또 운명처럼 혜화의 손에 끌려 치료를 받으러 간다. 개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치료 받고 혜화의 곁에서 잘 지낼 수도 있을 것이고 치료 받기도 전에 다시 달아나 버릴수도, 혜화가 왜 내 마음 몰라주느냐고 눈물 뚝뚝 흘려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고 내 마음일테니까. 혜화도 제 마음을 어쩌지 못 해서 이러는 거겠지. 인물의 마음 이렇게 알고 싶고 또 생각하는 영화는 오랜만이다. 아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으면서도 차분하게 이어지는 이 한편의 영화, 혜화를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화.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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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음이 완전한 끝이었으면 했다. 죽음 이후도, 다음의 생도, 부디 없기를. 지금 내 몸뚱이가 죽으면 완전한 무로 돌아 가길. 부디 마지막이기를.

  하지만 엉클분미를 보는 동안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 계속 무언가로 나아간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시간도 공간도 없이. 분미가 후아이를 안고 있을 때, 분미 아저씨의 죽을 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오래 숲 길을 걸어갈 때, 탕이 제 몸에 비눗칠을 할 때, 여백의 시간이자 온전한 시간인 그 컷들안에서 종종 그런 생각이 찾아왔다.
 죽어서 무언가가 되어도 나쁘지 않겠다, 다른 무언가로 태어나도 괜찮겠다. 인생이 아닌 생을 살아가기. 인생이라 난 더욱 긴장하며 사는지도 몰라, 
 내가 지금 살아나가듯이 죽어서도 죽어나가는 것, 그렇게 죽어나가다 살아나가고 또 죽어나가며 그렇게.


하지만 이 모든 게 내가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의 문제가 아니란 걸,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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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이제 이대로 다 끝난 건가요. 완전히?"

 아이들이 저지른 잘못을 숨기기 위한 어른들의 공모와 합의가 성공하자, 미자는 묻는다.
 "이대로 다 끝난 건가요. 완전히?" 돌아오는 답에 미자의 질문은 없다. '좀 찜찜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이 일이 새어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누군가의 아비가 답한다. 

이러고 말면 끝인가요, 아직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거, 아니 안 보려고 하는 건, 어떡하나요.  

이 놈이 누군가를 죽게 했지만 그래도 내아들인지라, 아이 장래가 달려 있다는 절박함에 은폐하려 달려드는 아비도, 저 때문에 죽게 된 여학생의 영정 사진을 식탁 위에 두어도 불안함 애써 감추며 담담하게 밥을 집어 삼키는 손자도, 딸이 자살했지만 그래도 산 자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합의금을 받고 사건의 진실에 입닫는 어미도, 학교의 명예를 위한다는 교감도 교무주임도,

그래, 그 누군들 이해 못 할까. 하지만 미자는 살겠다고 엉켜 붙은 사람들 틈에서 나와 엉거주춤 멀뚱히, 그들 한 번 바라보고 붉은 꽃 한번 바라보고, 그들 다시 한번 보고 강물 한번 바라본다. 시를 쓰겠다고 뭐하나 허투루 보지 않고 눈 밝히던 그녀에게 모든 것은 혼란이었으리라. 나는 그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이해의 끝까지 가보려 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괴로웠을까. 이불 속에 웅크려 틈 하나 안 주는 손자를 붙잡고 제 힘으로 어쩌지 못 해 마른 목으로 절규하고, 문득 주저앉아 치마에 얼굴을 파묻어 한참 울던 그녀.

'아, 어쩌나, 미자 마음 어쩌나' 싶은 컷이 있었다. 베란다에 서서 미자가 내려다본 곳에 어린 소녀들과 놀고 있는 손자 종욱이의 모습. 누가 되게 밉더라도 멀찍이 떨어져서 뭘 하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냥 되게 가엾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그럼 감정 있잖는가. 나는 이 순간에 할미가 느꼈을 감정의 동요, 고통 같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이해는, 그들과 같은 이해가 아니었으니. 자꾸 외롭고 고독해지는 미자의 마음도 모른채, 누군가의 아비는 이리 묻는다.

"지금 사정을 이해 못 하시겠어요?"

훔쳐서라도 합의금을 마련하는 게 할미가 손자에게 할 수 있는 '인간의 도리'라 믿는 자들은 그리 말했다.
그 누구를 '위한다는 게' 대체 뭔지. 내가 누굴 위해서 해준다는 게 대체 뭘까. 그 사람의 장래를 위하는 거? 그 사람 아프지 않게 하는 거? 그 사람이 나쁘고 끔찍한 걸 보지 않게 하는 거? 



결국 미자가 제 몸과 마음을 투신한 건 죽은 여학생이다. 산 사람들만의 절박함, 혹은 자기 기만. 산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미자는 죽은 자의 곁에 선다. 아무도 말 하지 않는 죽은 여학생. 그 곁에 선다. 너와 나의 목소리. 너와 나의 마음. 너와 나의 고통. 너와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미자의 선택이 단순히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 한 것의 구도 안에 있는 건 아니다. 집단과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변하는 도덕이나 윤리라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에라고 할 수 있는 명확한 단어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나는 그저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누굴 위할 수 있다면 그리 하는 게 모두를 위하는 것이라고. 또 종욱이를 위한 것이라고. 내가 그리 해줄테니 너는 고통스러워해라. 그 위함이 얼마나 더 잘 살게 해줄지는 몰라도, 장미가 아름답고 또 아픈 것이듯이. 그리 단순한 것. 그것과 대면하여라.
그래, 손자는 할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미자의  그 선택에는 '시를 쓰겠다는 마음' 이 같이 갔다.
오늘 우연히 신형철의 어떤 글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에 점점 무감해지는 시대에 시인들의 책무가 하나 더 늘어났다고. 그건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마지막까지 울던 자가 시인이었으리라.

나는, 시인이라 부르기보다 '시를 쓰겠다는 마음' 이라 말하고 싶다. 



이 영화.

그냥 좀, 
미어진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절대 쉽게 쓰는 단어가 아니다. 쉽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미어진다. 






 + 덧붙여, 신형철의 그 글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302.html

정호승에 대한 신형철의 비판 글이다.
시를 쓰겠다는 마음,과 시를 쓰는 순간,과 시,는 믿지만, 시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믿기 어렵다.

"시인은 진실의 수호가이지 가설의 선동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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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다큐의 미덕(알바당 선언(17' 30'')/최신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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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장님은 최저시급제를 지키지 않는 건가”
'우리나라 알바 시급은 또 왜 그리 짠가!' 주변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얻는다는 신춘 감독은 극장 매점에서 알바를 하며 느꼈던 문제의식을 다큐로 제작했다. 그리고 딱 그 정도만 이야기한다.  

이 다큐는 간결하다. 사장에게 말해서 시급을 올리겠다는 미션이 다큐의 주된 이야기다. 하나의 해프닝이다. 마지막 검은 화면엔, 신춘 감독의 미션이 실패로 끝났다는 걸로 끝맺는다. 주된 장소도 극장 안이 전부다. 극장이란 공간을 벗어나는 건 단 한번,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친구에게 일본에서의 알바경험담을 듣기 위해 친구의 집 근처와 카페를 간 몇 컷 뿐이다. 문득 상상해본다. 이걸 마이클 무어가 만들었다면? (뭐 좀 무리 있는 비교이긴 하지만) 아마, 다시 사장님을 찾아가서 될 때까지 따지다가 그래도 안 되면 노동부를 찾아가서 시급 책정의 정당성을 따져 묻고, 확성기 들고 청와대 앞에 가서 대통령 나오라며 좀 만나자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물론 마이클 무어 식의 시나리오는 장편이기에 가능하다. 다큐를 만들려는 대부분은 이런 소재를 장편으로 풀려 할지도 모른다. 최저 시급의 문제, 고용주들의 문제, 나아가 대학생이나 88만 원 세대의 문제로 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재를 말이다. 신춘 감독의 다큐가 이런 문제를 암시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자연스레 배어 나온다. 그렇다고 딱히 심각하지도 않게.  

잘못하다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를 구겨 넣으려 하다가 역효과를 줄 수도 있는 이 소재를, 신춘 감독은 영리하고 소박하게 만들어서 적당한 재미와 강한 임팩트를 준다. 재밌는 상황 하나를 가지고(일단 이 상황으로 다큐를 만들면 재밌겠다는 밝은 눈)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것저것 다양한 이미지를 발견해 재밌는 몽타주들을 만들었다. 또 하나, 다큐 안에 감독이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캐릭터가 드러나기란 쉽지 않은데, <알바당 선언>에서는 감독 캐릭터가 잘 드러나서 재밌다. 안 되면 말고의 용기와 정의감, (정말 안 되니 말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모순적인 제목이 더 재밌다. 알바생들이 단결해서 투쟁할 여유가 있겠는가, 한푼 더 못 받아도 몇푼 나올 구석 있으면 다행 

다큐라고 하면 힘부터 빡 들어가기 쉽다. 꼭 장편다큐를 생각해서, 길고 지난할 시간을 뚝심으로 이겨낼 의지부터 다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엄청난 소재를 찾거나, 아니면 일상적인 소재에서 시작해 점점 정치적인 의미들을 발견하면서 길게 끌어가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든 감독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 쏟아내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면 딱히 구성도 없고 별 내용도 없이 무의미한 이미지들만 나풀거리는 습작이거나, 감독의 욕심이 많아 소화하기 힘든 그저 러닝 타임만 짧은 다큐가 많은 것 같다. <알바당 선언>을 보고나서 느끼는 건, 쫀쫀하게 쫙 짜인 단편, 많은 얘길 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그런 단편 다큐들이 참 귀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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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감독_우니 르콩트)
 


 올챙이알처럼 투명하고 까만 눈을 빤히 뜨고 있는 매혹적인 진희의 얼굴 때문에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다가도, 마르고 야무진 팔뚝으로 인형을 다 분질러 버릴 때, 널어놓은 이불에 방망이로 분풀이질을 할 때, '이제 나는 죽을 거예요' 흙을 파서 그걸 제 몸에 제 얼굴에 덮을 때. 마음이 뻐근해지면서 어린 내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아이가 슬퍼한다. 더 이상, 그저 고아원에 버려진 진희의 상실감이 아니라, 누군가들의 상실감이 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본다. '아이의 슬픔'에 대해. 진짜 슬퍼하는 건 아이가 아닐까 하고. 

여행 가자고 예쁜 옷과 신발을 사준 아빠가 자신을 고아원에 버렸을 때,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라는 이야기가 이미 상투적이 되어버렸지만 잘 생각해보면 결코 이건 흔하다고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삶이다.) 겨우 정을 붙인 친구가 같은 곳에 입양되자고 약속 해놓고 그냥 혼자 떠나버렸을 때. 왜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하며 슬픔을 채워가던 아이. 믿음이 허물어질 때마다 아이는 더욱 표독스러운 얼굴을 가지게 됐고, 그만큼 더 강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아, 없었으면 좋았을 상처, 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이젠 너도 아 잊어버려야 돼' 라는 원장님의 말을 겨우 인정했는지 마지막 장면에서 슬쩍 웃는 진희를, 나는 긍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가 받았을 상실감을 넘어, 이 아이 안에 곪아 있었을 상처가 영화에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새엄마가 데려온 애기를, 그냥 너무 예뻐서 한번 안아본 건데 애기가 울었단다. 갑자기 피를 흘리며 엉엉 울던 애기는 제 옷핀에 찔린던 거였다. 사람들은 자기 때문에 애기가 죽을 뻔했다고 했다. 고개도 못 들고 계속 색연필질을 하면서 제 눈동자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아이. 진희야 울지마 진희야 울지마.
그것 때문에 아빠가 널 버렸다고 생각하니? 진희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린다.
캐릭터를 깊이 있게 만드는 이런 작은 요소 하나 때문에, 오래도록 나는 그 캐릭터에 들러 붙어서 서로 위로하고 치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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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워하지마 부끄러워하면 어두운 게 되는거야",
                                                                                                      <미쓰홍당무> 이경미 감독




  "새로운 감수성-캐릭터로 사유하기" <한국에서 영화감독의 사는 법>강좌의 세 번째 주인공은 바로 이경미 감독님이었습니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을 보며, 누군가는 배아프도록 낄낄대고 누군가는 펑펑 울고 또 누군가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이 없어하기도 했을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웃다가 울었습니다)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이렇게 나한테 안했을 거면서! 내가 나니까 다들 일부러 나만 무시하고!"

 결국 미숙이가 터지듯 내뱉는 이 말. 크랭크인 들어가기 직전까지 쓰지 못 했던 대사였다고 합니다. 대체 미숙이가 왜 저럴까 하는 단 한 마디가 필요했던 이경미 감독은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다 버스를 타고 가던 어느 날, 문득 저 대사가 그녀의 머릿속에 떨어집니다. 저 기막히게 웃기고 눈물나는 대사가 쓰인 거죠. 보이지도 않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을 낚아서 그게 구체적인 형상을 띨 때까지 생각하고 또 기다리고 또 생각했을 감독의 집념이 보였습니다.  

'아, 이건 내 살 깎아먹는 얘긴데' 하면서도 소탈하게 웃으며 솔직한 얘기를 전해주신 감독님. 꼭 남기고 싶어, 주고 받은 대화 몇 부분을 옮깁니다





  영화의 캐릭터들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캐릭터를 어떻게 만드는지.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이런 '호기심'이 시작이다. 뭔가 알 것 같은데 알 것 같은데 하는 감정. 뭐 전두환 같은 인물은 이해하고 싶지 않고(웃음)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게 나와 링크되는 때가 있다. 꽂히는 게 있으면 계속 살을 덧붙여 나간다.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전해 들은 사람이 내 타겟이 되는 것 같다.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단편보다 장편<미쓰 홍당무>에서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재치 있는 상황 설정이 참 많았다. 특히 어학실에 다 모여서 벌어지는 상황은 이상하고 독특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좋았다. 그런 아이디어는 평소에 어떻게 얻는지.

인물들이 한번 다 모였으면 좋겠는데 어디가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걔들이 모였을 때 재밌는 공간이 어딜까 하고 고민하다가 어학실이 나온 거다. 미리부터 어학실이 갖는 메타포가 이럴 것이고 저럴 것이고, 하는 생각은 안 했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이야기가 잘 안 풀리면 지금까지 내가 쓴 걸 다시 본다. 정답은 그 안에 다 있다. 내가 뿌려놓은 씨앗에 다 있는 거다. 나는 창작이란 작업이 굉장히 놀라운 무의식의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미숙이의 삽질만 해도 그렇다. 뭘 하는 척하면서 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래서 고른 게 삽질이었고. 근데, 그래놓고보니 이 캐릭터랑 삽질이 정말 잘 맞아 떨어진 거다. 그런데 그게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나를 컨트롤 하는 게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르면 그에 대한 상상이 저어 앞까지 나가게 된다. 그러다보면 야망이 커지고 벌써 수상소감까지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릴렉스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힘이 많이 들어가면 더 괴롭다. 힘 빼야 한다. 심플해야 한다. 





  감독님 단편<잘 돼가 무엇이든>을 보고 좋아서 시나리오를 베낀 적이 있다. 반복해서 쓰다보니까 구조가 참 탄탄하다고 생각했다. 캐릭터가 뛰어난 것도 있지만 구조도 잘 짜였다. 구조를 짜는 개인만의 팁이 있나.

아까 말했듯이 뿌린 씨앗을 잘 거두는 게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높인다. 다시 무의식을 얘기하게 되는데, 처음 그 단편을 만들 때 생각한 건 "서로 되게 싫어하는 애들이 매일밤 같은 책상에서 일해야 한다" 는 거였다. 그런데 지나고보니까 지영이의 어두운 내면이 밤에 일한다는 상황설정과 맞닿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 


  <잘 돼가, 무엇이든> 에서 -왜 칼을 몸에 품고 다녀? 대사가 나오는 꿈 장면이 있다. 직접적이고 튀는 장면인데?

스텝들은 다 빼자고 했다. 근데 난 오히려 강하고 직접적이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톤으로 가면 지루하다. 한번 탁 튕겨서 변주하면 환기가 된다. 여담인데, 그게 직접 꿈 꾼 장면이다. 시나리오가 하도 안 풀려서 낮잠을 잤다. 근데 그게 나왔다 꿈에. 그걸 쓴 거다. 심사위원들도 그 장면을 엄청 좋아하더라. 그 이후부터 나는 뭔가 막히면 잔다. (웃음)





  <미쓰 홍당무>의 미숙이 캐릭터로 상업영화를 찍은 게 신기했다. 감독이 정말 매력을 느끼지 않으면 갖고 갈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에게 미숙이 같은 면이 있는지? 또 같이 작업한 사람에게 캐리터에 대한 설명을 계속 해야 했을 것 같은데.

내 안에 없으면 미숙이란 캐릭터도 나오지 않았겠지. <미쓰 홍당무>의 미숙이나 <잘 돼가, 무엇이든>의 지영이나, 내 안에서 남에게 보이기 싫은 것, 느끼곤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그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게서 재밌어 하는 점은 영주나 유리에게 넣고 있더라.

내가 미숙이를 끝까지 놓지 못 한 건 연민이다. 한없는 연민. 그건 내가 나에 대해 갖는 연민이기도 하다. 내안에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불쌍한 나. 그걸 굳이 꺼내고 싶었던 건 그게 나한테만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마 부끄러워하면 어두운 게 되는거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 하는 미숙이, 왕따당할 인물, 그래서 더 상업영화에 끌어와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꼭 지키고 싶었던 건 '비호감'을 유지하는 거였다. 애초목표였다. 비호감을 호감으로 전복시키는 건 내 애초의 의도와는 달랐다.

스탭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프리 때부터 다들 미숙일 너무 좋아했다. 10억으로 찍었다. 심각한 저예산이었다. 근데 나는 천 만원으로라도 찍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에 꽂힌 사람들만 스탭으로 온다. 그래서 저절로 미숙일 다 알았다. 모두다 미숙이 흉내를 냈고, 우리 미숙이 우리 미숙이, 했다.
우리 영화를 끌고 간 건 '미숙'이었다. 공효진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랬다. '미숙이 쟤는 살아있는 것 같다'고. '감독님, 쟤는요... 하면서, 자기가 연기해놓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하더라. 


  미숙이를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이 있었다. 얘가 계속 비호감을 유지했으면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바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 병원 씬에서 하나도 안 변한 모습에 어이없으면서도 그래서 또 좋았다. 

그 씬이, 영화에 사용된 장면의 전 테이크가 오케이였다. 근데 공효진이 한번 더 하겠다고 했다. 그리곤 지금의 그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어학실에서 미숙이가 불쌍한 얼굴로, '포기하겠습니다' 하는 장면이다. 그것도 공효진이 한번 더 가겠다고 해서 나온 장면이다. 배운게, 내가 쓴 캐릭터를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란 거다. 어느 순간 배우 것이 되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더라. 





직장 생활을 하다 뒤늦게 영화를 시작했다. 힘든 점은 없었는지

영화학교 갔을 때 내가 여자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았고 남녀 통틀어서도 두번 째로 많았다. 일단 조작업을 해야 하는데 남자들이 어리고 예쁜 여자들만 찾더라. 어떻게든 껴서 같이 작업을 해야 하니까 나도 쓸모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무거운 장비를 번쩍번쩍 들었다. 
배수진을 쳤다. 내가 여기서 중간에 포기하면 정말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콘티도 모르는데, 타르코프스키 얘기를 하니까 죽겠더라. 미디엄샷이 뭔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다. 너무너무 급했다.

그땐 죽을 것 처럼 찍었다. 일주일에 한편씩 찍어야 했는데, "언니 이거 찍고 죽을거야?" 란 얘기도 들었다. 코앞이 너무 급해서 일단은 말을 알아듣고 실습하는데 급급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영상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중요했다. 매주 살풀이를 했다. 목에 잔뜩 든 머릿카락 뭉치를 쭉쭉 뽑아내는 것 같았다. 

  내가 표현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것 같다. 어릴 땐 연극배우 하고 싶었는데 못 했다. 싸울줄을 몰라 시키는대로 다 따르기만 했다. '순응의 28년 역사 후' 영화 만들면서 매주 살풀이를 한 거지. 나는 연극하고 싶은데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했다. 한 때는 끓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못 봤다. 그러다가 종교에도 빠졌다. 수녀가 되겠다며 매일 성당을 갔으니 오죽했겠나. 표출을 못 하니까 오히려 숨기는 쪽으로 간 것 같다. 영화 일 하기전엔 몸도 많이 아팠는데, 영화 하고 부터 싹 다 나았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이리도 중요하구나 싶었지. 그래서 따라오는 고난은 다 내 팔자다. 회사 다니면 돈 걱정을 했겠나. 이런 걱정은 세트인 거지. 양미숙과 이유리의 관계처럼. 


  감독님 다음 영화 계획은?

 요즘 너무 괴롭다. 근데....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여러분 <미쓰 홍당무> 손익분기점 넘겼어요!" (감독님 강조) 다들 못 넘긴 줄 알더라. (웃음)
두번 째 작품은 상업적인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이건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접점"을 찾고 싶다. 내가 상업적 성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접점을 찾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관객이 돈 주고 봤을 때 아깝지 않으면 좋겠다.
2년 전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서 투자자 파워는 더 강해졌다. 그 안에서 접점을 찾는 게 피흘리는 일일 것 같다. 마음을 다잡고 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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