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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1 이들의 책임지는 관계를 파기하라. <나의 친구, 그의 아내> (1)


1.
치킨집.
전경, 재문은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만들고 있다 그때 후경에서 젊은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려서는 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 온다
'형 죄송해요. 늦잠을 자서 그만'
'너 내가 오늘 뭐 해놓으라고 했어. 너 제일 나쁜 게 뭔지 알아? 무책임한 거야!'
 
'무책임'이라. 그렇다. 영화가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나오는 이 장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책임의 문제. 영화 중 가장 강렬했던 두 장면 중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책임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책임과 무책임을 논하는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다.

2.
친구 예준을 위해서라면 아내와의 섹스도 도중에 그만두고 나설 정도로 그를 끔찍이 위하는 현재 공항 식당 요리사인 재문. 그리고 한때 운동권 출신이고 지금은 금융계에서 잘 나가는 외환딜러인 재문의 친구 예준과 재문의 아내인 헤어디자이너 지숙. 그런데 이들 셋이 같이 서 있는 모습은 왠지 위태로워 보인다. 재문과 지숙 부부는 경제적으로 예준에게 큰 도우을 받고 있고 예준 역시 그들을 기꺼이 돕는다. 신혼여행 호텔비 지원부터 최근에는 재문부부가 선망하고 고대했던 미국으로의 이민계획이 사기당하자 예준에게 또 도움을 받았다. 아니 예준이 부부에게 자신의 도움을 받을 걸 요청한다. 재문은 소극적으로 지숙은 적극적으로 그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들인다.
돈 있는 사람이 사정이 덜한 사람에게 도움주는 일, 그래 당연하다. 이런 관계가 파생될 수 밖에 없는 영토가 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예준이 재문 부부에게 툭하면 내뱉는 '책임을 진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우월적인 위치에 있는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로 보인다. '선물'과 다르게 '돈'을 주고 받는 것은 한쪽에게 빚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이 빚지는 기분이 만들어 내는 뒤틀린 책임 관계. 예준이 재문에게 돈으로 책임져 주는 일은 그만큼 다른 방식의 정당한 보상을 전제로 한다. 그만큼 이들의 관계는 사회적 징후를 드러내는 알레고리 장치다. 
그래서 예준과 재문의 관계는 철저히 권력 관계다. 예준은 재문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현재 모습을 합리화하고 싶은 것 같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재문과 지숙이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는 말 못하냐'고 말하자, 오히려 버럭하며 '니들이 누구 덕에 살고 있는데!'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표출된다. 회사에서 잠든 예준의 주위로 청소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등장하고, 이 장면이 치킨집을 청소하는 재문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것은 이 셋의 관계가 얼마나 권력적인지를 암시해주는 듯하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균형이 깨지고 마는 이들의 평등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 생각해보면 모든 평등해 보이는 관계 속엔 언제든 예속의 가능성이 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이.

잘못된 것은 무책임한 게 아니라 책임과 무책임을 논하는 '이들의 관계'다.




3. 일단 예준

예준은 재문에게 아들을 낳으면 민중혁명을 줄여 '민혁'으로, 딸을 낳으면 마르크스의 아내였던 '레니'로 이름을 지으라 한다. 그만큼 예준은 아직도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운동권의 정신을 이어나가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경험의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하면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것일진대, 지금의 예준은 현재 몰인정함때문에 회사동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 비난은 이런 대사들로 표현된다. '운동권 출신이라면서 이래도 되냐'. (하지만 예준 세대 중 운동권 아닌 사람 꼽기가 더 힘들지 않은가) 예준에게 운동권 생활의 추억을 아름답게 공유할 수 있는 건 친구 재문 뿐이다. 그리고 재문은 예준을 지적, 물질적으로 동경하는 존재다.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한때 운동권 출신이지만 지금은 금융계에서 잘 나가는 외환딜러인 예준, 이 수식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준의 갖고 있는 욕망은 어떤가?  그가 자본주의의 첨병에서 일한다는 문제보다 자신의 행동이 사람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운동권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좀 딴 소리지만 이런 사례들은 내게 늘 아쉽다. 왜 그럴까. 그런 경험들이 현재 삶에 자양분이 될 수 없을까. 살아가면서 양심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이라도 실천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좋은 경험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걸까. 그 경험을 낙인과도 같게 만든 변해버린 개인의 삶이 문제일까. 실천성이 부족한 운동권 논리의 문제일까 -_-) 
 
4. 이들의 현재 관계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바닥으로 치게 하는 사건.

  헤어 디자이너인 지숙이 미용박람회를 위해 프랑스를 찾은 사이 재문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예준이 실수로 재문의 갓난 아이를 질식사시킨다. 하지만 이 죄를 재문이 뒤집어 쓰고 감방까지 간다. 지숙도 그렇게 오해했다. 예준은 자신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감옥으로 간 재문을 대신해, 그의 아내인 지숙을 지켜 주는 것으로 책임을 지려 한다. '내가 지숙씨 책임지고 잘 보살필게' 또 그 방식은 어마한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제적 지원을 넘어 친구의 아내를 욕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불안하게 안정을 현상유지했던 권력관계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준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예준이 말하는 '책임'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재문보다 더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재문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끊임없이 재문이 가진 것을 욕망했다.
 
5.
재문이나 지숙 역시 다를 건 없다. 비록 예준때문에 그들의 가정마저 파괴되긴 했지만, 그들이 예준에게 기대했던 경제적인 욕망은 위태로운 상황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재문은 예준에게 책임을 다했다. 그에 대한 고마운 혹은 빚진 마음을 대신 죄를 뒤집어 쓰는 것으로 보답했다. 그것은 자신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온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는 무책임한 것을 너무도 싫어하기에. 하지만 재문이 예준에게 느끼는 책임감 역시 갖지도 않았으면 더 좋았을 감정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가 말하는 책임이나 무책임은 예속하고 예속받는 권력 관계에서 파생됐다. 그래서 이들 관계의 책임지고 말고는 문제는 전혀 '문제적'이지 않다. 문제는 그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결말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예컨대 만약 예준이 진실을 말했다고 이들의 관계가 달라졌을까. 예준이 재문에게 미안하다고 백번 사죄하거나, 자신이 민혁이를 죽였다고 부부 앞에 무릎 꿇는다면 기존의 관계를 유지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도 돌아가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런 관계는 위태롭다. 파괴되기 이전 그들의 관계도 좋아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것은 겨우 덜 나쁜 쪽으로 가는 방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상 유지가 오히려 서로에게 해악이다. 물론 인간 관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지극히 알레고리적이라는 것. 모두가 똑같은 것을 욕망하는 상태에서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보다 우위에 서서 휘두를 수밖에 없는 권력을 너무나 잘 알기에. 




6.
그래서 감독은 끝까지 갔을 것이다. 이 어긋난 관계를 끝까지 밀어 부쳐서 파괴시켜 버린 다. 두 남자가 지켜주고 욕망하는 존재였던 지숙의 복수를 통해서. 지숙의 복수는 예준을 향한 것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는 예준을 가둔 채 자신의 고급 헤어샵에 불지른다. 예준이 준 돈으로 얻은 그 헤어샵을. 영화 속 지숙은 재밌는 인물이었는데 그녀 역시 예준에게 느낀 '힘'은 곧 그의 부와 명예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준이 자신의 손가락을 빨 때 기분이 안좋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찝찝한 감정을 계속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예준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는 예준의 부를 이용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예준과의 섹스이후 자위 장면을 보아도 지숙은 다른 무엇에 예속되지 않는 자기만의 욕망을 갖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 또 지숙이 자기 욕심을 위해 프랑스로 가지 않았다면 민혁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민혁이가 생명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 민혁이의 죽음으로 인해 이들의 권력관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화는 천장으로 옮겨간 불길이 숨이 멎을 정도로 이글거리는 모습을 몇 초간 보여 준다. 강렬했던 두 번째 장면인데, 난 왠지 눈물이 울컥 날 것 같았다.  



7.
지숙이 아이를 낳을 때 재문이 짓던 그 서글픈 표정처럼, 둘 사이의 첫째 아들인 민혁은 어쩌면 태어나지 말아야 할 혹은 어차피 숨막혀 질식사 할 수 밖에 없는 '욕망'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지숙이 임신한 그 아이는 과연 무엇을 상징할 수 있을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지숙이 손님의 머리칼을 계속 서걱서걱 잘라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는 자꾸만 소박해졌다. 지금 사회에서 그런 심적 여유가 생길지는 의문이다. 아니다. 자본의 욕망이 제 스스를 불사르는 모습을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지켜보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돈이 문제라고? 아니다 우리가 문제인거지. 돈의 자리는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도 대치 가능한 것이라 생각되니까. 

이런 영화를 통해 우리네 모습을 자꾸 되돌아보고 더디더라도 더듬거리며 나아가다 보면 좀 달라질까.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쓸 수 밖에 없는 이 단어)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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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9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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