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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6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습다. 나 브리게는 스물여덟 살이나 되었는데, 아무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이 여기 내 작은 방 구석에 앉아 있다. 여기에 앉아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이 존재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회색빛 파리의 오후에 6층 방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이 현실적이고 중요한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도 그리고 말해 보지도 못한 일이 가능할까라고. 인간이 보고생각하고 글로 쓰기에 수천 년의 시간 여유를 갖고 있었으나 이 수천 년을 마치 학생이 버터를 바른 빵과 사과를 먹는 학교의 휴식 시간처럼 흘려보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많은 발명과 진보, 문화, 종교 그리고 세계에 대한 예지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표면에 머물러 있는 일이 가능할까? 약간의 가치가 있는 이 표면에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천을 씌워서 그것이 마치 여름 휴가철 응접실 가구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세계사 전부가 잘못 이해되는 일이 가능할까? 어떤 낯선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서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데, 그 사람에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대중에 대해서만 말해 왔다고 해서 과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그것을 돌이켜야 한다고 믿는다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이 자기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태어났으므로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걸 개개인 모두에게 각각 상기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인간들이 결코 있지도 않았던 지나간 일을 정말 정확하게 안다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모든 현실의 일들이 아무 의미도 없고, 그들의 인생은 마치 텅 빈 방에 있는 시계처럼, 어떤 것과도 연관 없이 그저 흘러가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신>이라고 말하면서 무언가 공동의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두 명의 어린 학생들을 보아라. 한 아이가 칼을 한 자루 사고, 옆에 있는 아이도 같은 날에 똑같은 것을 샀다고 하자. 일주일이 지나서 두 아이들은 서로 칼을 보여준다. 그럼 그것들에는 비슷한 점이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음이 드러난다. 두 개의 칼은 각기 다른 두 아이의 손에서 그렇게 달라졌다(그래, 하고 한학생의 어머니가 말한다. 너희들이 쓰는 모든 것은 금방 닳게 마련이지). 아, 그렇지, 마음속에 <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신>을 쓰지 않을 거라고 믿는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 같기만 하더라도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그저 가능한 것 같기만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하리라.
이런 불안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은 아무라도, 하지 못한 일 중에서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하기 시작해야 한다. 아무라도 좋다. 전혀 적임자가 아니라도 좋다. 이 젊고 보잘것없는 외국인 브리게는 6층 방에 앉아서 낮이나 밤이나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그래, 그는 써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종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29쪽에서 32페이지에 걸쳐.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