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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17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감독 유영길
 


저녁 6시 40분 서울아트시네마. 난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선 커피우유에 빨대를 꽂곤 신나게 마신다. 그리곤 영화 포스터에 자질구레한 소식지들을 잔뜩 집어와선 정신없이 읽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 편 의자에 배우 안성기가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있다. 눈이 마주쳤는데 너무 놀란 표정을 지어 버렸다. 웃긴 건 안성기를 보는 순간 ‘어찌 저리 이쁘게 잘 컸을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아역배우로 줄기차게 자란 그에 대한 이미지가 컸다 보다.
촬영감독 유영길 회고전 개막식이라 그런지 감독, 배우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영진위 위원장은 훌륭한 촬영감독 회고전 개막식에 많은 영화인들이 오지 않은 것을 섭섭해했다. 그러니 일찍부터 찾아와서 자리를 채우고 있는 안성기가 새삼 좋아지더라.
사실 난 촬영감독의 존재에 대해 별 의식이 없었다. 결국 영화라는 것은 촬영을 통해 영상으로 구현되는 것인데 말이다. 카메라 뒤엔 늘 촬영감독이 있었다. 그래서 촬영감독들의 사진 중에선 얼굴이 온전하게 보이는 사진이 없다고 한다.

 

7시, 개막식이 시작됐다. 다른 축사 무엇보다 유영길 감독의 부인이 기억에 남는다. 무대에 올라와 말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울음 섞인 목소리였던 부인은 남편에 대한 긴 얘기 대신 언젠가 신문에서 보고 오려둔 칼럼을 읽겠다 하셨다. 영화 강의 시간에 한 여학생이 영화 스텝들의 극빈한 생활을 보고와선 울었다는 얘기로 시작되는 글은 위험한 영화 촬영 때 아무도 나서고 있지 않은데 유영길 촬영감독이 몸을 던져 자신이 직접 스턴트맨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 그렇지만 촬영감독을 비롯한 영화 스텝들은 늘 뒤에서 묵묵히 갖은 고생을 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없이 부족한 금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배우 황정민의 수상 소감처럼, 잘 차린 밥상을 배우들이 맛있게 먹는 것이 영화 촬영인지도 모른다.

아트시네마에서도 촬영감독 회고전을 여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란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일일 것이다. 관객들은 쉽게 소비하고 말 뿐인 한 편의 영화에 담긴 스텝들의 땀과 열정.
워낙 말이 없던 남편에게 해준 것은 밥 밖에 없는 것 같다며 눈물 짓던 감독의 부인. 그리고 그녀가 읽어내린 칼럼을 통해 짐작되는 넉넉지 못했을 그들의 생활. 그 그림자.

개막식 상영작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 서투르지만 난 영화를 어떻게 촬영했고 그의 영상미학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며 내내 그의 카메라 뒤에 서있으려 했다. 개념조차 없는 문외한 관객이지만 그런 작은 의지들이 자꾸만 날 영화보게 하는게 아닐까.
내가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림자. 빛이 너무 많아 그림자였다. 그래서인가. 회화같은 장면들이 많아서 좋았다. 말 그대로 풍경화. 날 좋은 날 그늘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면, 햇빛에 따라 다른 색깔을 가진 나뭇잎들을 세세하게 표현하고 그림자까지 표현해서 입체감 살리기에 열중했었지-

유 감독은 빛에 대해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허진호 감독이랑 맥주 한잔을 할 때도 내내 말이 없다가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선 벌떡 일어서서 허감독, 저 자동차에 비치는 불빛을 보라고 할 정도로 빛에 빠져 있던 사람. 쓰레기통을 보고서도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하던 빛에 예민했던 촬영감독.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화면들은 빛이 아주 많은데 그것이 사물의 희게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촘촘히 들어앉아 있었다. 빛의 배려를 담다. 그리고 그만큼 사물들의 그림자도 풍성했다. 숱이 많아 여름 바람에 크게 울렁이는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진한 그림자처럼.



유독 사물과 사물을 매만지는 손에서 풀샷으로 이어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많더라. 그래서 잠시라도 사물의 표정에 천착하게 될뿐더러 무엇보다 사물을 매만지는 손길에 집중하게 됐다.
내겐 배두나나 심은하가 그렇다. 손매무새가 너무 예뻐서 그녀들의 행동을 보면 꼭 집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싶어진다. 야무지게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싶어진다. 영화에서도 정원이 채소를 뽀득 씻고 있거나 다림이 아이스크림을 떠먹을 때 그리고 손수건으로 캔 뚜껑을 야물게 닦아선 정원에게 내밀 때나 그럴 때, 자꾸만 손매무새에 눈길이 간다.



영화 말미에, 행위는 지속되는데 시공간만 바뀌는 장면이 계속 생각난다(정원은 계속 사진첩을 넘기고 있고 시공간은 자연스레 이동한다. 사진첩을 클로즈업했다가 뒤로 빠졌을 때 바뀌어 있는 시공간) 그것은 한 테이크일까 몽타쥬일까. 이런 엉뚱한 생각도 떠오르고 말이다. 기술상으로는 연속편집한 몽타쥬이겠지만 행위와 시공간이 분리되는 그 장면이 왜 자꾸 떠오르는 것인지.
인간의 행위는 시공간과 분리될 수 있는가?
시간이 흐르니까 인간이 변하고 죽는 것일까. 인간이 변하고 결국 죽으니까 시간은 흐른다는 것일까. =_= 가령 '눈이 내리니까 니가 보고싶다' 와 '니가 보고 싶으니까 눈이 와.' 이것은 아주 느낌이 다르잖아. 이것은 결국 시공간 탈주에 대한 내 욕망인 것인가. 여튼 정리되지 않은 뭔가가 징그럽게 머리에 붙어 있는데 표현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카메라를 통해 구현해내고- 그 구현해낸 영상 속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또 담겨 있다. 카메라가 담아 낸 보이지 않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게 될 때 나는 영화의 맛을 더 알아갈 지 모르겠다.


바람 타고 여름 햇빛 한껏 들어오는 버스 안. 정원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는 노래.
산울림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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