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장 앞에서

일상 2024. 3. 3. 18:44

나는 카메라를 그만 내린다. 그리고 고향집에서 챙겨온 내 오래된 옷을 가방에서 꺼내 트럭 위로 올라간다. 여전히 가뿐 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이는, 많이 고통스러운지 몸을 뒤틀며 몸부림치는, 눈앞의 이 어린 돼지를 옷으로 감싼 뒤 뒤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태어나 6개월이면 죽임 당하는 돼지의 크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주 아기는 아닌, 다행히도 내 품에는 꼭 맞는 이 돼지를 도살장의 계류장으로부터 도피시킨다. 도망친 곳은 도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의 작은 화단. 흙 위에 그를 눕힌다. 돼지를 치료해야만 한다. 살릴 수 있을까. 받아 줄 동물병원이 있을까. 이런 구조는 돼지의 고통을 연장시키기만 하는 게 아닐까. 이제 어째야 하나.

아, 여기서 상상이 더 이어지지 않는다. 상상해. 예상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2분째 내 폰에는 죽어가는, 아니 아직 죽지 않은 어린 돼지의 모습이 녹화되고 있다. “돼지 아직 살아 있어요” 나는 트럭 위를 올려다 보며 말한다. “죽었어”. 잘못 들은 걸까 의심하는 사이 트럭 위와 계류장을 오가던 장화들은 사라지고 없다. 살아 있는데, 그것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왜 죽었다고 말하는 걸까. 전쟁터 같다. 죽은 시체와 아직 살아 꿈틀대는 몸들이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어 있는 곳. 사실 보고 있는 이 순간 심한 동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런 장면은 이미지로 접할 때 마음이 더 괴롭지 정작 현장에서 보고 있을 때는 사진과 영상으로 볼 때 만큼 괴롭지는 않더라. 그래서 반대로 이미지의 힘이 강력하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 보고 있는 이 돼지의 고통이 내 몸에 영원히 각인될 거라는 건 알겠다. 죄책감, 무력감과 함께.

자루 안에 돼지들이 담겨 있었다. 어떤 돼지는 하체가 밖으로 나와 있었고, 몸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아직 죽지 않았다. 아니, 아직 살아 있다. 그 위로 자루에 담기지 않은 검은 돼지가 눈을 뜨고 있었다. 돼지의 눈은, 돼지의 눈은, 돼지의 눈은… 친구의 말대로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눈” 같다. 온몸이 젖어 있다. 양돈장에서부터 이미 죽어 가는 어린 돼지들을 아무렇게나 담아서 도살장에 보낸 걸까. 아니면 이곳에 와서 무슨 일을 당한 걸까. 여기까지 이동시간도 길었을 텐데 이 상태로 계속 버텨야 했던 걸까.

죽은 돼지의 등에서 엉덩이로 내려가는 동그란 곡선이, 트럭 난간에 얹어진 돼지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마치 곤하게 자고 있는 내 반려동물의 모습과 같았다. 그 이미지가 겹쳐지자 일순간 마음이 찌르듯 아팠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비슷해서 더 연민을 느끼는 내 감정은, 인간의 심리는 되도록 존중하지 않으려 한다. 접촉면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도.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이 돼지의 몸은 인간의 몸과 다를 게 없지 않냐고. 너무 비슷하다고. 이 몸들에서 엄청난 괴로움이 발생하고 있다.

다시 이곳에 왔을 때 그 사이 돼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소독을 위해 계류장의 입구마다 수시로 물을 분사하고 있었다. 물의 압력에 밀린 걸까. 몸부림치다가 떨어져버린 걸까. 아까 눈을 뜨고 있던 그 돼지일까. 트럭 기사와 직원들이 없는 틈을 타 빠르게 다가가본다. 눈에서 피가 흐른다. 아직 살아서 몸을 떨고 있다. 하필 땅에 물이 고인 자리에 돼지의 코가 닿아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 안 되겠다. 몸을 밀어서 옆으로 옮겨주자. 옮겨주자. 옮겨주어야 한다… 차마 손으로 못 하겠으면 발로라도 해주자. 그런데 지금 코에 물이 닿는 고통을 없앤다고 이 돼지에게 어떤 도움이 되나. 차라리 빨리 죽는 게 그로서는 고통을 그만 멈추는 길 아닌가. 그런데 대체 이 도살장이라는 곳은 뭐하는 곳인가. 동물을 죽이는 곳. 그래, 죽이는 곳. 죽이는 게 왜 이렇게 쉬울까. 왜 이 동물들의 목숨값은 이리도 하찮은가.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은 예외 상황도 아니잖아. 매분 매초 벌어지고 있는 축산업의 현실인데. 인간이 만들고 묵인하는 시스템인데. 지난 한 달 간 국내에서만 2백 만 명의 돼지를 도살했다. 내가 본 돼지와 같은 도태된 동물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도살장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익숙한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왔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벽 너머로 거대한 학살이 벌어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에 조금 현기증이 났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너무 무겁고, 동물들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 가볍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야 눈물이 푹푹 났다. 몇 년 전 생각이 났다. 다른 지역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늦은 밤에 사람들과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괴기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었는데 그건 발정 소리는 아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고양이를 무서워해서 우리는 빠르게 그 거리를 지나갔다. 마음이 계속 쓰였던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그곳에 다시 갔다. 골목 한 쪽에 누더기가 된 고양이가 웅크린 채로 있었다. 밤새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쳐다보자 울었다. 몰골이 너무 참혹해서 나는 오히려 물러났다. 골목 반대편에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사진 한 장만 찍고 돌아갔다. 구조를 해서 치료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오늘도 중요한 촬영을 해야 하고 그렇다고 지역의 캣맘들에게 연락할 여력도 안 되고 등등... 결국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서 울었다. 촬영도 잘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그 고양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가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로 아픈 고양이들을 더 지나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자루에 담겨 뒤엉켜 있던 돼지들은 작은 포크레인에 실려 육가공 공장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집에 가려다 못 가고 또 다시 들렀을 때 그걸 보았다. 돼지들이 실린 포크레인 버킷 위로 팔락거리는 귀가 보였다. 슬프게도, 바람에 흔들리듯 살랑거리는 그 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삶 사는 동안에도 좁은 시설에서 온갖 소음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귀.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로만 인간에게 소비되는 돼지의 몸이 한때 분명 살아있었고 살고 싶어했던 존재라는 것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살아있는 축산(피해)동물의 몸, 인간의 이익을 위해 무수히 죽임 당하는 그들의 몸이 더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

https://youtu.be/DbS8Y9QH9eU?si=rTy4dcvgWhKpyX-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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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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