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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6 온기

온기

일상 2009. 4. 26. 23:03


두 시간째다. 벌써 두 시간째다. 평일 오후,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는 나는 책에 얼굴을 파묻은 채 두 시간째 소변을 참고 있는 중이다. 오른쪽 옆자리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나는 여태 다리를 달달 떨어가며 화장실 가는 걸 참고 있다. 뭐 늘 그랬다. 어릴 적부터 줄곧 그랬다. 웃기면 웃으라지만 소변참기는 세상에 대한 나의 소박한 저항이었다. 아무리 강인한 자도 생리현상 앞에서는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는 걸 알게 된 어릴 적 난, 똥오줌을 잘 참으면 진짜 강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참을 수 없는 걸 참아가며 키운 내 반항심이 지금의 내 삐뚤어진 고집을 키운 것 같긴 하지만.  

엄마는 방 안에 앉아서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딸을 볼 때마다 “자꾸 그러다보면 몸에 돌 생긴다”고 달랬다. 그래도 못 들은 척 양반다리 하고 앉아 다리를 달달 떨고 있을라치면 참다못한 엄마는 꽥 소리를 지르고는 달려와 머리를 쥐어박곤 했다. “이 미련한 년아.”

엄마는 몰랐다. 그저 딸년이 지독히 게으른 줄로만 생각했겠지. 진심을 얘기해봤자 이해받지 못할 거라 생각한 어린 나는 귀찮은 것보다는 오해가 낫다고 생각하며 그냥 몇 대 맞고는 화장실로 끌려갔다. 그런데도 오줌 참는
버릇은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렸다. 일상의 지루한 습관적 저항으로.

‘몸 안에 돌을 모을 테야. 거른 체 위에 걸린 알갱이들이 자글거리듯 배 안에서 돌들이 구르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돌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나는 강해졌다.’    

아까 점심대신 마신 우유 탓인가. 오줌의 비릿한 내가 코끝까지 올라오는 듯하다. 미련한 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선다. 최대한 침착하게 걸어가서 변기에 사뿐히 착지하리라. 침착하고 재빠르게 걸어간다. 화장실로 가는 길 창문 너머 아직 꽃을 튀우지 않은 벚꽃이 눈에 들어온다. 입을 앙다문 모양새를 보니 꽃 피우기 싫은 게다. 풋 하고 웃음을 날리곤 재빨리 스쳐지나간다. 그래 너도 오죽 하겠니. 오줌보 터지겠는데도 오줌을 쥐어 참고 있는 나나, 늦봄인데도 그러고 있는 너나. 가끔은 꽃들에게 봄은 폭력이다.    

두 칸 밖에 없는 화장실엔 이미 여럿 줄을 서 있다. 화장실 밖에서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은 오줌도 화장실에 한발 디디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발가락 끝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저릿한 순간이리라.    

줄선 화장실 칸에서 빨리 나오지 않는 년이 원망스러워진다. 몸을 웅크리곤 한 주먹을 들어 화장실 문을 쿵 하고 치자 이내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 여자가 나온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세면대로 간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급했다는 나의 절박한 얼굴을 보여주려 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가다니. 난 숨 한번 크게 쉬고는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재빨리 바지를 내린다. 다리를 비비 꼬며 꼭 이렇게 허둥대는 찌질한 내 모습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싶어 낄낄거린다. 이런 걸 쇼라고 하는 거지. 나를 위한 쇼.    

들이쉰 숨을 크게 내쉬며 소변을 보려던 찰나, 그러니까 참고 참았던 오줌을 시원하게 내보려는 순간, 뜨뜻하다. 엉덩이가 뜨뜻하다. 모든 감각은 정지하고 촉각만 남은 듯하다. 온기 때문이다. 살을 맞대는 듯 변기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앞서 나간 여자의 온기인가보다. 그 여자, 오래도 앉아 있었구나 싶다. 플라스틱 변기로 전해지는 온기라. 촉감의 관음증처럼 수치스러우면서도 수치감에 앞서는 이 그리움은 뭔지.    

그러고 보니 소변보는 것도 잊고는 그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쭉 빠지며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오줌의 온기가 쑥 빠져나가면서 생긴 한기에 푸드득 몸을 떤다. 아까워할 새도 없이 몸의 열기에 순식간에 휘발돼 버린다.

변기의 온기도 이미 식었다. 그런데 일어나지도 않고 나는 한참이나 그러고 앉아 있었다. 부끄럽겠지만 누군가
노크를 하면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몇 분을 앉아 있어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더라. 다리가 저려오는 것 같아 그냥 일어서 나와 버렸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니 풍선 바람 빠진 듯 쪼글한 얼굴이 봄 햇살에 하얗게 지워졌다.   

저 멀리 비둘기는 채석장으로 가선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열람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은 나는 다시 오줌을 채우며 몸을 데운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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