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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01 담배불 피하는 내 구두코.


길을 한참 걷다 발끝 10센치앞에 불이 붙은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반사적으로 성큼 건너 뛰었다
문득 어릴 적 기억난다
초딩 때 나의 취미는 담배꽁초 불끄기였다 그 외 쓰레기 줍기
눈에 보이는 불 붙은 담배꽁초엔 필사적으로 달려 들었고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담배꽁초만 보면 불 붙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딱히 사명감이 있었다기 보단 불이 날까 싶어서였다
뿐만 아니라 쓰레기 줍기, 절대 길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건 당연하고
버려진 쓰레기도 주울까 말까 늘 고민하며 걸어 다녔다
같이 걷는 친구가 하드 봉지를 버리면 한참 걷다가도 다시 되돌아가 주워오기도 했다
'길 거리에 버리지마'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역시 누가 표창장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함부러 쓰레기 툭툭 버리는 게 싫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DJ언니가 '가끔 한번 풀어져보세요. 늦은 밤 아무도 안볼 때 들고 있는 쓰레기를
바닥에 버려본다던가 하는 걸로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그 말에 혹해서 밤에 나가선 과자 한 봉지 낼름 먹곤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쓰레기를 휙 버리곤
내달려 집으로 뛰어오기도 했다

강박증이었던가 여하튼 그땐 남이 안 끈 불도 잘 끄고 다녔는데 이젠 내 책임이 아닌 일들은
피하게 된다....는 걸 느낀다
이제 길 거리에 쓰레기 버리지 말라고 한다든가 역시 초딩 때 반나절 그네에 앉아선
동네꼬마들 싸움 말리며 싸우지 말라고 소리치던 오지랖도 없다 내 상관할 바 아니니까

어릴 적 순수하고 유머러스한 강박증이 사라졌다는 건 아니다
강박증은 여전한 채 그 대상을 달리할 뿐, 중요한 건 그 강박증이 내 안에만 갇혀 있다는 거다
나 자신에게만 더 엄격해 졌다 내 안전 내 생활 그런 것에만.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하지 않는 삐딱한 자유로움을 얻었지만
그 자유를 볼모로 그만큼 나는 교묘히 나를 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하고
내가 막막한 것들을 하지 않으면서.
발갛게 심지 붙어 있던 담배꽁초를 더 이상 끄지 않는 건
내 신발에 담배빵 날까봐 그리고 불이 나도 내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 먹을수록 뭐든 나아지는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향수를 뿌린 날이다.

별 거도 아닌 담배불에 뇌 굴리기는, 그러게 그런데 오늘따라 불 붙은 담배꽁초를 피해가는
내 구두코가 워낙에 인상적이었거든.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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