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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워하지마 부끄러워하면 어두운 게 되는거야",
                                                                                                      <미쓰홍당무> 이경미 감독




  "새로운 감수성-캐릭터로 사유하기" <한국에서 영화감독의 사는 법>강좌의 세 번째 주인공은 바로 이경미 감독님이었습니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을 보며, 누군가는 배아프도록 낄낄대고 누군가는 펑펑 울고 또 누군가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이 없어하기도 했을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웃다가 울었습니다)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이렇게 나한테 안했을 거면서! 내가 나니까 다들 일부러 나만 무시하고!"

 결국 미숙이가 터지듯 내뱉는 이 말. 크랭크인 들어가기 직전까지 쓰지 못 했던 대사였다고 합니다. 대체 미숙이가 왜 저럴까 하는 단 한 마디가 필요했던 이경미 감독은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다 버스를 타고 가던 어느 날, 문득 저 대사가 그녀의 머릿속에 떨어집니다. 저 기막히게 웃기고 눈물나는 대사가 쓰인 거죠. 보이지도 않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을 낚아서 그게 구체적인 형상을 띨 때까지 생각하고 또 기다리고 또 생각했을 감독의 집념이 보였습니다.  

'아, 이건 내 살 깎아먹는 얘긴데' 하면서도 소탈하게 웃으며 솔직한 얘기를 전해주신 감독님. 꼭 남기고 싶어, 주고 받은 대화 몇 부분을 옮깁니다





  영화의 캐릭터들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캐릭터를 어떻게 만드는지.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이런 '호기심'이 시작이다. 뭔가 알 것 같은데 알 것 같은데 하는 감정. 뭐 전두환 같은 인물은 이해하고 싶지 않고(웃음)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게 나와 링크되는 때가 있다. 꽂히는 게 있으면 계속 살을 덧붙여 나간다.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전해 들은 사람이 내 타겟이 되는 것 같다.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단편보다 장편<미쓰 홍당무>에서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재치 있는 상황 설정이 참 많았다. 특히 어학실에 다 모여서 벌어지는 상황은 이상하고 독특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좋았다. 그런 아이디어는 평소에 어떻게 얻는지.

인물들이 한번 다 모였으면 좋겠는데 어디가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걔들이 모였을 때 재밌는 공간이 어딜까 하고 고민하다가 어학실이 나온 거다. 미리부터 어학실이 갖는 메타포가 이럴 것이고 저럴 것이고, 하는 생각은 안 했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이야기가 잘 안 풀리면 지금까지 내가 쓴 걸 다시 본다. 정답은 그 안에 다 있다. 내가 뿌려놓은 씨앗에 다 있는 거다. 나는 창작이란 작업이 굉장히 놀라운 무의식의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미숙이의 삽질만 해도 그렇다. 뭘 하는 척하면서 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래서 고른 게 삽질이었고. 근데, 그래놓고보니 이 캐릭터랑 삽질이 정말 잘 맞아 떨어진 거다. 그런데 그게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나를 컨트롤 하는 게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르면 그에 대한 상상이 저어 앞까지 나가게 된다. 그러다보면 야망이 커지고 벌써 수상소감까지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릴렉스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힘이 많이 들어가면 더 괴롭다. 힘 빼야 한다. 심플해야 한다. 





  감독님 단편<잘 돼가 무엇이든>을 보고 좋아서 시나리오를 베낀 적이 있다. 반복해서 쓰다보니까 구조가 참 탄탄하다고 생각했다. 캐릭터가 뛰어난 것도 있지만 구조도 잘 짜였다. 구조를 짜는 개인만의 팁이 있나.

아까 말했듯이 뿌린 씨앗을 잘 거두는 게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높인다. 다시 무의식을 얘기하게 되는데, 처음 그 단편을 만들 때 생각한 건 "서로 되게 싫어하는 애들이 매일밤 같은 책상에서 일해야 한다" 는 거였다. 그런데 지나고보니까 지영이의 어두운 내면이 밤에 일한다는 상황설정과 맞닿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 


  <잘 돼가, 무엇이든> 에서 -왜 칼을 몸에 품고 다녀? 대사가 나오는 꿈 장면이 있다. 직접적이고 튀는 장면인데?

스텝들은 다 빼자고 했다. 근데 난 오히려 강하고 직접적이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톤으로 가면 지루하다. 한번 탁 튕겨서 변주하면 환기가 된다. 여담인데, 그게 직접 꿈 꾼 장면이다. 시나리오가 하도 안 풀려서 낮잠을 잤다. 근데 그게 나왔다 꿈에. 그걸 쓴 거다. 심사위원들도 그 장면을 엄청 좋아하더라. 그 이후부터 나는 뭔가 막히면 잔다. (웃음)





  <미쓰 홍당무>의 미숙이 캐릭터로 상업영화를 찍은 게 신기했다. 감독이 정말 매력을 느끼지 않으면 갖고 갈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에게 미숙이 같은 면이 있는지? 또 같이 작업한 사람에게 캐리터에 대한 설명을 계속 해야 했을 것 같은데.

내 안에 없으면 미숙이란 캐릭터도 나오지 않았겠지. <미쓰 홍당무>의 미숙이나 <잘 돼가, 무엇이든>의 지영이나, 내 안에서 남에게 보이기 싫은 것, 느끼곤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그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게서 재밌어 하는 점은 영주나 유리에게 넣고 있더라.

내가 미숙이를 끝까지 놓지 못 한 건 연민이다. 한없는 연민. 그건 내가 나에 대해 갖는 연민이기도 하다. 내안에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불쌍한 나. 그걸 굳이 꺼내고 싶었던 건 그게 나한테만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마 부끄러워하면 어두운 게 되는거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 하는 미숙이, 왕따당할 인물, 그래서 더 상업영화에 끌어와야겠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꼭 지키고 싶었던 건 '비호감'을 유지하는 거였다. 애초목표였다. 비호감을 호감으로 전복시키는 건 내 애초의 의도와는 달랐다.

스탭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프리 때부터 다들 미숙일 너무 좋아했다. 10억으로 찍었다. 심각한 저예산이었다. 근데 나는 천 만원으로라도 찍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에 꽂힌 사람들만 스탭으로 온다. 그래서 저절로 미숙일 다 알았다. 모두다 미숙이 흉내를 냈고, 우리 미숙이 우리 미숙이, 했다.
우리 영화를 끌고 간 건 '미숙'이었다. 공효진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랬다. '미숙이 쟤는 살아있는 것 같다'고. '감독님, 쟤는요... 하면서, 자기가 연기해놓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하더라. 


  미숙이를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이 있었다. 얘가 계속 비호감을 유지했으면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바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 병원 씬에서 하나도 안 변한 모습에 어이없으면서도 그래서 또 좋았다. 

그 씬이, 영화에 사용된 장면의 전 테이크가 오케이였다. 근데 공효진이 한번 더 하겠다고 했다. 그리곤 지금의 그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어학실에서 미숙이가 불쌍한 얼굴로, '포기하겠습니다' 하는 장면이다. 그것도 공효진이 한번 더 가겠다고 해서 나온 장면이다. 배운게, 내가 쓴 캐릭터를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란 거다. 어느 순간 배우 것이 되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더라. 





직장 생활을 하다 뒤늦게 영화를 시작했다. 힘든 점은 없었는지

영화학교 갔을 때 내가 여자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았고 남녀 통틀어서도 두번 째로 많았다. 일단 조작업을 해야 하는데 남자들이 어리고 예쁜 여자들만 찾더라. 어떻게든 껴서 같이 작업을 해야 하니까 나도 쓸모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무거운 장비를 번쩍번쩍 들었다. 
배수진을 쳤다. 내가 여기서 중간에 포기하면 정말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콘티도 모르는데, 타르코프스키 얘기를 하니까 죽겠더라. 미디엄샷이 뭔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다. 너무너무 급했다.

그땐 죽을 것 처럼 찍었다. 일주일에 한편씩 찍어야 했는데, "언니 이거 찍고 죽을거야?" 란 얘기도 들었다. 코앞이 너무 급해서 일단은 말을 알아듣고 실습하는데 급급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영상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중요했다. 매주 살풀이를 했다. 목에 잔뜩 든 머릿카락 뭉치를 쭉쭉 뽑아내는 것 같았다. 

  내가 표현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것 같다. 어릴 땐 연극배우 하고 싶었는데 못 했다. 싸울줄을 몰라 시키는대로 다 따르기만 했다. '순응의 28년 역사 후' 영화 만들면서 매주 살풀이를 한 거지. 나는 연극하고 싶은데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했다. 한 때는 끓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못 봤다. 그러다가 종교에도 빠졌다. 수녀가 되겠다며 매일 성당을 갔으니 오죽했겠나. 표출을 못 하니까 오히려 숨기는 쪽으로 간 것 같다. 영화 일 하기전엔 몸도 많이 아팠는데, 영화 하고 부터 싹 다 나았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이리도 중요하구나 싶었지. 그래서 따라오는 고난은 다 내 팔자다. 회사 다니면 돈 걱정을 했겠나. 이런 걱정은 세트인 거지. 양미숙과 이유리의 관계처럼. 


  감독님 다음 영화 계획은?

 요즘 너무 괴롭다. 근데....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여러분 <미쓰 홍당무> 손익분기점 넘겼어요!" (감독님 강조) 다들 못 넘긴 줄 알더라. (웃음)
두번 째 작품은 상업적인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이건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접점"을 찾고 싶다. 내가 상업적 성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접점을 찾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관객이 돈 주고 봤을 때 아깝지 않으면 좋겠다.
2년 전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서 투자자 파워는 더 강해졌다. 그 안에서 접점을 찾는 게 피흘리는 일일 것 같다. 마음을 다잡고 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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