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요즘의 내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글.

 

 

 

논술고사

답안지를

넘겨보며

 

황현산

 

내가 재직하는 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해 예년과 마찬가지로 논술고사를 시행했고, 교수들은 신년 벽두부터 그 답안의 채점에 들어갔다. 문제의 형식도 몇 개의 문항을 준 다음, 거기서 공통된 주제와 다른 입장들을 찾아내어 설명하고 수험생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게 하는 것이 예년과 비슷했다.

 

문제가 쉽지는 않았다. 학문적인 짧은 텍스트이기도 하고 법정의 논고이기도 한 그 제시문들은 모두 객관적인 사실의 규명과 주관적인 해석이 맺고 있거나 맺어야 할 관계를 문제삼고 있었다. 세상에는 누가 보아도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완벽하게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 신념에 불과한 것인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는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진실은 국면에 따라 바뀌고,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변덕스런 관점만 헛되이 떠돌아다니는 것일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밝혀내는 것일까, 자기 처지에 맞는 관점과 기준에 따라 그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일일까?

 

이 질문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판단하여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옳은 의견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해결해야 할 질문이다. 학교가 이 문제를 수험생들에게 제시할 때도 완결된 해답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를 대하는 수험생 개인의 태도와 생각의 깊이를 보려는 것이었다. 수험생들의 의견은 당연히 여러 수준에 걸쳐 다양하다.

 

우선 사실이면 사실이고 아니면 아니지,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진실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학생들이 있다. 어느 답안은 우리가 천동설을 믿고 있을 떄도 지구는 엄연히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 반대편에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오롯이 파악되는 지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모든 진리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기 떄문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을 개진하는 수험생들이 과학적 체계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그 역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학자들이 함께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이자 그 체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두 가지 대비되는 관점 사이에 진리에 대한 수험생들의 태도가 있다.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견이 의외로 많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믿는 것이 역시 옳은 것이라는 식이다. 권력과 이해관계가 진실을 결정하니 우리는 무엇보다도 규칙의 잣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현실주의적 의견의 바로 곁에 진실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고 진리는 도달할 수 없는 낙원과 같다는 불가지론이 있다. 그것을 세속화한 형태가 진리상대론이다. 세상에는 완전히 맞는 의견도 없고 완전히 잘못된 의견도 없으며 서로 다른 관점, 다른 사고법에서 비롯한 다른 견해가 공존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상대주의의 편에 선 수험생들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의 지표와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사고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 다양성을 주장하는 의견들은 대체로 목소리가 활달하고 문체가 자신감에 넘쳐 있어서, 모든 사안에 양비론이나 양시론으로 반응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풍토를 그대로 반영하고 상징하는 것만 같다. 출제자들이 필경 염두에 두었을 의견, 진실에 대한 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이 자신의 의견 속에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고, 그로써 자신의 생각을 다시 성찰하고 그 깊이와 폭을 넓혀, 한 주관성이 다른 주관성과 만날 수 있는 전망을 내다보고, 인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이라도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가 오히려 수줍은 목소리다. (2004)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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