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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차별금지법 반대, 정체성의 정치학을 넘어서자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현민

1.

지금까지 소수자 운동은 기존의 사회체계에 소수자들의 삶을 포함시키라는 요구로 나타났다. “우리에게도 너희와 같은 삶을 달라!” 인권의 보편성은 이를 매개하는 유일무이한 도구였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추가될 때조차도, 소수자들의 삶은 특수, 예외, 주변의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소수자들은 대표적인 사회복지 실천대상이었다.

소위 진보진영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한때 유용했던
슬로건은 “그래, 너희의 정치는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지”라는 싸늘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소수자 운동은 계급, 민족과 같은 거대서사에 비하면 참 볼품없어 보였다.
그래서 ‘주변'운동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궁리 끝에 우리는 개인의 실존적인 삶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정체성의 정치학. 예컨대 동성애를 ‘취향'의 문제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기 위해서, 성적 지향이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동성애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렇게 우리는 다수자의 인정과 동의를 구하면서 이 운동의 중요성을 강변했다.

2.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안은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기존 20개의 차별 사유 중 7개가 삭제되었고, 구제조치는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게 됐다. 보수 기독교계는 “동성애는 자기책임이 수반되는 행위로 인권보호로
접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재계는 “학력이 명시된 것은 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삭제된 성적지향, 학력, 병력病歷, 범죄전력, 언어, 가족형태 및 가족구성, 출신국가는 하나같이 개인의 ‘책임'과 ‘자율성'의 영역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기 쉬운 것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보수 기독교계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동성애DNA에 관한 논문을 실은 최신 과학저널을 인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대사회에서 과학만큼 동성애의 존재를 잘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게 - 과학을 환원주의 논리와 결합시키는 것 -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또한 알고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정체성이 인위적이라는(만들어졌다는) 보수 기독교계의 지적에는 곱씹을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체성의 생산은 동시에 관계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정체성을 정체停滯시켰을 때, 비단 하나의 정체성을 주조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의 정체성에 포함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영역이 있는 한편, 이를 통해 위치를
공고히 하는 영역도 있다. 나는 소수자 운동이 이 논리를 더욱 밀고나가서 소수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다수자조차 어떻게 만들어지고 위치 지워지는지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트랜스젠더를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 혹은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남성이 되고 싶지만 질을 제거하고 싶지 않은' 트랜스젠더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애자들은 그런 트랜스젠더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해부학적 수술은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을 받아내고, 이성애 관계를 맺을 것을 다짐한 다음에야 행해진다. 이때 만들어지는 것은 소수자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다. 동시에 다수자 남성과 여성도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용 화장실이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거꾸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용 화장실을 보고, 자신이 장애인과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획득한다. 소수자 장애인이 만들어질 때 다수자 비장애인도 만들어진다. 이처럼 다수자와 소수자, 보편과 특수는 둘 다 권력의 산물이다.

4.

그러므로 나는 소수자 운동이 정체성의 정치학을 넘어서 권력의 이분법
(다수자/소수자, 보편/특수)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병력, 가족형태, 범죄전력, 학력과 같은 범주들은 소수자의 정체성이라는 틀로는 연대하기 쉽지 않다. (한편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소수자 진영에서는 기존의 LGBT - Lesbiana·Gay·Bisexual·Transgender - 와 같은 범주가 아닌 퀴어queer 주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이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제를
추가하면서 기존의 소수자 운동에서 불명료했던 지점을 좀 더 분명히 하고자 한다.

첫째, 소수자 운동은 진보운동이다. 소수자 운동은 딱한 사람들의 처지를 돕는 운동이 아니다.
또한 특이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운동도 아니다. 소수자 운동은 미시권력을
문제 삼는데, 이때 ‘미시'는 소소하거나 사소한 영역이 아니다. 미시권력은 자본, 국가, 민족,
시장과 같은 거시권력이 매끄럽게 작동하기 위해서 (은폐되어야 하는) ‘전제들'을 구성한다.
가령 임금노동의 생산성이 확보되기 위해 가정은 쉼터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쉼터가
되기 위해 여성은 돌봄의 미덕(?)을 지녀야 한다. 소수자 운동이 문제 삼아야 하는 건
정확히 이 차원이다.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의 표현을 빌자면, 소수자 운동은 정치(통치)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인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둘째, 소수자 운동은 대중운동이다. 소수자 운동은 대중이 민족, 노동자와 같은 거대(?)범주로
포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소수자 운동은 개인이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대중은 균질적이지 않고 혼성적이기 때문에, 권력의 분류학을
초과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한 명의 개인조차 그러하다.) 가령 질과 음경을 둘 다 가지고
태어난 양성구유자는 성소수자인가 장애인인가.
소수자 운동은 분류학 너머를 사고해야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대중적일 수 있다.
 소수자 운동은 그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왔다. 하지만, 이제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질문은 권력의 좌표 안에서 현재의 위치를 인식하고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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