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거기에 없다

일상 2014. 6. 7. 02:33
 
여기는 내가 늘 오는 선술집이다. 밤에 골목을 배회하다 우연히 찾았는데 멀리서 보이던 따스한 주황빛이 참 좋았다. 불빛을 따라온 이곳은 간판도 없이 주택집들 사이에 아주 작은 공간 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올 때마다 너댓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밖까지 배어나오진 않았다. 가게 앞엔 내가 앞다리를 높이 뻗은 것의 두 배는 될 법한 나무 상자들이 쌓여 있다. 난 항상 나무상자 꼭대기에 올라 술집 안을 구경한다. 나무상자는 꽤 널찍해서 내 큰 엉덩이가 앉기에 불편함이 없다. 사람이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늘 가게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밖으로 나와선 내 옆에다 생선을 주곤 했는데 내가 먹을 것 때문에 이곳을 찾는 건 아니었지만, 물론 먹긴 했어도, 어쨌든 나를 홀리는 건 이 안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좋다. 나는 들을 수 있다. 내가 당신들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도 들을 수 있단 걸 알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내 표정을 인간들이 보지는 못 할테니 아마 한 번씩 창밖의 나를 보며 고양이다, 귀엽다, 배가 고픈 걸까, 정도의 대화 안줏거리로 삼겠지만 말이다. 나는 안다. 여기는 숨길 것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걸.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이였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연인들. 나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고 또 슬프다. 낮에 좀 먼 데까지 나가 돌아다니다가도 어디 누워 낮잠을 자다가도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늘 새로웠다. 밤마다 나는 홀린 듯 이 술집 앞을 찾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이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슬픈 이야기를 매일매일 듣는다. (2012. 01. 19)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