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잃어버린 것들 내가 잃은 사람 찾지도 찾을 수도 없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3.09 매번 할 수 있는 걸 다 하면서 넘어갈 수 있을까 (3)

1. 겨울 외투 하나만 사라진 줄 알았더니 좋아하던 봄 잠바도 사라졌다. 여행갔던 두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선물 받은 겨울 외투가 사라지고 속이 상해 여러 가능성들을 체크해 봤지만 별 수가 없단 걸 깨닫고 빨리 마음을 접었다. 이건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외투와 나의 문제라서 네 탓은 할 수도 없었다. 꽃샘 추위가 온다는 소식에 겨울 외투 잃어버린 걸 알았고 오늘 따뜻하단 친구의 말에 봄 잠바가 사라졌단 걸 알았다. 졸지에 나는 춥거나 따뜻하거나 여행 내내 입던 까만 패딩 만을 입고 다니게 됐다. 사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 건 정말 내가 그 옷들에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위로했지만 내가 겪었던 그 어떤 크고 굵직한 사건 앞에서 보다 무력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무력감이었다. 사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빨리 포기하고 내 기분을 전환하는 데에 더 집중하는 편이었다. 여행하면서도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하면 그게 빨리 되는 성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판단은 결국은 나를 위한 판단일 뿐이지 그 사건이나 가령 잃어버린 내 물건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미안하고 억울했다. 답답해서 네이버 지식에 '옷장에서 옷이 없어졌을 때'라고 검색해 보았으나 이건 누구에게 의지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이런 류의 질문 따위는 없었다. 내 친구는 이런 나를 위로하며, 옷이 도망가보고 싶었는가벼 잘 살으라고 생각해, 라는 문자를 보내 주었는데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싫어서 도망간 거라고 생각하니까 희미한 서러움을 느꼈다. 그래 그래 그게 옷 뿐 만일까. 친구는, 언니가 싫다기 보다 주인없이 집에 있으니 나가 보고 싶었을 거라고 했다. 우린 잠시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관해 얘기했고 난 내가 죽고 나서 그런 것들 다 우러러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창 동화처럼 생각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쨌거나 진실일 지도 모르겠다.   

2. 홍상수 영화를 좋아해서 모두 챙겨보고 그의 영화 나오는 걸 삶의 낙 중 하나로 여기고 있지만 이번 신작을 보고 처음 느꼈다. 아니 알았다. 그의 영화 속 남자들은 정말 못 났 구 나. 이 생각에 휩싸여 극장 밖으로 나와 계단을 오르고 환한 대로를 거쳐 좁은 골목길을 내내 걷다 미국 소유 땅이니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말라 적힌 운동장으로 들어가서는 굉장히 큰 나무 주위를 뱅뱅 돌며 걸어 보는데, 생각할수록 영화가 슬펐다. 해원의 말처럼 외롭고 슬펐다. 그리고 이내 무서워질 터였다. 


3. 날이 좋으면 그래서 좋고 비가 오면 또 그래서 좋고, 바람 불어도 좋고 눈이 내려고 좋고, 좋은 영화가 나와서 좋고 좋은 책이 나와서 좋고. 나누고 함께 하고픈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 진심만으로 날이 좋고 바람이 불며 좋은 책과 영화들이 있었지. 


4. 내 귀여운 조끼도 사라졌다. 산책하다가 어떤 여자가 조끼 입은 걸 보고 설마.. 안 보인 것 같은데 설마.. 하며 돌아와 들여다 본 옷장에 내 귀여운 조끼는 없었다. 남방 위에 겹쳐 입으면 꽤 따뜻해서 봄가을에 자주 입었다. 사계절을 몽땅 도둑맞은 기분이다. 혹시 내 옷을 입고 있는 자, 저주하지는 않겠다... 따져보면 결국은 다 내 탓이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