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fils

영화가아니었다면 2008. 3. 1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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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Le fils,2002)_다르덴 형제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죽인 아이와의 만남을 그린 영화

엔딩에서,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전하는 듯한 메시지
 
내겐 너무 강한 영화라서 딱 두 번봤다
다시 본다면 지금까지 느꼈던 미세하고 먹먹했던 슬픔이 뻥 폭발해 버릴지도..
영화는 아무런 배경음악 없이  핸드헬드 방식으로 거리를 두며 인물들을 좇는다
하지만 영화와 나 사이의 허허로운 공백이 후반부로 갈수록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아버지인 올리비에의 행동 하나 하나, 안경 너머의 눈빛... 집요하게 각인되는 영화

아아

언젠가 영화관에서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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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관객과의 가장 근접한 만남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는 '대중 영화'들에 있어
현실적 조건들은 흡수 가능한, 곧 그것에 지나치게 함몰하는 건 불필요한 요소들로
자리를 바꿔가고 있다.
물론 언제까지나 그 주제들이 우리 삶에 개입할 것은 분명하지만,
이 모든 걸 인정하며 하나의 완결적 매개로 완성된 영화는
그에 대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를 넘어
대체 어떤 일관적 감성으로 관객과 호응할 것이냐가 더욱 중요한 시대로 나아가고 있단 얘기다.
이렇게 된다면 해당 시대의 사회적 쟁점과 그것의 영화적 변용에 집중하던 과거 영화평론의
매우 주요한 패러다임에 한 가지 요소가 덧붙여져야할 것이다.
그건 해당 영화의 일관된 감성을 방해하는 주변적 감성, 곧 관객의 통일된 이입과 연대를
방해할 또 다른 감성요소들의 오류적 난립을 얼마만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다.

나는 이것이 최근의 많은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주목되는 징후라 생각한다.
일관된 감성적 리듬을 따라가며 그 아래 복속된 것들까지 자연스레 재배치하곤
다시 거대한 모함(母艦)으로 돌아와 다시 전쟁을 주관하는 것.

film2.0 319호 편집장의 말, 이지훈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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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자

영화가아니었다면 2008. 2. 24.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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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보그구나 영군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괜찮아 이제 선생님이 알았으니까
                    아는거 다음에는 믿는게 중요하거든 선생님 믿지?
                    근데 아는거 믿는거보다 제일 중요한게 뭔지 알아?
                                          먹는 거야 밥 먹는 거.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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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철이라는 것은 드는 것일까. 문득 어릴 적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철이 든다는 것은 철새의 머리에 든 철 때문에 지구의 한 극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나 뭐라나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시간에 마모되는 내 기억력을 장담할 수 없기에 왜곡되고 변형된 이야기겠지만 어째 그럴싸하지 않은가. 철이 든다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라 하나의 극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나이듦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어릴 땐 철이 들고 싶었다. 더 나아지겠지라는 기대감. 하지만 그래도 철들만하다 싶은 나이가 되었는데 과아연 나는. 지금의 내 나이가 16살 때 학교에 막 부임한 내 영어선생님과 같은 나이라고 생각하니, 그땐 선생님이 참 훌륭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때의 나이가 되고 보니 나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만 같다.
웅얼중얼 중얼웅얼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영화 ‘주노’를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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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6살인 주노. 생애 첫 섹스와 함께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된 미-성년자. 듣기도 해도 막막한 이런 상황. 집에서 내팽겨지고 아이 아빠에게 배신당하고 미혼모의 집에 가서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을 비극적 혹은 희망적으로 보여줄 것만 같다. 소재만 들어서는...........이게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미혼여성 인식의 한계인가. 두둥.

이 영화가 좋은 건 16살이 16살만큼 생각하고 16살이 생각한대로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으며 결정만한큼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거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늘 자기 삶을 강요받기 일쑤였던 청소년은 주노를 통해서, 자기가 먹은 만큼의 나이에서 얼마나 저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노는 비록 임신을 하긴 했지만 울며불며 자책하지 않고 아기를 낳기로 결심하고 좋은 양부모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배가 너무 불러 학교에서 놀림이 되지만 학교친구들이 자신을 보고 ‘좋은 귀감’이 될 거라는 반성 섞인 농담까지,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 용기. 말 그대로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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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아요. 철든 어른이라고 해도 알고 보면 철든 척 하든 것일수도. 군것질을 하고 싶지만 안하고 싶은 척. 갑갑한 사회질서에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임을....(라고 말하면 나 너무 건방진가요)
주노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아이를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하기로 결정했을 때 얼마나 확신이 섰냐는 질문에 주노는 104% 확신한다는 대답한다. 제 삶에 대한 책임은 그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으며 자신이 확신에 차 가면서 이뤄낸다는 것. 영화는 철이 든 어른의 시선도 철이 안 든 어른도 시선도 아닌 17살 주노의 눈을 맞추며 만들어 졌다.

또 하나는 한국인으로서 바라본 영화 주노는 더욱 의미깊었다는 것.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이혼한 전 남편이 재혼한 여자의 가정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에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는데 영화 주노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노가 "I'm pregnant." 라고 말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으며 당사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부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내 자식이 아니라느니 해서 기를 죽여 죄인처럼 만드는 게 한국사회의 모습일텐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얼마나 더 좋은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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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부터 주노는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일찍이 이혼하고 엄마는 재혼해버렸으니까. 새엄마가 들어오고 새엄마가 낳은 여동생이 함께 사는 가족은 한국식으로 보면 불우한 가정이라고 하겠지만, 영화에선 ‘친엄마와 안살면 불행해’, 어릴 적 동화가 가르쳐준 것처럼 ‘계모는 나빠’ 와 같은 편견이 없다.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족의 탄생인 것을.
마냥 행복해보이던 주노 아이의 양부모가 될 바네사와 마크 부부가 이혼하려고 했을 때, 주노는 믿음에 대한 배신에 너무 서러워 엉엉 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편견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욕심을 버리고 자기 아이를 진짜 사랑해줄 수 있는 바네사를 제 아이의 엄마로 인정하게 된다.
또 어른이라고 당연히 부모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바네사의 남편 마크를 통해 보여준다. 그가 자신의 숨겨왔던 자신의 자유로움을 선언하며 아빠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비난할 순 없다. 오히려 이해와 공감이 앞선다. 

이렇게 영화는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살아 숨쉰다. 한 명 한 명 그 누구도 편견없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은 카메라의 따뜻한 시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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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구성됐다. 그리고 내내 길을 따라가는 장면이 많았다. 주노가 가는 길을. 설마 임신일까 싶어 조마하며 임신테스트기를 사러가는 주노를 따라서, 자기 아이의 양부모가 되어줄 사람을 만나러 가는 주노를 따라서. 그렇게 끝까지 지켜봐주고 응시하고 싶어하는 감독의 마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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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너무 심각해지지 않으면서도 104%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런저런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104%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 역시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가장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우리를 이끄는 지구의 끝을 향해 아름답게 날개짓하며 날아가자.  머리에 든 철이 조금 무겁더라도 감수하면서 말이다. 주노처럼 조금 더 용기있게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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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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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동하 감독은 택시운전사가 벌써 15번째 직업이라고 한다. 영화를 찍기 위해 늘 돈이 되는 직업과 병행해 왔던 그, 이번엔 어떻게 택시운전사라는 직업을 택하게 됐을까.

2003년에 또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 될 시간이 왔었어요. 고민을 하던 중에 주위에 택시 자격증을 따려고 한다는 사람을 듣게 됐죠. 택시기사는 이직률이 굉장히 높거든요. 열 명중 한 두명만 두세 달 이상가고 결국 택시기사가 됩니다. 그래서 항상 기사 모집한다고 택시회사밖에 현수막이 붙어 있어요. 전 굉장히 천진난만한 접근으로 ,자격증을 한번 따놓으면 돈이 궁할 때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물론 다시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웃음)


택시기사를 하면서 촬영을 했다면 정말 많은 분량을 찍었을텐데, 편집하면서 힘드셨을 것 같아요.

한 시간짜리 테잎을 200개 정도를 찍었어요, 솔직히많이 찍은 건 아닌데, 욕심껏 찍었으면 400개 정도 됐을 거예요. 하지만 항상 카메라를 설치할 수 없었고 3일 중 하루만 설치했어요. 그런데 꼭 카메라를 설치 못한 날에는 기가 막히는 손님이 타서 마음이 아팠어요.

취사선택했던 기준은 승객들 입으로 승객들 모습 자체로 서울을 대변할 수 있는 장면, 또  내가 느꼈던 서울을 그대로 옮겨 줄 수 있는 장면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했죠. 또 그 장면들 중에서도 좀 세게 보이는 장면이 선택됐어요. 날 것의 느낌이 나는 적나라한 장면들이랄까..  포스터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그런 모습들이 제겐 되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였어요.


서울을 날 것으로 드러내고 싶다고 하셨는데, 전 그걸 표현하는 형식이 되게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큐로 알고 갔는데도 정작 영화를 보면서는 진짜 다큐인가 아닌가 생각하느라 좀 혼란스러웠거든요. 미리 형식을 다 짜놓고 하신건가요.

 

꽉 짜여진 건 아니고요. 처음엔 한 3장 정도를 짰어요. 후에 펀드를 위해서는 그보다 길게 10장 넘게 시나리오를 썼지만요. 그 정도 안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치긴 했지만,  처음 컨셉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진 않아요. 제가 많이 들어가고 안가고의 차이는 분량의 차이는 있어도 처음과 끝은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거랑 비슷하게 나왔어요. 기본적인 생각만 갖고 나머지 벌어진 일들은 어떠한 다양한 소스들이 나한테 올지 모르니까, 열어 놓고 있으면 훨씬 더 영화가 풍성해지고 영화를 찍는 재미도 나요. 저는 영화 작업할 때 그렇게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 그 작업이 저한테 맞아요.


보통은 장르를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그 장르대로 만들어야 되잖아요. 장르영화를 제대로 해본적도 없지만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아요. 또 제가 하고 싶은 주제가 있어서 형식을 고민하다보면, 그게 또 결국은 그냥 독자적인 나만의 형식으로 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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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를 봤을 땐 영화가 굉장히 희망적일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본 영화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저도 충격이었어요,  지옥의 묵시록처럼 포스터가 나올 거라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아마 택시 블루스를 너무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으면 관객들을 아예 극장엘 못오게 하지 않을까요? (웃음)
그런데 또 많이 고민을 해보니까 이 영화도 되게 따뜻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슬픈 도시 얘기를 했기 때문에 말이죠.


영화 찍으면서 희망을 의도하신 면은 없었나요. 리얼리즘이란게 삶의 진실을 보면서 오히려 살아 갈 희망을 얻도록 하잖아요.

사람들은 항상 희망을 얘기하려고 해요. 어떤 작품에 희망이라는 문구가 없으면 어떻게든지 그런게 있지 않을까 찾으려하고 작가에게 강요하고.
희망이라고 하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매일 약속시간에 늦는 친구가 있어요, 습관적으로 계속 같은 걸 반복하는 친구. 자기는 괴로워해요. 근데 그게 바뀌지가 않아, 희한하게도. 근데 스스로는 바뀔거라 생각하죠. 그리고 자기는 그게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일은 난 지각을 안할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 분명히 내일도 지각을 하거든요. 평생 그러는거 같아요. 평생 아침마다 희망적으로 일어나길 바라는.. 그래서 자살하지 않고, 서울에서 하루에 딱 한명만 한강에서 투신을 하는 정도로만 자살율이 유지되겠죠. 희망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것 같아요.

저는 작품 속에서 희망을 안보여주고 싶었어요 식상하니까. 또 사람들이 희망에 대해서 강요하니까. 차라리 희망이란 걸 쏙 빼고 얘기를 하면 좋지 않을까 했어요.
택시블루스에서는 그걸 제대로 해볼까 했는데, 근데 또 결국에 희망적이 된 것 같아요.
찍고 보니 마지막의 강아지 시선이  희망적이지 않은가 싶더라고요.
어쨌든 그래도 전 희망 희망 하는게 식상해서 의도적으로 그런 걸 피해 다니려고 하는 입장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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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내내 궁금했는데, 나레이션으로 나오잖아요. 택시운전하실 때 왜 마늘을 안드세요.

전 택시운전하면서 마늘이 상징적으로 느껴졌어요.
외국인친구한테 그런 얘길 들었거든요, 한국 특유의 냄새가 있다고. 그 한국 냄새의 대부분이 마늘냄새가 섞인거거든요. 그 냄새가 그렇게 심할거라는 걸 택시하기 전엔 몰랐어요. 굉장히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랑 같이 있잖아요. 밤에는 특히 사람들이 뭘 먹고 타는데 그 음식의 대부분 마늘이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계속 그 냄새에 대한 시달림이 상당했어요. 그래서 기사식당 가면 생마늘이 꼭 나오는데, 그게 맛있다는 걸 알면서도 못먹겠는거예요.


마늘의 그 약간 알싸하지만 계속 고통스럽게 오는 자극이, 택시 안에서도 그렇고 서울 안에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느낌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마늘을 안 먹는 실제 이 상황과 영화 속에서 마늘 안먹는 장면이 좀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첫 콘티에 넣고 마늘냄새 오바이트냄새 톱밥냄새 이렇게 다시 언급하고. 그 냄새를 영화 속에서 맡아줬으면 했어요.
근데 톱밥냄새 같은거도 내가 다 맡은 거예요, 왜 이사람한테는 톱밥냄새가 날까 하고 생각했어요.(웃음)


마지막에 죽은 고양이를 회전앵글로 촬영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시내를 운전하다보면, 굉장히 많은 죽은 동물들을 보게 돼요.
그게 남의 모습 같지 않았어요. 애매하게 죽는 거잖아요 길 지나가다가. 사람이 사람을 칠 수도 있는데 그것도 특별히 인과관계가 있어서기보다도 애매하게 벌어지는 것 같아요.
다들 좀 애매하게 죽어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애매하게 고통을 주는.. 그런 게 서울의 척박함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지막 부분에 죽은 고양이를 보고 차를 타면서 빙빙 돌다가 제가 사라지게 되는데,
그걸 처음 갖고 와서 스텝에게 보여줬을 때 그 도는 게 마치 고양이를 제례를 지낸다고 하나 사리를 태울 때 중들이 빙빙빙 돌면서 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 느낌이 괜찮다고. 그걸 생각했던 건 아닌데 고양이에 대한 애착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을까 해요.



감독님이 문득 물었다. ‘고양이 치어보셨어요?’

제가 실제로 고양이를 쳐봤고 칠 때의 그 느낌을 오래 갖고 있는데, 또 치이고도 쉽게 죽지 않는 고양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고양이를 타 넘는 느낌이 굉장히 물컹하고 섬짓해요. 작은 생물체지만 그 고양이를 타고 넘는 느낌이 너무 강해요.
또 그게 만약 잘못된 길을 가다가 고양이를 친 거라면, 돌아 나오면서 그 고양이를 또 봐야된다면, 그 기억은 더 오래 가더라고요. 실제로 그랬거든요, 잘못된 길이라서 돌아 나오는데
그 고양이가 아직도 살아 있는데 어떻게 치워 줄수도 없고 다시 밟아서 고통을 끊어 줄 수도 없고 그냥 도망치듯이 나왔어요.


택시 운전을 하면서 승객들의 고통과 눈물을 많이 봤어요. 특히 뒷자리에서 우는 여자들 상당히 많거든요. 안울어 보셨어요?  전 아주 승객의 극단적인 슬픔, 분노를 목격해도 그냥 그렇게 도망치는 입장인 거예요. 고양이를 피해서 도망치듯이 그런 느낌..전 그런 택시 기사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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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감독님이시잖아요. 우리 나라에서 독립영화라는게 관객과 소통이 많기가 힘듭니다. 관객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기대를 많이 하시는지.

송환이 인기가 좋았죠,그게 3만이었고. 우리학교가 9만,우리 독립영화 중에서는 최고기록이죠.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인디스토리 대표랑 술을 마시다가 그 분이 갑자기 고등어회를 진짜 잘하는 집을 안다면서 고등어회쏘기 내기를 하자는 거예요. 관객수 가장 가깝게 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그러면서 자기는 먼저 얘기를 못한데요 감독들이 상처받으니까.
그래서 제가 좀 세게 3500명 얘기했거든요 그러니까 대표가 그러니 내가 그러니까 얘길 못한다면서 750명 얘기했어요, (웃음)
그 얘기를 들을 때 딱 현실감각이 돌아왔어요. 아 그랬었지 내가 잠시 착각했구나. 개봉이라고 해봤자 맞아 이게 독립영화로 광고가 되는 거지 또 단관이고, 마케팅한다고 하지만 힘이 약하고..

지금 독립영화에 대해서 물어보신거잖아요
750명, 그게 독립영화예요.



독립영화는 낯설다,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택시블루스 같은 경우도 낯설 수도 있을 거예요. 막상 보면 불편할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내용으로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형식을 위해 고민을 하시나요.

사실, 택시 블루스도 되게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형식이고, 낯선 방식은 아니예요. 최근까지도 유명한 대감독들도 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고정패턴으로만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려고 해왔고 소비하다보니까 내겐 식상하고 재시도하는것 밖에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거를 마치 어디서 뚝떨어진 낯선 것처럼 생각하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서 내 영화를 볼 수 있게끔 하는 방법은 대충은 알죠. 그런데도 그렇게 만들지 않는 건 제가 투표를 안하는거와 마찬가지예요, 제가 소신을 갖고 투표를 안하는 이유는 다수결이라는 투표나, 상대를 설득해서 스텝바이스텝하는 역사를 통해서는 차선책으로 가서는 제가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믿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으로 제가 원하는 세상을 혼자서 구연해 나가면서 사는 방법을 택한거고요.

영화도 사람들은 이렇게 만들면 좋아하겠다 저렇게 얘길 하면 좋아하겠다는걸 대충 알긴 하지만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은 건, 그렇게 안전하게 사람들의 희망을 모시면 그것 역시 내가 원하는 세상이나 영화에 종국적으로 이르지 못한다는 거죠.

관객들이 아무리 내 영화를 많이 봐줘도, 750명만 봐주는 영화를 만들어도 나는 그게 내가 원하는 세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 안에서 자극적으로 익숙한 형식들을 피해가는 거예요.
저는 형식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형식이 바뀌지 않으면 그 내용가지고는 아무런 뭔가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거죠. 그게 영화를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화의 형식부터 바꿔야 된다고 생각해요.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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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도 복잡하고 그래서 몹시나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서울.
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가 되어 꿈틀거리는 서울을 보면서 처음에 가졌던 선망과 감탄의 마음과는 다르게 이젠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풍경이 그 풍경이라는 생각.  

그러고 보면 내 시각의 프레임이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는 것들은 감탄만을 자아내고자 했던 시선일 뿐이었으며, 그러나 서울은 그렇게 즐거운 곳이지만은 아닌 것임을.. 영화 택시 블루스를 보면서 서울에게서 보지 못했던 것들, 하지만 보아야 하는 것들을 나는 느낀다. 또 그 곳에서 시간의 흐름에 구겨졌던 내 삶의 단면들도 본다.

그리고 그 슬픈 서울과 함께 블루스를 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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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1년 동안 직접 택시 기사를 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을 섞어 놓았다. 영화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일관성 없는 장르에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장면을 붙여 놓은 몽타주는 내용이 아닌 저 장면이 진짜인지 아닌지에 대한 엉뚱한 고민으로 흐르게 한다.
하지만 그 모호함이 매력 있다. 그냥 그게 서울의 풍경이다. 순간의 장면에서 순간의 감정을 느끼는 것.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살면서도 뭐라 뚜렷하게 말할 수 없는 감정들.


택시 기사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지. 하루 20시간 가까운 시간을 운행하면서도 사납금과 때로 벌금까지 내버리면 남는 것은 없다. 더 많은 손님을 태우기 위해 고양이의 눈처럼 그들은 사람들을 응시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보지 않아도 될, 하지만 그것이 인간 군상의 어두운 진실이기도 한 모습들을 본다.
여자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남자, 만취해 개가 되는 인간의 모습, 남편 때문에 아이를 안고 우는 여자,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야기.

택시는 밀실처럼 인간의 고독과 슬픔 절망 폭력을 담아내는 장소와도 같다. 꼭 그렇지만도 아닐 공간이지만 어쨌든 이것이 인간이 애써 피해서는 안될 삶의 진실이기도 하다.
택시 기사는 그런 인간의 슬픈 운명에 가장 밀접한 목격자이면서 똑같이 고단한 인간의 운명이다.

묵묵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것 같던 택시기사인 감독의 내면엔 불만과 스트레스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택시기사의 고단한 운명을 몸소 느끼면서 그의 고통은 더 켜져만 가는 것 같다. 영화엔 사회 부적응에 불만과 스트레스를 가득 안고 있다는 진단서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 불만은 영화에서 감독의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에게 욕을 하고 예의 없이 구는 사람들에게 감독은 여지없이 폭력을 날린다. 하지만 감독의 그 폭력이 왠지 슬프다.
구석방에 몸을 구부려 잠이 드는 택시기사인 감독은 마치 삶의 절망감 곧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고단한 인간의 절망감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결국 온전히 고단한 인간이 되고 절망이 되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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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승객이 택시를 탄다. 그는 불평하기 시작한다. 택시 기사에 대한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그리곤 감독인 택시기사에게 자기가 아는 길을 강요하고서는 더 나온 택시비를 보고는 오히려 화를 내며, 지폐를 집어 던지곤 나간다. 그러자 거친 숨소리가 들리면서 카메라는 유유히 그 승객을 뒤따른다. 감독인 택시 기사는 말한다. '니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그는 승객에게 주먹을 날린다.

마음이 메인다. 그건 절망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날리는 주먹과도 같이 느꼈기 때문이리라. 한번도 좋은 기억이 없다고 불평하는 승객은 알고 보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 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기사를 탓하며 기어코 그를 향해 돈을 집어 던진다. 그게 어쩌면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 역시 사람들을 향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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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회전하는 앵글이 자주 나온다. 첫 장면에 택시기사가 식당에 앉아 있는 모습을 회전하며 상승하는 앵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죽은 고양이를 택시 기사가 주위를 유유히 회전하는 장면.
그건 절대자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신 안에 있는 인간의 운명 같은. 내가 카메라의 시선이 된다 치면, 이건 마치 유체이탈하여 나를 보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절망스럽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렇다고 희망을 자극하는 영화 같지도 않다. 희망을 얻고 싶지도 않다. 공통적인 삶의 풍경이라 할 순 없지만 나의 삶 혹은 남의 삶에 분명히 존재할 그림자. 그 운명 때문에 택시 운전사는 고단해 하고 감독은 고단해하고 또 우리네 삶은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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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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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영화가아니었다면 2007. 12. 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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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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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ome

영화가아니었다면 2007. 12. 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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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내가 하나 되다, 온통 내 몸이 얼룩지도록 흡수돼 버렸으면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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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윤성호 감독의 회고전엘 갔다. 올빼미 영화제라 밤새 이어지는 영화 상영에 눈이 뻑뻑해질뻔도 했지만 영화의 시선과 눈싸움을 하느라 온전한 정신력으로 밤을 샐 수 있었다. 윤성호 감독의 영화들, 특히 이전의 단편영화들, 삼천포 가는 길,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 산만한 제국,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등 7편의 영화들에서는
은하해방전선 이상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윤성호 감독의 초기 단편들을 보면서 나는 운동을 생각했다. 영화 중 종종 운동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은 내게 박혀 제 멋대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운동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운동이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말을 입밖에 꺼내는 순간 사람들의 오해 섞인 편견에 갇히게 된다. 단어 하나가 사람들 생각의 부화를 중지시키고, 톡 하고 깨면 흘러나오는 그 의미만을 받아 먹게 만드니까. 좀 답답하다 싶어도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꾸 운동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겠다. 단어를 되뇌일수록 의미를 알기 보다 더 억압받는 기분이다.  감독의 말대로 이름은 지하 납골당 이름은 뇌의 뚜껑.

어쨌든 난 이념을 말할 때 사용하는 운동을 말하는 건 아니다. 언어의 틀 속에 가둬진 운동을 넘어서는 운동. 운동은 곧 삶이니까. 삶은 운동이고 그건 곧 힘의 작용. 나는 힘들이 촘촘이 맺어진 하나의 무엇.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 까딱,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한데 그래 운동하는 지구, 그리고 너와 나의 수다, 너와 나의 사랑까지. 그래서 삶은 곧 운동이다. 매 순간 새로운 에너지를 흡수하고 내뱉으며 우리는 소통한다.


그의 운동에는 목적이 없어 보인다. 끊임없이 곁가지를 뻗어 나가는. 가령, 좌파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 이념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어서 그 기준으로 영화를 들여다보려 하면 또 그것마저도 넘어서는 것 같은.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버린다. 그게 앞서 나간다는 이야기라기 보다 무규칙 전방위적인 움직임이랄까.
그의 움직임이 좋다. 그의 운동방식이 좋다. 그의 산만한 운동이. 그 산만함은 자유로워보인다.
아. 나도 저렇게 운동하고 싶다.


내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세상이 좀 달라져야 하지는 않을까도 싶다. 그런데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고 좀 다르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나는 다르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다르게 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난 윤성호 감독의 단편 영화들을 보면서 '방식'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가치관을 탐내고, 해독하기도 힘든 내용들을 알아보려고 영화 속 대사와 텍스트를 기록하고 곱씹어 본다. 그가 운동하면서 희미하게 드러내는 궤적에서 나와 겹치는 것이 있을 때 불안한 위안을 느낀다. 그 과정 자체가 곧 나를 키우는 운동이니까. 즐거우니까.  


나는 영화가 힘이라고 믿는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힘들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느슨해지고 물러지면서 제멋대로 주물러진다. 영화의 힘이 같이 섞이면서 나는 조금 혹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다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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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ps.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는 걸까요 하지만 내가 살아갈 힘은 이건데요, 그래서 난 마치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모든 기존의 윤리를 거부하고 내 생각이 비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하면서  '저항으로 패션을 삼지 말고 패션으로 저항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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