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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billy

2010.09.15 00:30


                                                                             




보네거트, 제 5도살장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이것은 "생에 대한 열정이 없음에도 그런 대로 살아가게 해 주는 방법을 표현한 기도문", 이라고 보네거트는 말한다. 이 기도문은 검안사인 빌리 필그림의 진료실에 걸려 있다. 그는 미군으로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직전 그는 독일의 드레스덴에 포로로 잡혀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던 도시, 드레스덴이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모습을 본다. 그는 운이 좋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어쨌든 죽는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렇게 가는 거지'

빌리 필그림이 체험했고, 빌리 필그림을 창조한 보네거트가 직접 겪은 이야기. 너무나 재밌고 슬픈 반전(反戰) 소설이자 인생을 말하는 소설, 내겐 너무나 진리인 이 소설.  

왠지 웃긴 뭐한데도 너무 재밌는 상황과, 문장과 문장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엉뚱함에 실실대고 낄낄 거린다. 아이고 그런데 왜 이렇게 슬퍼? 주인공에 몰입할 심리묘사가 딱히 섬세한 것도, 전쟁을 겪는 주인공의 상황이 비극적으로 그려진 것도 아니다. 웃는 지 우는 지 모를 묘한 표정을 한 소설, 아무래도 나는 울고 싶은데 아무래도 울면 안 될 것 같은 기운에 책을 읽다, ‘작가가 선사하는 슬픔에 흠씬 젖어보라’ 는 누군가의 한 마디에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물이 뚝-.


음매 하는 울음소리에 아기 예수 잠이 깨요. 그래도 어린 주 예수 울지 않아요.

울 만한 일이 종종 있어도 거의 울지 않았던 빌리. 빌리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사람' (그래서 더욱 골똘해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 . 옆에서 대신 울어줄라치면 모나리자만큼이나 미묘한 미소를 슬쩍 던져버릴 사람. '우연이 허락해주어' 드레스덴 대공습 때 살아 남고 어찌저찌하여 결혼하고 꽤 돈도 벌고 자식도 낳으며 그럭저럭 살아간 사람.

그런 그에게 아무래도 비밀이 있으니 그건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처음 시간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했다.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라고 마르고 허약한 몸으로 전장을 헤매던 그에게 신이 내린 위로 같은 것. 과거, 현재, 미래 일직선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한데 모두 펼쳐진 과거현재미래를 여기저기 여행했던 사람, 전쟁터에 있다가도 미래 신혼생활의 침대 위로 옮겨 갔다가 느닷없이 과거의 갓난아기 때로 이동하곤 한다. 그래서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꼭 그 곳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사람. 또 하나 비밀은, 아마 지구인은 모르는, 아니 몇몇 지구인은 알지도 모르는,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의 생활. 외계인에게 납치된 그는 그곳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인간 동물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생활, 트랄파마도어의 삶.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은 빌리에게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그렇게 되도록 구조 지어져 있으니 전쟁도, 우주의 멸망도 피할 수 없다고. 그러니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라고’ 그리 권한다.

"트라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생의 행복한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불행한 순간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충고한다. 영원이란 놈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빌리에게 이와 같은 선택적 집중이 가능했더라면, 그는 마차 뒤꽁무니에서 햇볕을 듬뿍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그 순간을 생애에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택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빌리의 무기력함에, 트랄파마도어 외계인의 허무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태도에-, 나는 아아무런 반발심도 어어떤 얄미움도 들지 않는다. 이 모든 걸 다 받아들이고 오래오래 품으며 살겠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내게 온기가 있다면 뭔가를 세상에 피울 수도 있으려니, 그러려니, 그러면 충분한 것. 딱히 이 지구를 긍정하지도 특별히 내 삶에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살아가겠다. 다시 한 번 위의 기도문을 읊조리며, 그래서 내게 이 책은 더 없이 강한 반전(反戰) 소설, 나는 아니까, 빌리는 2차 세계대전의 현장에 있었다.

울 만한 일이 종종 있어도 거의 울지 않았던 빌리. 유일한 단 한 번의 울음. 드레스덴 폭격 이후 그는 마차 뒤꽁무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그러다 소리에 잠을 깬다. 눈 앞엔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인 부부, 그들은 마차에 매인 말들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을 느낄 정도로 말굽이 깨진대다, 갈증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빌리는 영어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즉시 영어로 말들의 상태를 두고 그를 꾸짖었다. 그들은 빌리에게 마차에서 내려 말들을 살펴보게 했다. 그 교통수단의 상태를 본 빌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 전쟁에서 다른 일로는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빌리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후 터진 울음. 그 때 나는 빌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정든 빌리에게.
싶지만,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쉽게 전할 수 없고, 섣부른 위로도 믿지도 않는 충고를 하고 싶지도 않다. 사실 내가 위로를 받고 싶은데 뭐라 타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늘 그랬다. 말을 나누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지구가 별로라는 것도 알 것 같다. 대신 나는 그가 낮잠을 자는 동안 어떤 꿈을 꾸었을까를 상상해 본다.

하나의 커다란 농담 같은 이 소설 안에 무심한 척 건네는 진담들. 그리하여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난 보네거트가 너무 좋다.

빌리와 포로들은 이리저리 다니다 가로수 길에 이르렀다. 나무들에 잎이 돋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아무런 통행도 없었다. 탈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말 두 마리가 끄는 버려진 마차였다. 마차는 녹색이었고 관처럼 생긴 것이었다.
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물었다. 
 
"짹짹?"  




  저 멀리 어디쯤에서 기저귀를 갈며 웃고 있을지도 모를 보네거트에게 경외를. 혹시 트랄파마도어에서 멋진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를 보네거트에게 사랑을. 아, 아무래도 평화로이 낮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다.    그에게 휴식을.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