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曰
당신이 정말 내 짝이었으면 좋겠어

女曰
그 짝이란 게 뭐예요?

-평생 이 기집 저 기집 신경 쓰느라 피곤해하지 않고
 한 사람이랑 결정하고 조금씩 조금씩 사랑의 금자탑을 쌓아가는 거
 자기 경멸하는 걸 포기하고 사람이었다가 동물이었다가 왔다갔다 하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 쭉 살아가는 길이 짝이랑 사는 길이에요

-근데, 그냥 오늘만 할래요. 난 꼭 오늘 하루만 사랑할거야. 뭐 어때요, 내 인생인데.
 그리고 난 결혼했잖아 그냥 오늘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에 감사해요 우리.

-전 정말 당신이 제 유일한 짝인 것 같아요. 사람의 대부분의 불행은 제 짝을 찾지 못 해서 오는 거거든요.
 돈도 아니고 열등감도 아니고 성공을 못 해서도 아니에요.

-고마워요 무지 고마워요

-아, 이렇게 만나면 알게 될 걸 왜 당신을 안 찾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미룰수 있는 건 끝까지 미루고 살잖아요, 죽을 때까지.

-정말 살아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만나야 그 사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건데,
 저한텐 당신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무지 고마워요.

-거짓말이라도 말해줘요, 지금이라도. 당신 내 짝이죠? 이렇게 말해줘요.

-안 돼요. 거짓말하긴 싫어요.
 지금에 감사해요. 너무 좋잖아요. 이렇게 보고 같이 안을 수 있는.

-욕심이 난다니까요.

-욕심내지 마요.




재밌어라.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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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 영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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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까물 잠들 때가 있다. 수업 시간에 안 졸려고 안 졸려고 용을 쓰다가 깜빡 졸 때면 눈앞에 어떤 이미지들이 불쑥 들어온다. 눈을 뜨면 선생님이 앞에 있고 다시 눈을 떠보면 나는 이상한 길목 위에 서 있다가 다시 눈 뜨면 나를 흔드는 친구가, 또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면 나는 누군가의 등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아주 잠시 정신을 놓았을 때나 너무 졸려 고개가 휘떡휘떡 넘어질 때는 눈꺼풀 밖의 세계와 눈꺼풀 안의 세계가 뒤죽박죽되면서 교차편집된다. 아주 긴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눈을 뜨면 시간은 겨우 삼 분이 지났다. 시간이 뒤틀리고 공간의 경계가 지워지는 이상한 경험. 

  그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추억이 되지 못 한 기억일까? 주파수로 만들어지는 이미지일까, 누군가가 수신하는? 졸음에서 깨고 나면 이미 달아나버린 이미지들을 기억해내려 애쓰는 것. 딱히 목적도 없이 난 늘 그런 것들을 좇아다닌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퀀스는 병원에서의 사건이다.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간 이즈키가 대기실에 앉아 깜빡 존다. 조는 사이에 복도 끝에서 병상 하나가 들어온다. 복도를 달리는 병상을 붙잡고 달리는 간호사들이 보이고, 병상이 가까이 다가오자 보이는 건 이즈키의 죽은 아빠다. 놀란 이즈키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그때 이즈키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에 엄마와 할아버지가 보인다. 이즈키에게 어서 오라고 부른다. 이즈키는 아빠가 실려 가는 병상을 향해 달린다. 달린 끝에 문이 있다. 다다른 이즈키가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또 다른 풍경이다. 어린 이즈키, 그리고 또 다른 이즈키, 히로코의 연인이었던 그 어린 이즈키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다. 다시 후지이 이즈키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즈키는 놀라 잠에서 깬다. 



  이 시퀀스에서 이야기는 여기서 저기로 훌쩍 이동한다. 아니 이건 이야기로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미지? 이미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호흡이 긴, 아니면, 연출자는 리듬을 잘 타는 걸까.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는 리듬, 거친 이 반죽과 저 반죽을 잘 주물거리는 영상음악가 같은? 감정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니 자연스레 새로운 이미지가 튀어나오는 건가? 하여튼. 

  이와이 슌지가 이것과 저것을 주무르는 걸 좋아한다고 느낀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이건 좀 소소한 장면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기가 막히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즈키가 히로코가 보낸 약봉지를 펼치자 가루가 포록 올라오면서 기침을 하는데, 이게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있다가 막 기침을 하려하는 이즈키의 모습과 교차 편집되면서 기침으로 장면을 끝맺는다.

하나 더, 긴 눈길을 타고 내려온 이즈키는 눈 위에 아주 곱게 누워있는 잠자리를 보고 “아빠가 죽었구나” 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그 넘어가는 과정을 굳이 이해하라고 하면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 이입되는 감정이란! 그리고 그 이미지가 하나의 ‘기억’이 되어 잠자리를 볼 때마다 나는 영화 러브레터를 생각할 것이다.    





  조각난 이미지들을 내가 좇는 것은 퍼즐 같은 그것들을 끼워 맞춰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것인지도, 같은 판 안에 있던 이미지 조각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와이 슈운지는 그걸 조화롭게 만드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그는 자유 연상을 관객들이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전개한다. 가끔 이 장면과 이 장면이 왜 붙는지 감이 안 오는 쌩뚱 맞은 영화들도 있잖은가. 그러면 이해불가능하고 어려운 영화로 분류된다. 이와이 슈운지는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도, 달리 말하면 상업성 있게! 잘 만드는 것 같다.

러브레터를 다 보고 난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잠시 졸면서 보는 잠깐 잠깐의 이미지들이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삶일지도 모른다고. 혹시 나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은 아닐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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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을 말하겠어요, <황혼의 빛> 2006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얀 히티 아이넨, 마리아 헤이스카넨, 마리아 예르벤헬미 출연





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사회 돌아가는 일이 이상한 것 같다고,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 이후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겠지. 그러면서 화 나고 눈물 나는 일을 많이 봤고 그건 내 삶, 내 가족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문제의식은 국가가 나쁘니, 자본가가 나쁘니 같은 게 아니다. 바로 약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일들이다.

왜  철거촌 사람들을 쫓아내는 용역들은 하루 일거리 찾는 가난한 사람들일까, 집회 나가서 싸우면 왜 맨날 경찰들이랑 부딪쳐야 할까. 쌍용차 사태에서 보여지듯이 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해고당한 자들에게 그리 매정하게 구는가. 진짜 적들은 언제나 뒤로 물러서서 또 다른 약자들을 방패막이 삼는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어쩔 수 없다 할 것이다. 알지만서도 늘 내 가슴을 치는 것, 바로 약자가 또 다른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영화를 봤다. 나는 감독이 맑스주의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세계 안에서 인물관계를 단순하게 그리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번 그의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영화세계는 꽤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것이다. 

처음 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에서 단순히 착취, 피착취의 관계를 그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착취자로 보이는 매니저가 또 한편으로 가엾게 보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와보니 그 매니저는 결코 착취하는 자본가가 아니었다. 매니저든 밴드 멤버든 모두 사회의 약자로 그려진 인물이었다. 그저 미국을 동경하고 돈 벌고 뜨고 싶어하는 소시민들. 아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시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착하지 않고 부유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이 세계에서 시민으로 호명되지 못 한 사람들은 더한 약자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에서 경찰이 꼭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어리석고 서민들에게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건.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도 경찰은 '남자'를 괴롭히는 악당이었고 <황혼의 빛>에서도 죄없는 코이스티엔을 감옥에 집어넣는 어리석은 인물로 나온다.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영화 세계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고자 하는 현실의 어떤 단면을 선명하게 그린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예컨대 자본가가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상에서 그 사람은 얼마든지 좋은 인간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노동자를 비인간적으로 부리는 자본가는 나쁜 사람이다. 카우리스마키는 그런 부분을 보고자하고 그걸 포착해서 인물 관계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짠다.  




늦었지만 잠시 <황혼의 빛>을 소개해야겠다. 이 영화는 코이스티엔이라는 인물을 절망의 끝간까지 몰아간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보안요원을 하는 코이스티엔은 돈 없고 별 볼일 없는 인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루저'다. 그는 불만 많고 무뚝뚝하지만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싫어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코이스티엔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조롱하는 표정은 하나의 유머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다 그의 앞에 그를 유혹하는 여인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사업가가 사주해서 보낸 사람이다. 코이스티엔을 이용해 보석파는 건물의 보안을 뚫고 도둑질을 하려던 심산이었다. 코이스티엔은 경찰에 붙잡히지만, 그러나 코이스티엔, 그는 그 여자에 대해 단 한 마디 진술하지 않는다. 아, 바보 같은 코이스티엔. 그러니까 그는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싶었던 거다. 결국 그는 징역을 살고 그는 출감한다. 소개받아 접시닦는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그 식당에서 여자와 사업가를 만난다. 사업가는 매니저에게 코이스티엔이 절도범으로 수감했다는 사실을 꼬지른다. 결국 직장에서 잘린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분노한 그는 컵으로 칼을 갈아 사업에게 달려들지만, 너무 어설프게도 실패하고 죽도록 맞고는 공사장에 버려진다.



주목할 만한 관계는 코이스티엔과 그에게 접근해서 절망에 빠뜨리는 여자 '미리야'다. 미리야는 사업가와 연인관계다. 미리야는 코이스티엔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하면서도 계속 주저한다. 하지만 사업가는 그녀에게 계속 지시를 내린다. 일이 끝나면 행복하게 해줄 거라느니 돈을 주겠다느니 하며.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코이스티엔과 미리야가 단순히 적의 관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다. 코이스티엔이 감옥에 갇히고 난 다음 장면. 사업가가 동료들과 카드게임을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미리야가 주위를 청소하고 있다. 이 장면은 꽤 롱테이크다. 코이스티엔을 절망에 빠뜨린 그녀? 결국 또 다른 희생자였다.



카메라가 미리야의 무표정한 얼굴에 오래 멈추어 있고, 또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뭔가 망설이고 고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가 더 길었다면 그녀의 사연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미리야와 코이스티엔은 끝내 화해하지 못 한다. 하지만 또 다른 관계. 소세지를 파는 '아이라'. 그녀는 코이스티엔의 얘기도 잘 들어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편지도 자주 보낸다. 하지만 코이스티엔? 묵묵부답. 하지만 코이스티엔이 사업가의 조폭들에게 죽도록 맞고 포크레인 옆에 쓰러져 있을 때 그를 구해주는 건, 평소 술집앞에 앉아 있던 흑인 꼬마와 버려진 개, 그리고 소세지 팔던 '아이라'다. "여기서 죽지는 않겠다"는, 코이스티엔에게 그녀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 준다. 


 

<황혼의 빛> 을 보고 나서 난 선명하게 구호 하나가 떠올랐다.
"약자여 연대하라" 
그리고. 손을 잡아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문득, 며칠 전 안녕하며 인사하고 돌아서던 친구가 되돌아 뛰어와선 그 야무진 손매무새로 내 손 꼭 쥐어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야무진 손의 느낌.
험난하고 더러운 사회라는 게 당연시된 이 세상에서, 눈을 마주하고 귀를 마주해야 할 사람들이 함께 하기, 그래서 진짜 못된 강자들과 싸우기. 그게 감독이 보는 황혼의 <빛>이 아닐까.

영화로 이 모든 사건을 지켜본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할까. 하지만 이 영화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절제된 감정과 건조하게 이어붙인 숏들은 그저 담담하게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그게 다른 계몽영화와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다른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선동이나 계몽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상황과 인물에 젖어들도록 한다. 그 지점을 느꼈을 때 카우리스마키에게 열광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번 <황혼의 빛>을 두세번 돌려 보면서 아, 이 감독 이런 감정을 주고 싶었던 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선동영화가 되지 않고, 결국 희망을 말하지만 그게 희망 고문이 되지 않고, 고난-희망으로 이어지는 뻔히 짜인 시나리오 안에서 인물이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관객에게 생동감있는 캐릭터로 다가가는 게, 그의 영화다.  카우리스마키 영화를 지루해하는 사람들은 전자의 혹평을 하겠지만 나는 그게 너무 섣부른 판단이라는 생각을 한다. 영화 흥행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무엇보다 난, 그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어하는 말이 좋다.
 


이 영화를 보다 내가 으아아, 했던 부분이 있다. 바로 코이스티넨이 슬쩍 미소짓는 장면.
시종일관 무표정의 코이스티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코이스티엔.
억울하게 감옥까지 간 그가, 그것도 감옥에서 아주 슬쩍 웃는다.

아, 감독은 어찌 이런 장면을 삽입한 걸까.
죽어도 감동따윈 없을 것 같은, 아예 주고자 의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영화였는데, 이 장면에서 으아아. 하고 만다.  

 
노골적이지 않게 이런 식으로 코이스티엔의 심적 변화를 드러낸다. 감옥에 누워서 주구장창 줄담배를 피는 코이스티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분명 많이 힘들 것이다.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교도소 담벼락 장면. 줄줄이 죄수들이 벽에 붙어 서 있다. 코이스티엔이 딱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장면에선 늘 외톨이처럼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서 있는지라 딱 눈에 띄었는데 이 장면에선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코이스티엔 클로즈업.

그가 웃고 있다. 아주 엷게. 혼자 세상의 짐을 다 진 듯 어두운 무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보인 미소. 이거 너무 뻔한 장치인데 말이다. 아 이거 별 거 아닌데 진짜 울린다. 건조하고 절제하는 카우리스마키의 스타일은 이런 하나의 장면으로 "아, 이 감정 뭐지?" 하게 만든다.



또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명장면은,


바로 이런 거!

정체 불명의 흑인 아이와 주인이 밥도 안 주고 며칠 째 술집 앞에 묶여 있는 개. 둘이 동시에 코이스티엔을 바라보는 장면.



 

 



 내 집은 천지사방 영원한 곳
 posted by 눙미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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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난 후 열두 가지 이야기 <유다, 1/12>, 양손극장

 

1.
극장 앞에 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다. 소극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광경은 처음 본다. 입장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지하로 빨려들 듯 내려간다. 입장하고서도 한참이나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고 객석이 모자라 무대 앞까지 관객들이 점령했다. 밤 8시를 넘긴 시각. 두근두근. 어떤 연극일까.


2.
관객들이 자리는 잡는 사이, 무대 한켠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린다. 절규하는 여자의 비명에 사람들 시선은 그쪽을 향한다. 심하게 놀란 듯 멍하게 서 있는 여자가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한다. 그 옆엔 미안하다며 계속 사과를 하는 남자가 보인다.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여자를 놀래켰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여자는 이제 엉엉 울기 시작한다. 친구가 급히 달려가 감싸안곤 밖으로 데려 나간다. 여자의 비명과 울음에 잠시 동안의 침묵, 여자가 나가자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극장 안. 마치 연극의 한 장면과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3.
서서히 조명이 켜지고 다시 조명이 꺼지는 사이. 무대 한 가운데로 들어온 유다, 종이 한 장을 꺼내 가위질을 한다. 가위질이 끝난 종이에는 예수가 그려져 있다. 그 예수 사진을 가슴팍에 붙인다.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긴 배신자로 알고 있던 유다, 그를 무대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
무대를 감싸안듯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는 조명. 그 사이 12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무엇보다 조명에 매료됐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한 순간 한 순간 완성된 조명을 보여주겠다는 듯, 마치 하루에 피고 지는 꽃 같다.


5.
열두 개의 에피소드, 열두 개의 다양한 표현방식. 장르를 넘나드는 표현으로 유다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는 더욱 풍성해진다.


6.
최후의 만찬 : 예수가 제자 한 명 한 명의 발을 닦아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다는 생각한다. “저 분은 쓸쓸하신 거다. 저 분은 외로우신 거다.” 아아.


7. 유다의 이야기 : 사랑과 증오, 지독한 뫼비우스의 띠

사랑에서 증오로, 한 줄 사이 바뀌는 그의 마음.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죽여주세요. 그 사람은 제 스승입니다. 주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저랑 동갑입니다. 서른셋입니다. 저는 그 사람보다 겨우 두 달 늦게 태어났을 뿐입니다. 대단한 차이가 있을 턱이 없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 리 없지. 그런데도 나는 여태껏 그 사람에게 얼마나 혹사당해 왔는지. 얼마나 조롱당해 왔는지...그는 뭐든지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처럼 남한테 보이고 싶은 거야. 웃기는 얘기지.

....

저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알아주시지 않아도. 또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당신만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런 것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8.
예수를 사랑하고 증오했던 유다. 예수에 대한 존경 그리고 예수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 사랑했기에 예수의 행동이 유다에게 쉽게 상처를 주었고 미운데도 사랑하니까 죄책감이 들고 결국 그를 죽게 만들고 자신도 죽어 버리고. 사랑이 먼저였는지 미움이 먼저였는지도 알 수 없는 마음. 자칫하면 미움으로 가라앉고 다시 사랑으로 떠올랐다가도 자칫하면 다시 미움으로 가라앉는. 인간의 감정이란.


9.
연극 내내 들리던 음악 류이치 사카모토의 <Bibo No Aozora> 글을 쓰는 내내 나는 이 음악을 듣고 있다. 음악은 제 멋대로 내 몸을 흐르고 여기저기 박혀 어떤 모양을 만들어내며 춤을 춘다. 아주 슬픈 춤. 무대 위 두 명의 유다가 사랑하고 증오하듯 감싸 안고 싸우던 그 몸짓처럼.

10.

“죄악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죄의식과 행위,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연극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관객과 배우, 공간이 있을 뿐입니다.”

읽고 또 읽게 만드는 팜플렛의 문구.

‘죄인’ 유다가 아니라 ‘사람’ 유다.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날 팔리라.” 예수는 자신을 팔 그 제자의 입에 빵을 물려주겠노라며 서서히 유다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유다의 입에 빵을 물리는 예수.

유다는 회상한다. ‘창피하다기보다 미웠습니다.’ ‘왜 예수는 나만 미워하는 것인가.’ 독백이 끝난 후 그는 관객석을 향해 말한다.

“아,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제 이름을 말씀 안 드렸죠. 제이름은 유다입니다.”

침묵을 강요당한 자에게 목소리를 주었을 때, 봇물처럼 터지는 그의 말들. 그게 변명이든 자기 정당화든. 심판이라는 말로 누군가를 쉽게 죄인이란 딱지를 붙이지 마라. 잘 알지도 못 하면서. 물론 예수의 마음 역시 우린 잘 모른다. 


11.

“연극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관객과 배우, 공간이 있을 뿐입니다.”

폐쇄된 한 공간은 기원전을 거스르기도 하고 또 현재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또 지상계가 되기도 천상계가 되기도 한다. 단순한 하나의 소품은 책상도 되고 의자도 되고 벽도 되었다가 나무도 되었다가 자유자재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배우는 눈짓, 손짓, 몸짓 다해, 온 마음 다해 공연한다. 관객을 위해.

연극이 막 끝나고, 소극장에 모인 몇백 명이 짝짝짝 박수칠 때 백팔십도가 되도록 허리 숙여 인사하는 두 배우, 깊게 몸을 숙여 인사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배우, 곧 울음이 터질 듯 반짝이는 눈으로 관객을 바라보던 그 얼굴.


12.

영화와 연극은 달라서 감정이 쉽게 과잉되는 영화와 다르게 연극은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그랬다. 눈앞의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환기하고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감정이 생겼다. 이건 글을 쓰기 위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찝찝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연극,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함께 나 역시 동요한다. 무대와 관객석이 현장에서 울림을 만들어낸다. “배우의 표현이 드라마로써 관객과 만나는 접점을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양손프로젝트의 말처럼 나, “연극의 맛”을 알게 되다. 연극을, 그 실체 없는 연극의 기운을 참 좋아하게 되다.






열두 명 중의 한명이었던,
열두 명 중의 한명이 될 수 없었던
한 사람


원작_ 다자이 오사무 '직소'
연출_ 박해성
출연_손상규, 양종욱
제작_양손극장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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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의 '남자'는 담배를 말고 있다. 헬싱키에 도착한 남자는 벤치에 앉아 잠시 쉰다. 그러다 느닷없이 깡패들에게 사정없이 맞는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사망 선고를 받는다. 사망 시각을 확인한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자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 어느 마을 강가에 쓰러져 있는 '남자'. 그를 본 한 노인은 자신의 신발과 남자의 신발을 바꿔치기 한다. 지독히 가난한 어느 마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남자, 연유도 없이 어느 마을에 가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다시 시작된다.


카우리스마키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


지난 시간에 살펴본 영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장면마다 인과관계가 느슨하다. 특히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서 그렇다. 아니, 죽었다고 판명받은 남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더구나 그 다음 장면에서 이 남자는 왜 어떤 마을에 바로 쓰러져 있는가. 어찌보면 억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를 '다시 살게 하기 위해서' 죽이고 '그를 가난한 마을에 보내기 위해서' 죽인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의 행로를 어떤 목적에 맞추어 버리는 방식. 그는 죽어야만 했고 영화 속 그 마을에 떨어져야만 했다. 

나의 경우 주인공이 빈민가에 떨어지는 상황을 그리고 싶었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 그가 빈민가에 떨어지게 되는 지 그 과정을 개연성있게 그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냥 떨어뜨려 놓는다. 카우리스마키는 아주 효율적으로 또 절제하며 쓰고자 하는 장면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죽었다 살아난 그는 왜 가난한 마을에서 다시 깨어나게 됐을까.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영화를 빌어, 인물이 반드시 어떤 상황을 겪도록 하는데 치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캐릭터가 있으면 그가 어떤 상황에 떨어지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한 인물에 대한 구구절절함은 없고 주인공이 겪어야만 하는 상황만 있다. 이 사람이 어떤 캐릭터인가보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

효율적으로 장면을 갖다 쓰는 그의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선명하다. 행복하지 않은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찾는 것. 그리고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이 빈 손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 '남자'가 불평없이 자연스레 행복해진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선명하면 선동적이거나 노골적으로 계몽적일 수 있다. 그런데 선동이나 계몽은 감동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카우리스마키는 감동을 주진 않는다.  그래서 불편하지 않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영화는 아주 건조하게 지켜본다. 






세계의 어떤 단면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되는 인물들

이 영화엔 조연들이 많다. 하지만 이 조연들의 캐릭터 하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살아 있다기보다는 영화 전체적으로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는 동원되는 '일반'으로 보인다.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삶이 무의미한듯 말투가 아주 건조하고 어떤 위급한 상황이 벌어져도 무력하게 대처한다. 말투가 하나같이 어찌 다 똑같은지. 그렇다고 일반일 뿐,은 아니다. 극중 인물들이 단순히 자동인형처럼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감독이 바라보는 세계의 단면을 잘라 보여주기 위해 인물들은 동원된다. 그렇다고 동원될 뿐,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모여서 영화 전체의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잘 연출해낸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남자'는 가는 곳마다 황당한 일을 당한다. 월급을 받고 싶으면 통장을 하나 만들라는 말에 남자는 은행으로 간다. 그런데 그 장소에 하필 은행강도가 침입니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긴박하고 사람들은 두려워할텐데. 은행원은 초연하게 돈을 꺼내주고 남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처한다.



강도 왈 : 미안하지만 문을 잠그고 가야 겠어.
남자 왈 : 강도니까 그럴만도 하죠.
강도 왈 : 이해해주니까 고맙군


강도 : 요구한 액수만 주면 돼
여자 :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더 줘봤자 나만 손해죠.




과거가 없는 남자의 과거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남는 의문이 있었다. 왜 영화 말미에 남자의 과거를 넣었을까. 그때 우리는 남자가 과거엔 도박에 빠지고 부인과 이혼을 한 상태였다는 정보를 알 수 있다. 그 시절을 왜 굳이 '남자'에게 환기시켜주었을까. 그의 전 부인이 왜 꼭 등장해야 했을까. 

남자는 전 부인을 찾아가지만 그녀와 다시 살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남자가 과거에 전혀 미련이 없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과거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효과는, 그의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그가 다시 시작된 그의 삶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남자'가 진짜 겪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의 과거를 알 수 있는 장면이 없이 남자가 새 삶을 꾸려서 잘 사는 것으로만 끝났다면, 마치 하나의 '꿈' 어쩌면 남자가 상상했을지도 모르는 환상같은 일로, 하나의 일장춘몽같은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의 과거가 소환되는 순간 그의 새 삶도 현실의 일상과 같은 위치가 된다.

내가 가장 좋았던 장면은 '남자'가 감자를 심는 장면이었다. 그는 빈 손으로 그것도 아주 가난한 마을에 떨어졌다. 콘테이너 박스를 깨끗이 청소한 그는 집 앞에 감자를 심는다. 
계속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감자심는 것으로 표현한 이 소박함.



 



나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평소 나와 아빠는 서로 대화를 거의 하지 않지만, 한번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솔직해진다. 지난 번 일 하시는 중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일이 끝나면 다시 연락하겠다 하셨다. 며칠이 지난 후 일이 끝나시고 내가 생각나셨는지 전화가 왔다.

사는 게 너무 재미 없다던 아빠. 삶에 낙이 없다던 당신. 나는 나름대로 진심을 다해 말했지만 교과서적이기만 했던 내 말들, 뭐 따로 하고 싶은 건 없으세요, 다른 재밌는 걸 찾아보세요.

"딸램아. 여유나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시간에 할 만한 것들 찾아보기야 하겠지만 니가 지금 하는 말은 나한테 해당이 안되는 말 같다. 사실 그런 말은 아무런 위로가 안 된다" 고 말이다.

허둥지둥. 난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 했고 목이 콱 메였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것이라고 쓸쓸히 말하시던 아빠.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가 중년의 나이인 걸 생각하면 나는 내 아빠가 슬프고 또 슬프다.  

새로운 삶을 찾은 남자가 사랑에 빠진 여자와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의 이 영화가 그저 담담하기만 한 것은 한편 또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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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행복을 찾아." 카우리스마키의 <레닌 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인간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황혼의 빛>의 마지막 장면처럼 사람들은 그저 누군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포개는 정도의 위로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죠.”

한 영화 이론 수업에서였다. 선생님은 카우리스마키를 소개하며 그리 말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그의 영화들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건 모두가 소통을 당위처럼 말하는데 왠지 그의 영화는 또 다른 삶의 진실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영화감독 각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공부를 카우리스마키로 시작하고자 한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을 때 난 늘 그 사람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곱씹는다. 익숙해 질 때까지 말이다. 처음에 카리우스마키인지 카우리스마키인지 아주 헷갈렸는데, 이젠 아주 익숙해진 이름 ‘아키 카우리스마키’ 이 글을 쓰며 나는 앞으로 한 편 한 편씩 그의 영화를 볼 것이고 글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카우리스마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영화일생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뭔지 파악해보고 또 수정하며 차근차근 공부하고 싶다. 


한국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카우리스마키는 핀란드의 대표 영화감독이다. 2002년도에 만든 <과거가 없는 남자>는 깐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고 세계 유명 감독들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도 참여했다. 우리에겐 너무 낯선 핀란드 영화. 영화로 핀란드와 만난다고 하면,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의 배경이 핀란드였다는 게 먼저 떠오른다. 그 영화를 보며 ‘그 살기 좋다는 사회복지국가 핀란드에서도 사람 사는 풍경은 다 똑같구나’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린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여인이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러한 나의 생각은 핀란드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그저 사람들 살기에 좋고 평화로운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되는) 핀란드.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뒤틀리고 이상한 풍경을 잡아내려고 하는 감독이다. 그의 시선이 내부인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할지라도 외부인이 보기엔 주는 의미가 깊을 것 같다. 현실 가능한 이상향처럼 보이는 핀란드에 사는 영화감독이 그리는 세상의 어두운 풍경은 어떠할까? 그의 영화 주인공은 늘 소외된 주변인들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시선을 표현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인과관계가 분명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물의 심리를 파악할 만한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인물들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이고 그렇다고 장면 마다 인물들의 동선이 화려하지도 않다.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아주 좋아해서 매니아가 되거나 아니면 재미없어, 이게 뭐야. 딱히 이야기에 집중도를, 그렇다고 캐릭터에 집중도를 부여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나는 어떠했냐고? 작위적인 캐릭터와 탄탄한 구성도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영화적이라 느꼈으니. 왜 일까, 왜 좋았을까? 아마 나의 공부는 그의 작품이 왜 영화적이라 느꼈는지 자꾸 찾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될 것 같다.


두 개의 이야기 세계 충돌

처음 고른 그의 영화는 바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카우리스마키 영화 중 대중적으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영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툰드라의 어느 곳,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라는 밴드의 연습실이 있다. 첫 장면은 밖에서 연습을 하다 얼어 죽은 베이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가 죽은 것이 큰 의미가 있진 않다. 심지어 나중에 이 시체가 다시 부활한다. 드라이로 녹여서 말이다. 밴드는 여기서는 인기 끌기가 어렵다는 말과 함께 온갖 쓰레기들이 다 모여든다는 미국에나 가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매니저는 우리 모두 미국인이라는 거짓말을 하고는 밴드에게 영어를 시켜가며 미국행을 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형편없다는 평가와 함께 멕시코에 사는 사촌의 결혼식에나 가보라는 얘기를 듣는다. 밴드는 졸지에 미국 유랑민이 되고 여자저차 일을 겪으며 결국 멕시코로 가서 결혼식 공연을 한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노래로 당당히 성공한다. 영화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이러하고 딱히 인과관계 없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묶여 있다.


뒷머리카락까지 있는 대로 그러모아 앞을 향해 뾰족하게 세운 머리, 우리에겐 김무스로 통하는 머리를 하고선 까만 양복에 까만 선글라스에 뾰족 구두를 신고 있다. 그냥 봐줄만한 김무스나 뾰족 구두가 아니다. 아무래도 현실에서는 없을 만한 외양을 한 인물들이다. 개의 머리마저 김무스로 만들어놓았다. 이런 그의 표현 방식은 어찌보면 꽤나 ‘유치’하고 노골적으로 보인다. 가령, 밴드와 광팬의 관계가 그렇다. 밴드들의 김무스는 멋들어지게 앞으로 뻗어있고 숱도 많다. 하지만 광팬의 김무스는 삼각김밥 하나 크기도 안 될 정도로 조그맣다. 김무스가 조그마해서 밴드에게서 무시를 당하지만 그는 그들을 쫓아 미국까지 따라간다.




                   저도 미국 갈래요.                           그 정도 김무스로 어딜 따라와.            


내가 처음에 표현 방식이 되게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마 감독이 이야기 세계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의 머리마저 김무스로 만든 것은 얼마나 이야기 세계에 충실한 것인가! 보통 영화의 디제시스 즉 이야기 세계는 허구가 전제라고 인정하고 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꾸 의심하게 만든다.

영화에는 두 개의 이야기 세계가 있다. 하나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들이 있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미국 즉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세계다. 예컨대 현실적이라고 하면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에서 밴드가 차 위에 시체를 싣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걸어가자 경찰이 다가와서 죽은 시체를 왜 들고 다니나며 미친놈이라고 감옥에 가둔다. 하지만 이 시체는 밴드가 미국을 거쳐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다시 살아나 함께 노래를 부른다. 애초부터 이들은 동료가 죽었다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현실성이 떨어지고 작위적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이런 지점들이다. 밴드가 미국행을 할 때, 어떻게 시체를 들고 비행기를 타는가? 왜 멕시코에서 시체가 다시 되살아나지? 두 개의 이야기 세계가 부딪힐 때, 당연히 우리가 믿는 현실성이 있으니까, 밴드의 행동이 이상하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


"뉴욕은 정말 무서운 곳이야.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이지, 티비에서 봤어."
(이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는 음악 영화인데, 몇 안 되는 대사 중 한 장면)


밴드는 미국에서 시체를 싣고 다니다 감옥에 갇힌다


이러한 사실이 영화를 보는 걸 방해하진 않지만 중요한 건 이런 다른 두 세계의 부딪침이 어떤 효과를 내는가일 것이다. 왜 두 개의 이야기 세계를 만들어서 한 쪽을 현실성이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을까?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밴드가 사는 세계가 우스꽝스러워보이고 말도 안 되게 느껴지는 건 이들이 미국 생활을 좇는 것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이들에게 맞지 않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감독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밴드의 세계를 자꾸 미끄러지고 우스워지게 만들면서, 이들의 아메리칸드림을 비꼬는 게 아닐까?
이름에도 느껴지지 않는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레닌을 기념하여 만든 도시 이름 '레닌그라드' 와, 미국을 상징하는 '카우보이' 가 결합됐다는 것 하며, 이들이 드림을 안고 아메리카로 떠나는 이야기. 91년도에 레닌그라드가 옛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는데, 80년대는 이미 이 도시에 개방화가 진전되고 있던 상태라고 하니 감독은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화되는 과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할 것 같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은 인물들의 관계

이름도 모른다, 성도 모른다, 가족은 있는지, 집은 어딘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의 영화 제목처럼 ‘과거가 없는’ 인물들이다. 그저 그들은 지금 여기서 함께 밴드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인물의 심리묘사도 없다. 개인은 없고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라는 무리만 있다. 그 중에서 특색 있는 인물은 있다. 바로 밴드와 구별되는 매니저 블라디미르다. 어떻게든 밴드를 성공시켜 자기 배불리려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 착취관계인가? 이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평은 매니저와 밴드의 관계를 자본가와 노동자의 착취관계를 잘 드러냈다고 말한다. 이 감독이 맑스주의자라는 걸 생각해도 충분히 그러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 장면 하나하나를 분석하기 시작하면 온갖 상징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건 뭘 말할거야, 라고 작정하고 들어가면 모든 게 다 어떤 대의를 말할 것 같은 상징처럼 보이기도 하다는 거다.

하지만 내가 인물의 구도가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느낀 건, 선의 있는 인물도 악의 있는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밴드에게 밥도 안 주고 양파만 먹이는 매니저가 악의 있는 인물일까? 영화에선 전혀 그렇게 보여주지 않는다. 밴드에게는 양파를 던져주고 자기는 혼자 숨어서 음식을 먹는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매니저는 늘 소외되어 있다. 프레임 안에서 밴드는 '무리'로 매니저는 '혼자'로 배치된다. 어떻게든 밴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이긴 해도 늘 혼자 놀고 혼자 맥주 마시고 밴드 사이에 끼어 게임도 못 하고 뒤에 서서 슬쩍슬쩍 쳐다본다. 더 재밌는 건 '문득' 화가 난 밴드가 매니저를 밧줄로 묶지만 매니저 없이 밴드는 늘 과소비에 사실 노래를 부를 클럽조차 얻지 못 하는 무능력자로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매니저가 광팬에 의해 구출되어 밴드를 장악했을 때, 다음 에피소드의 제목이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웃음이 팍 터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매니저와 밴드의 관계에 미국이 들어오면 매니저와 밴드는 마치 한 편처럼 보이기도 하다. 미국 앞에선 이들이 약자기 때문이다. 심리묘사를 잘 하지 않으면서도 복잡다단한 인물, 사회의 모습이 드러나는 점이 재밌다.



          나 혼자 맛있는 거 먹어야지                                  우리는 양파만 주고


우리가 인기 없는 이유는 창백해보여서라며 비치 보이스처럼 건강미 있게 보이려고 선탠을 시키는 장면.


결국 밴드는 미국을 거쳐 멕시코로 간다. 그 곳에서 그들의 노래는 인정을 받고 당당히 탑텐에 오른다는 자막과 함께 이 영화는 끝난다. 시체는 살아나고 이들은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매니저는 알 수 없는 희미는 웃음을 날리고는 사라진다.







내가 가장 좋았던 장면. 밴드의 광팬이 몰래 미국까지 따라와선 어느 이발소엘 들어간다. 이발사에게 자신의 짧은 머리를 한탄하며 길게 뻗은 김무스를 요구하지만 이발사는 당신 머리가 짧아서 그렇게 못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면. 광팬은 이발사가 준 음식을 묵묵히 먹고 있고 이발사는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불러준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본 소감은, 느릿느릿하면서도 따박따박 할 말을 내뱉는 이미지라는 것. 그의 영화는 내내 독립된 시퀀스만 존재하고 시퀀스마다의 인과관계는 없이 툭.툭 내뱉어버리는 듯하다. 카우리스마키 영화가 꽉 짜인 구성없이 툭툭 내뱉으면서도 독특한 울림을 주는 비결은 뭔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 질문을 계속 떠올렸다. 뭘까, 뭘까, 뭘까? 그가 원하는 영화의 분위기가 잘 연출됐기도 할 것이고, 개인의 심리가 전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는 분위기가 캐릭터에서 잘 전달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희미하다. 앞으로 그의 영화를 보면서 적어도 이것 때문일 거라는 나만의 정답은 밝힐 수 있으면 좋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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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아니었다면 2009. 3. 13. 01:33

내면의 심리가 자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우리는 자신의 '속'을 뒤질 떄가 아니라,
그 속을 벗어던질 때 비로소 영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을 살다/고다르>가 영혼에 대해 보여주는 급진적인 견해다.

수잔 손택,<해석에 반대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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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 매혹되어 본 영화.
영화는 혼자 보는 편이고, 볼 때마다 늘 종이와 펜을 손에 쥐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서는 단 한줄의 대사도 느낌도 적지 않았더라. 의심도, 언어화될 필요도 없이, 감정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감독의 나레이션.
“40여 년이 흘렀지만 난 그 1월의 아침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유태인 학생을 숨겨주다 들켜 감옥으로 끌려 가게 된 장 신부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au revoir les enfants 안녕 아이들아, 라고 한다. 
그건 그저 헤어짐의 안녕이 아니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의 안녕이었다.
수용소로 잡혀간 친구들도 장 신부도 모두 죽었지만 과거는 기억으로 되돌아 온다. 그 기억으로 감독은 영화를 만들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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