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뜰

일상 2015. 8. 19. 23:30

 

엄마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이다. 어쩜 참 좋다. 

 

 

 

 

 

 

 

처음 사진은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고향 범뜰은 물에 잠겼다. 엄마의 고향이기도 하다. 댐을 만드느라고 그곳에 살던 모든 주민들이 이주를 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성주호가 생겼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풍경도 이름도 참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범뜰이라는 지명은 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가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부른다. 실제 명칭인 봉두리에서 나온 것 같다.) 물에 잠기기 전, 내 나이로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범뜰에 자주 갔다. 사촌들과 온동네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막내 이모부가 우리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자주 찍어주던 기억이 난다. 내가 걷고 뛰고 잠자기도 했던 곳이 지금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갖고 있지만 그 기억은 죽음으로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생에서의 기억들이 아니라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단절된 것이라 아니라 죽음으로 이어진 거니까.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다. 초가집들이었다. 나는 외가의 작은 마루에 모로 누워선 먼 풍경을 오래 바라보기도 했다. 동네에 소가 참 많았는데 그 소들은 다 데리고 나왔을까. 나무 한포기도 다 돈으로 매겨 보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엄마로부터 들었다. 나는 저 첫 사진이 물에 잠긴 범뜰에서 찍은 거라 착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범뜰 외가댁으로 가는 길과 몹시 닮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닌 것도 알겠다.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땐 순간 범뜰이 물에 잠긴 것도, 그게 이십 년도 더 된 일이란 것도 잊었던 거다.

어느 날 수확이 끝난 논에서 사촌들과 뛰어 놀다 해가 질무렵 외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뭔지 모를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송아지 한마리가 우리에게 정확히는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 앉았고 그런 나를 송아지가 뛰어 넘었는지 옆으로 피했는지, 원치 않게 나를 만났는지 결국엔 나를 피하기로 작정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순간이 지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서야 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 송아지를 뒤쫓던 외할머니가 다가와서 아이고 괜찮냐 아이고 아이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 길이 그 길이다. 내가 순간 착각했던 길. 물에 잠긴 길. 

사진들은 외가가 이주한 집에서 찍은 것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어서도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장작을 패고 사슴과 소를 길렀다. 농사 지을 땅은 마땅찮아서 그만두셨다. 어느 날은 사슴이 들이받아 갈비뼈가 부러지셨는데도 일을 하러 나가겠다고 그러셨단다. 사슴이 밉기도 할텐데 두 마리가 서로 뽀뽀하면 와서 보라고 저것들 참 이쁘다고 그러셨다. 이것도 몇 년 전의 일이고 이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주한 집도 팔고 도시의 빌라에서 사신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점점 잊혀지던 물 속에 잠긴 마을이 다시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잊고 지내던 것들이 새삼 떠오르면 왠지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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