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고통과 꿈

인용 2014. 11. 9. 01:50



* 1976-1985! 그 시절 저는 좋은 예술가가 되고 싶었답니다. 그 시절에는 열정과 고통과 꿈이 있었답니다. 저에게는 오직 그 시절만이 아름답습니다!

 

시인 이성복, <책과 선택>,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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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요즘의 내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글.

 

 

 

논술고사

답안지를

넘겨보며

 

황현산

 

내가 재직하는 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해 예년과 마찬가지로 논술고사를 시행했고, 교수들은 신년 벽두부터 그 답안의 채점에 들어갔다. 문제의 형식도 몇 개의 문항을 준 다음, 거기서 공통된 주제와 다른 입장들을 찾아내어 설명하고 수험생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게 하는 것이 예년과 비슷했다.

 

문제가 쉽지는 않았다. 학문적인 짧은 텍스트이기도 하고 법정의 논고이기도 한 그 제시문들은 모두 객관적인 사실의 규명과 주관적인 해석이 맺고 있거나 맺어야 할 관계를 문제삼고 있었다. 세상에는 누가 보아도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완벽하게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 신념에 불과한 것인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는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진실은 국면에 따라 바뀌고,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변덕스런 관점만 헛되이 떠돌아다니는 것일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밝혀내는 것일까, 자기 처지에 맞는 관점과 기준에 따라 그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일일까?

 

이 질문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판단하여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옳은 의견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해결해야 할 질문이다. 학교가 이 문제를 수험생들에게 제시할 때도 완결된 해답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를 대하는 수험생 개인의 태도와 생각의 깊이를 보려는 것이었다. 수험생들의 의견은 당연히 여러 수준에 걸쳐 다양하다.

 

우선 사실이면 사실이고 아니면 아니지,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진실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학생들이 있다. 어느 답안은 우리가 천동설을 믿고 있을 떄도 지구는 엄연히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 반대편에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오롯이 파악되는 지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모든 진리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기 떄문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을 개진하는 수험생들이 과학적 체계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그 역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학자들이 함께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이자 그 체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두 가지 대비되는 관점 사이에 진리에 대한 수험생들의 태도가 있다.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견이 의외로 많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믿는 것이 역시 옳은 것이라는 식이다. 권력과 이해관계가 진실을 결정하니 우리는 무엇보다도 규칙의 잣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현실주의적 의견의 바로 곁에 진실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고 진리는 도달할 수 없는 낙원과 같다는 불가지론이 있다. 그것을 세속화한 형태가 진리상대론이다. 세상에는 완전히 맞는 의견도 없고 완전히 잘못된 의견도 없으며 서로 다른 관점, 다른 사고법에서 비롯한 다른 견해가 공존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상대주의의 편에 선 수험생들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의 지표와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사고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 다양성을 주장하는 의견들은 대체로 목소리가 활달하고 문체가 자신감에 넘쳐 있어서, 모든 사안에 양비론이나 양시론으로 반응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풍토를 그대로 반영하고 상징하는 것만 같다. 출제자들이 필경 염두에 두었을 의견, 진실에 대한 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이 자신의 의견 속에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고, 그로써 자신의 생각을 다시 성찰하고 그 깊이와 폭을 넓혀, 한 주관성이 다른 주관성과 만날 수 있는 전망을 내다보고, 인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이라도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가 오히려 수줍은 목소리다. (2004)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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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일시에 밝게 비춰줄 한 광채의 존재를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서 보았으며, 자신이 그 빛을 본 첫번째 사람이 아니란 것도 배워서 안다. 그래서 그는 착하고 진실한 삶이 저기 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비루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날마다 묻게 된다. 어쩌면 그가 쓰는 시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말을 골라 이리저리 조합했을지 모른다. 제가 무엇을 썼는지 자기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제목을 붙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진지할 것이 없어 보이는 말장난을 할 때조차도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다. 그는 자기 자신도 누구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는 벌써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보았기에, 그가 쓰는 말들이 그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늘 새롭게 관계를 맺기에, 그의 시는 이 모욕 속에서, 이 비루함 속에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려던 사람들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한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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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인용 2014. 3. 3. 01:33

“결코 사물들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과 실어증에 걸린 듯 사물들에 대해 말없이 숙고하는 것 사이에서, 나는 실제로 선택권이 없을까? 한쪽은 사유함으로써 사물들을 파악하지만, 늘 그것들의 실질적인 단독성 앞에서 실패하게 된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물들 고유의 실재성, 즉 온전한 현존으로써 사물들을 파악하지만, 총체성 안에서 필연적으로 그것들의 가치를 읽게 된다. 한 극단에서는 모든 실재를 총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괄적인 이해만을 경험한다. 또 다른 한 극단에서는 전체를 만들어 내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서 각각의 실재들을 하나씩 터득한다. 나는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그리고 몇 장의 종잇조각들을 무기력하게 줄곧 응시하고 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두 가지의 극단 속에 갇히는 것을 피해야 한다. 중간에서 비스듬히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철학자들의 덫에 걸리지 말고. 이 모든 것들과 저 모든 것들을 떠나야 한다. 한쪽을 피하면서 다른 한쪽의 위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 가능하다면, 떨어져서 똑바로 전진하라. 사물들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응시하며 유심히 살펴보라. 그렇다고 해서, 거리를 두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비교하기 위해 그것들에게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 자성을 띠는 양 극단의 중간에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유쾌하게 나아가라. 대단히 힘이 들 테니까. 그렇다. 이것이 적합한 방법이다.”

<사물들과 철학하기>, 로제-폴 드루아,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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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질료에 가깝다.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이 사실이 명백해진다. 뭔가 부피를 가진 것이 눈앞에 놓여 있는 듯하다. 부피를 가진 것 안에서 정신이 작동하고 있다. 정신은 말을 통해서, 그득하게 쌓인 소리의 무더기에 일정한 한계를 만들려 한다. 만약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면 사람은 그 안에서 소리와 정신의 대치를 떠올리지 못한다. 그 정도로 완벽하게 소리는 정신 속으로 스며들어버린다. 『인간과 말』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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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는 토마시와 함께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녀가 젖 먹던 힘까지 기울여야 할 만큼 힘이 듭니다. 마침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그녀는 원래 그녀의 출신인 ‘저속한’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러고는 답을 찾아냅니다.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는 거라는. 그런데 현기증이라는 건 뭐죠? 저는 그 정의를 찾아내서 “쓰러지고 싶은, 막막하면서도 이겨 낼 수 없는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금방 저는 생각을 고쳐서 그 정의를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라고 명확히 합니다. 현기증은 테레자를 이해하는 열쇠예요. 당신이나 저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어는 아니죠. 그렇지만 당신이나 저나 적어도 이런 종류의 현기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것, 실존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알지요. 저로서는 이런 가능성, 이 현기증을 이해하기 위해서 테레자라는 ‘실험적 자아’를 만들어 내야만 했던 겁니다.


『소설의 기술』p50 , 밀란 쿤데라,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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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우리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갖기 이전부터 이미 믿음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대상이 되었던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은 매 순간 새로운 믿음을 성취해내야만 한다. 믿음의 세계가 부재한다. 그 세계에서는 개인이 함께 믿음의 대상이 되며, 설사 원하지 않더라도 모든 개인이 함께 믿음으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하나의 세계로서의 믿음이 부재한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매 순간 스스로 직접 믿음을 쟁취해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영예라고. 왜냐하면 그렇게 믿음을 획득하는 일은 저절로 주어지는 믿음을 그냥 얻는 것보다 인간에게는 더 어렵기 때문에. 하지만 더 어렵다고 하여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항상 긴장과 피곤을 요구하는 일은 인간의 기본구조에 반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 인간이 언제나 깨어 있는 존재라면 장기적인 긴장도 인간에게 속한 속성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일 뿐만 아니라, 잠이며, 꿈이며, 또한 휴식이기도 하다. "잠자는 사람조차도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으며 이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헤라이클레이토스)

 

『인간과 말』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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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은 유한하며 유한한 것은 불멸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살며,

죽은 사람은 타인의 삶을 죽는다.

(헤라이클레이토스, 《단장(斷章)》,62)

 

이 문장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시절 인간은 선험성이 언어와 대화하는 지점을 알고 있었고, 언어가 말하고 있을 때 언어를 급습했다. 이 문장에서 나오는 치유력은, 궁극적으로 모든 내용을 초월한다.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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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김영하 작가님이 느낄 수 있는 책임감이 세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소설가로서의 책임이 있을 수 있고요 십 대 아이들에 대한 여기서 묘사된. 또 하나는 취재과정에서 어떤 얘길 들으셔을 텐데 그 얘기를 듣는다는 건 일종의 증언이잖아요 증언을 들은 사람으로서, 청자로서 책임감이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소설쓰기 행위와 완전히 무관하게 김영하 작가님이 한국을 살아가는 사십 대 남자니까 기성세대로서 느끼는 책임감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 셋 중에서 이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어느 책임감이 가장 크셨나요.


김영하
저는 어떤 얘기를 듣든, 아무리 처참하고 아무리 끔찍한 이야기를 듣든 만나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든 간에 소설가로서 느끼는 책임감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미학적 책임감이죠. 잘 써야 됩니다. 그것이 잘 쓰여져셔 독자들이 그 소설을 읽고 나서 간단하고 쉽게 판단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저는 소설가의 유일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걸 읽고 분노한다거나 아니면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아니면 아 십대 애들을 위해서 내가 봉사해야되겠다거나 아니면 우리집 애를 위해서 내가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실패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걸 사람들이 읽고 나서,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리고 간단한 도덕적인 책무들로 귀결되지 않으면서 복잡한 심경으로 단 십분이라도 삼십분이라도 앉아있을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걸 못한다면 제가 책임을 느껴야 하고요. 그걸 독자들이 할 수 있게 만들어야 된다는 책임감을 느끼죠. 그렇지만 말씀하신 세 가지 정도의 책임감은 공민적 책임감이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이 사회에 책임이 있는데 십대들이 저렇게 됐다니 아니면 가난한 십대들 계급 문제에 대해서 느낄 수 있고 조지 오웰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그런 쪽에 책임감은 거의 느끼지 않는 편이고요. 소설은 누가 그랬잖아요. 복수심으로 써도 안 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써도 안 되고 그런 걸 넘어서는 어떤 것이죠.  


<이동진의 빨간 책방 :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작가 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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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0

인용 2013. 3. 22. 00:01


울고만 싶던 첫날밤이 지나고 맞은 다음 날 아침. 한순간 그리 지독하게 외로울지 몰랐다. 외로움 빠지고 난 다음 날, 모든 것이 반갑게 밀려왔다. 2012.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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