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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17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2)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떤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떄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차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알람 없이 새벽의 희미한 햇살로 잠을 깨는데 익숙해질 즈음, 그렇게 깨고도 한참이나 가만히 누워 있는 걸 즐기게 된 여행의 날들하고도 어느 아침, 이 시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었었다. 중얼중얼 조그맣게 소리내어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고 겨우 마저 읽었을 즈음엔 이미 코가 꽉 막혀있었다. 침낭으로 다시 깊숙이 들어가 얼굴을 파묻고 마저 펑펑 울었다. 여행의 허세였을 법도 한데, 아마 그때부터인가, 이 시를 읽으면,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특히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에 오면 앞서 얼굴을 뱅글뱅글 돌던 눈물이 코끝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나를 나이게 하는 무수한 것들이 이 말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내가 그러하지 않으려 해도. 그리고 숱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까지. 비슷하게 그러할 거라는, 꿈꾸어도 좋을.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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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20 1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를 나이게 하는 무수한 것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해도,
    그것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만은 말아요.
    그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거,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사는거,
    그치만 역시 그러하지 않으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