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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7 우에노 치즈코_ ‘내셔널리즘과 젠더’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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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넘어서기 위하여
-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읽고








 역사의 수많은 경험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알게 되는 역사는 매순간 새로워진다. 이처럼 역사는 단선적이거나 일방통행하지 않는다. 수많은 물결들을 품고 있는 바다와 같다. 어떤 결들을 눈여겨보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역사를 볼 수 있다.

역사는 강자들에 의해 쓰여 진다는 암묵적 동의. 하지만 끊임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보지 않았던 역사를 생산해내야만 하는 건, 그런 역사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역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그 어느 것 하나도 ‘진리’ 인 역사는 없으며 매 순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재구성된다.

우에노 치즈코는 ‘내셔널리즘과 젠더’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을 ‘사실’로 바르게 위치시키는 것. 어떤 ‘사실’에 다른 ‘사실’ 이상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어떤 ‘사실’의 배후에 그것과 대항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 있음을 찾아내는 것 등은 그것을
   구성하는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저자가 취하고자 하는 관점은 무엇일까? 바로 ‘여성’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로 저자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국가’이다. 흔히 사적인 영역과 다르게 공적인 영역은 모든 가치 기준이 중립적인 상태라고 여겨진다. 국가로 환원될 수 있는 공적인 영역은 공공성이라는 이유로 용케 가치평가를 피해갈 수 있다. 예컨대 국책사업이라고 하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이런 국가가 피해간 잣대 중 하나가 바로 ‘젠더’이다. 저자는 명료하게 말한다. 
'국가는 젠더 중립적이지 않다.’  '국가는 중립성이라는 미사여구로 교묘하게 젠더화되어 있었다.' 국가는 근대화 프로젝트라는 미명 아래, 사적 영역의 여성들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 철저히 ‘국민화’ 시켰다. 그래서 젠더는 결코 사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공적인 영역으로 끄집어 내야 할 담론이다.

책의 저자는 근대국가가 여성들을 어떻게 전쟁에 동원했는지를 밝히고 보이지 않는 권력실체인 국가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그렇다면 여성주의 시각에서 국민 국가의 젠더성을 발견 했을 때 어떤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우에노 치즈코는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이러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그 대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국가를 초월한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국민화’된 ‘친일여성’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여성을 ‘국민화’시킨 근대화 프로젝트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한국에서 그 예를 한번 찾아 보았다. 일본인 저자가 모색했던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 여성'과 '일본 식민지 시절의 조선 여성'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에는 근대화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친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활란, 박인덕, 황신덕을 비롯해 최근 청연이라는 영화의 박경원까지. 이들은 일본의 전쟁 총동원 체제에 글과 말로써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비록 친일여성지식인들은 동시대의 문제마저 넘어선 남녀평등을 꿈꿨다 할지라도 국가주의라는 틀 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집단적 폭력에 가담하는 오류를 범했다. 자신들의 운동 배후에 ‘국가’라는 권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록 국가는 여성을 ‘국민화’함과 동시에 ‘여성의 지위향상’을 인정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졌을지는 몰라도, 국가의식을 공고히 하는 데는 큰 효과를 거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가부장제 패러다임으로 여성들의 입을 막다
 

 국가가 ‘여성’을 이용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작동한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는 여성을 어떻게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개인의 고통을 은폐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군 위안부 역시 그들이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기 민족 여자의 정조를 지키지 못했던 한국 남성의 ‘칠칠치 못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 ‘남성성’을 가진 ‘국가’의 의도적인 은폐였다. 여기서 여성의 ‘정조’란 남성 재산의 하나로써, 그 재산권 침해에 대해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이해가 계산되어 이야기되었을 뿐, 여성의 인격이나 존엄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해 피해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면서 고발을 막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 자신의 몸은 ‘나’이기는커녕 ‘나의 것’조차 되지 못한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재산이며, 국가의 재산이다.


위안부 여성들의 ‘개인 보상 청구권’, 여성 해방의 가능성 

 여성이 가부장제로부터, 국가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은 있는 것인가? 그 해방 가능성의 지점들이 바로 한국 여성이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개인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의 ‘개인 보상’청구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가에 예속된 여성의 몸을 분리시키는 것. 즉, 섹슈얼리티의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적 피해의 자기 인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섹슈얼리티의 자기 결정자로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여기서는 단적으로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자기 자신에게 속하며, 아버지 남편 등 가부장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체 의식을 수반한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해 왔던 그룹의 야마사키 히로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지금 어떤 여성이 강간을 당해 그 범인으로부터 남편이나 부친하고 합의가 끝났기 때문에 이미 해결했다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여기서 남편이나 부친을 ‘국가’로 바꿔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위안부 여성의 개인 청구권 논리가, 국가가 개인을 대표할 수 없으며 여성이 국가의 귀속물이 아니란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국가 간의 합의와 보상으로 마무리 지어졌던 일본군 위반부 문제가 개인 청구권으로 그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바로 국민 국가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민족주의 담론을 벗어나기 위하여

  하지만 위안부 여성들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개인 보상권 청구소송 이후에 이를 해석하는 데서 다양한 패러다임이 발생했다. 저자는 문제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전시하 위안부를 정당화하기 위한 측의 ‘매춘’ 패러다임, 그리고 ‘매춘’ 패러다임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 성 노예제’ 패러다임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도 함께 다룬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 문제를 둘러싼 패러다임 속에서 경기를 끝내는 호루라기를 분다. 결국은 이 두 가지 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국가주의'라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특히, 위안부 여성들을 지지하기 위한 ‘군대 성 노예’ 패러다임은 한국의 반일 내셔널리즘을 위해 동원되고 있다. 이러한 민족 담론적인 견해는 자민족 중심적으로 흐르면서, 타민족과 타지역 피해자와의 사이에 벽을 쌓게 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흐를 수 있다. 이는 반일 내셔널리즘적인 ‘군대 성 노예’ 패러다임이 결국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이 아니라 ‘민족’ 이 일본이라는 강간범에 의해 유린된 것이라는 의식을 낳게 만든다. 
저자의 우려처럼,
국가를 넘어서는 역사적 담론이 생산된 지점에서 발생한 운동들이, 다시 민족주의 담론을 재생산하면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여성은 여전히 ‘주체’가 아니라 ‘민족 주체’일 뿐일 것이다.

새로운 기억 정치학을 꿈꾸며

이렇게 국가의 권력을 헤집어 보는 것. 즉 젠더 중립적이라고 믿었던 국가를 ‘젠더화’ 하고 그 방법론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 이것은 곧 우리들의 기억과 관련된 문제이다. 국민들의 기억을 어떻게 동원하고 이용하는지를.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억의 정치학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모두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사실’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위안부 여성들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변화‘ 했다. 그것은 바로 ’피해자의 치욕‘에서 ’가해자의 성 범죄‘로의 전환이다. 이것이 바로 젠더사가 역사를 새롭게 쓴 성과이다.

고민해야 한다. 기억 속에서 ‘침묵 당한 소리’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이 고민의 시작은 우리가 정사(正史)라고 있는 공공의 기억에 대한 해체일 것이다. 이 공공의 기억은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공공의 기억을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사가 역사 속의 수많은 주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다양성과 대립을 어떻게 감추어 왔는지를 말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것은 힘 있는 자들이 부여한 ‘특권’에 불과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이 재발견하는 역사는 뜻 깊을 수밖에 없다. 역사 속의 여성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표상’에 불과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 ‘남성사-곧 국가를 위한’ 에 불구하다고 선고하고 재심을 청구하여 여성들을 재발견하는 일은, 단순히 여성학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잊혀진 소수자들의 역사에 빛을 들이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소수자를 배제하거나 침묵시키고 모든 국민들을 동일화시키려는 ‘상상의 공동체’일 뿐인 국가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지 않을까. 보풀처럼 일어나 섬세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역사들이 숨 쉬는 지평, 꿈꿀 수 있다면 추구해야만 하는 역사의 형태일 것이다.




-에필로그.
  미래의-아직 오지 않은- 나를 위해

인식할수록 아프다고 했던가.
온 몸 가득 자잘한 물집들이 잡혀 견딜 수 없는 간지러움에 온 몸을 벅벅 긁어 대다가, 그것들이 하나씩 투닥 투닥 터지며 비릿한 물들을 뱉어 내자 이젠 앓기 시작 한다.
하지만 고통이 따른 앎은 견실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고, 책임감이 수반된 앎만이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리트머스 시험지를 내 몸에 가져다대어 ‘나’는 대체 어떻게 형성된 인간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그 시작일 것이다. 그것은 형성된 의식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과정 속에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주체적’ 상태에서의 지식습득을 위함이다.  (2007)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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