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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여행 2013. 11. 25. 00:43

 

다섯시 반이면 해가 질 거야. 그가 일러준 일몰 시간 만은 내내 유념했다. 나름 부지런히 걷는다고 걸었는데 어느새 다섯 시였다. 꽤 오래전에 0.5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았고 그때부터 쉬지 않고 올랐으니 곧 대피소에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가파른 오르막길, 눈에 발이 깊이 빠지는 길을 계속 올라야 했고, 흩어지지 않고 얼굴 주위를 맴도는 숨소리만 들렸다.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문득 몇 걸음 전에 표지판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내려갔다. 0.2km. 내가 도착해야 할 대피소까지의 거리. 그런데 화살표가 아래 방향이었다. 응? 숨소리가 달아나고 정신이 좀 들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표지판에 쌓인 눈을 장갑으로 슥슥 털어내고는 다시 한번 보았다. 화살표 방향이 아래쪽이었다. 일단 생각했다. 오는 길에 대피소가 있었던가. 없었다. 못 봤다. 힘이 들고 위험해서 땅만 보고 올랐다지만 사람의 기운을 느낄 만한 공간은 없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꺼져 있었다. 왜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반 이상 배터리가 남았던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전원을 다시 켜자 초기 화면이 뜨더니 바로 다시 꺼져버렸다. 날이 차서 그런가싶어 내복에 대고 문질러보았다. 이젠 켜지지도 않았다. 급하게 임시 충전기에 꽂아두고 입구에서 얻은 지도를 꺼내보았지만 이것 역시 조악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시 장갑을 뺀 사이 손이 많이 시렸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다가 마음을 정했다. 정해야 했다. 유난 떨지 말고 오르던 길을 마저 오르자. 어쨌거나 어떻게든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오분 가까이 걸었다. 그 사이 하얗던 눈이 어둑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걸음을 멈췄다. 이 길이 대피소가 아닌 정상으로 바로 오르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토끼 발을 하고서 높은 곳을 올려다봐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 시커먼 산의 형상이 점점 더 커지며 눈을 예민하게 했다. 나를 가장 조급하게 했던 사실은, 랜턴이 없다는 것. 곧 해가 진다. 길을 잘못 들었다간 초행인 이 산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다시 오르거나 내려가거나 선택해야 한다. 평소 자주 고민하던 선택의 문제, 가 아니라 이건 그냥 선택이다. 내려가자. 대피소는 아래에 있을 것이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눈의 깊이를 가늠해볼 스틱을 쓸 여유도 없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낭떠러지로만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또다시, 멈추었다. 내 선택을 믿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를 믿지 못하겠다. 못 믿는다. 여전히 휴대폰은 켜지지 않았다. 가방 더 깊숙한 따뜻한 곳에 집어넣었다. 의지할 건 이 폰 뿐이라 해도 영영 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기대하지 말자. 그러고 얼마 동안 꼼짝도 않고 눈 앞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무의 외곽선을 따라 그릴 수 없었다. 선이 공기에 뭉개질 만큼 이미 어두워졌다. 해가 졌다. 두 어 번 소리를 질러보았다. 저기요. 저기요. 스스로도 성의 없는 외침이었다. 성의가 생기지 않았다. 뭐 하나도 결단있게 할 수가 없었다. 시야도 잘 보이지가 않으니 이대로 하산한다면 눈에 푹푹 빠져 지치거나 길을 잘못 들어 오래 헤매거나 지쳐 앉아서 잠들거나, 그러다가 얼어 죽거나 운 좋으면 따뜻하게 아침 햇살을 맞거나 그럴 것이다. 그런 가능성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살고 싶다 혹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지금 와 보니 신기한 것 같다. 그럴 정신이 없었거나, 절박하지 않았거나, 나 말고 믿는 구석이 있었거나) 전방 몇 킬로미터 안에서 대피소 외에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산하는 몇 명만 보았을 뿐 이 등산로로 오르는 사람은 내내 나뿐이었다. 이곳에 폭설이 왔다는 기사가 전날 떴었다는 걸 후에 알았다. 그것도 모르고 올랐다. 정말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부터 그냥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어떻게든 되겠지. 계속 걸었다. 괜찮아. 오르다가 보았던 커다란 돌을 빨리 발견하자. 그 아래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긴 따뜻해서 괜찮을 거야. 반달곰만 만나지 말자. 이것도 경험이지. 그래. 그러는 사이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꺼졌던 휴대폰의 전원이 다시 켜지면서 나는 진동음이었다. 멈춰, 섰다. 그때부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장갑을 벗고 몸에 고정시킨 가방의 벨트를 풀고 바닥에 내렸다.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지도에 적힌 대피소 전화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불빛을 가까이 갖다대도 잘 안보였다. 정말 애를 써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휴대폰에 번호를 하나씩 찍는데 손이 떨렸다. 번호를 누르기 힘들 정도로 떨렸다. 보이지 않는 숫자 하나는 종이에 눈을 거의 갖다 붙이다시피 해서 대충의 예감으로 번호를 찍었다. 폰아 제발 꺼지지 말아줘. 신호가 갔다. 대피소입니다. 제가요 산을 오르다가 영점이키로미터 남은 표지판을 봤는데 아래쪽으로 내려가라고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르던 길을 다시 내려왔는데 이게 맞나요. 대피소가 어디 있나요. 상대방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지 몇 번 되묻다가 옆 사람에게 바꿔주었다. 제가 오르다가 이백미터 남았다고 봤는데 그게 반대방향인 거예요. 제가 잘못 가고 있나요. 아니 거기서부터 대피소로 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왔던 길로 그냥 와요. 많이 내려갔나요. 그러니까 그냥 계속 올라야 했던 거였다. 캄캄한 산길을 오르는데 발이 너무 무거웠다. 왜 이렇게 많이 내려왔을까, 속이 상했다. 열 걸음도 못 걸어서 지쳐 쉬고 조금 걷고 또 쉬며 올랐다. 다시 얼굴 주위에서 숨소리가 돌았다. 생에 내 발이 가장 무겁게 느껴진 때였다. 한참 오르는데 가파르게 높은 저 위에서 불빛이 흔들렸다. 걷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일렁이는 불빛이 좌우로 크게 움직였다. 내가 있는 곳까지 밝아졌다. 아니 아이젠도 없이 왔어요? 국립공원 직원인 그는 자신의 아이젠 하나를 벗어주었다. 그걸 신고 오르는데 오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불빛과 아이젠만 있었어도, 아니 불빛만 있었어도 내가 남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순간 이런 사치스런 생각을 했다. 혹시나 해서 내려왔다고 했다. 데리러 와달라는 말도 안했었다. 이젠 한 발자욱 떼는 것도 힘들만큼 다리가 무거워서 다섯 걸음도 못가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불빛을 비춰주며 뒤따라오는 분에게, 죄송합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빨리 못 가겠어요 하니까, 아니에요 여기선 남는 게 시간이니까 천천히 올라가세요. 남는 게 시간이라니, 그래 내가 무사하지 않았다면 이 밤이 얼마나 길었을까. 그렇게 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사무실 사람이 준 믹스커피를 마시는 순간 얼굴에 열기가 뱅그르 돌았다. 내가 기운이 좀 생기는 것 같자 한 직원은 그때부터 혼을 냈다. 일 년 동안 여기 오르는 이만 명 등산객 중에 나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18년 동안 일하면서 나처럼 표지판 잘못봐서 헤맨 사람은 처음이다. 챙겨야 할 등산용품, 알고 있어야 할 수칙들도 일러주었는데, 그래도 가장 따끔하게 이른 말이 이것이었다. 산에 오를 때는 특히나 이런 험한 산에 오를 때는 절대로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오르지 말라고. 그런 마음으로 주의나 대책 없이 살다가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는데 나는 그걸 또 잊고 지냈다. 쏟아지는 별이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눈이 와서 못 볼 거라고 했다. 믿지 않고 새벽 세시에 깨어 나가보았는데 역시나 못 봤다. 눈 때문에 꼭대기도 오르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다음날 기어코 꼭대기에 올랐다. 안 갔으면 후회할 뻔 했다. 설산이 정말 좋았다. 시야가 온통 하얬지만 눈 쌓인 산이 그냥 그대로 정말 좋았다. 운이 좋았다. 어쨌거나 운이 좋았다. 이제 이렇게 운에는 의지하지 않겠다고, 의연하게 반성했다. (2013. 11. 19)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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