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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22 슬픔이 없는 십오 초/심보선 (4)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지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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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소리 2008.09.26 1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대의 블로그에 올린 시들은 나를 잠시 쉬게 만드는 거 같아 좋아. 그래서 아주 가끔 마음을 식히려 들려.
    좋은시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사랑을 꿈꾼다는 구절..표현이 좋네.해가 쨍 내리찌는 아파트 벽에 둘러싸인 화자의 고민,방황이 느껴지는 시같아

  2. Favicon of http://www.retoric.net/misosophie Omnia Vanitas 2010.11.08 0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시 감사합니다. 우연히 들렀는데 RSS 꾸욱 하고 가네요. 덕분에 심보선 시인에 큰 관심 가지게 될 듯합니다. 행복하시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